127화 싸움 (1)2021.09.22.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너한테 열등감이 있다고? 화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어쩔 수 없죠. 그래요, 한번 싸워 봅시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애들처럼 주먹질이나 할 수 없으니 6월 메이저 경매 위탁을 갖고 싸워보죠.”
경매 위탁? 여태까지 한 번도 강민수가 경매 위탁으로 나에게 이겨본 적이 없었다. 추정가로 보나 작품수로 보나 항상 내가 이겼다. 강민수가 탑 옥션에서 나가는 것은 나도 바라는 일이고, 먼저 걸어온 싸움을 내가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그러죠.”
결국 네 발로 여기서 나가게 될 거다. 강민수! * 음료를 마시다 말고 다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강민수랑 내기를 한 거네요?”
“그렇지.”
“뭐하러 그런 일을 했어요.”
“그 자식이 먼저 싸움을 거는데, 피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그래도요. 잘못하면 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혹시 모를 상황을 다영은 걱정했다.
“걱정하지 마. 꼭 이길 거니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확한 기준이 뭔데요? 작품 수예요?”
“아니. 제1의 기준은 위탁받은 받은 작품들의 낙찰가를 합한 금액이야.”
“유찰된 작품은 위탁해도 빼는 거군요.”
“맞아.”
“낙찰가 총액이 같을 경우에는요?”
“그때는 몇 점 위탁받았는지에 따라 승패를 가르기로 했어.”
“한마디로 6월 메이저 경매가 끝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거네요?”
“그렇지.”
기준을 들은 이후에도 다영은 걸리는 부분이 있는지 조용했다.
“뭐가 걸려?”
“터무니없는 일이잖아요. 여태까지 오빠, 강민수한테 위탁에서든 낙찰가에서든 한 번이라도 져 본 적 있어요?”
“없지.”
“그런데 굳이 강민수가 왜 그런 싸움을 걸었을까요? 이상해요.”
다영의 말을 듣고 보니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슨 꼼수를 부리더라도 내가 이겨.”
“근자감 하나는 엄청나네요.”
“근자감이라니. 여태까지 내가 낸 결과들이 근거거든?”
“알아요, 나도. 그래도 모르니까 좀 잘 알아봐요. 저도 알아볼게요.”
“그래주면 좋고.”
강민수가 어떤 꼼수를 부린다고 해도 그 이상으로 해서 이기면 그만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김 책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며칠 후면 다영도 나와 이수지의 소문을 듣게 될 것 같아 괜히 신경이 쓰인다.
“김 책임님에게 들었는데, 이수지가 주인탁 돈줄을 끊은 것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 났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혀가 자꾸 꼬여 들어갔다. 여친에게 이상한 소문을 변명하는 남자처럼 말이다. 그런 나를 다영이 물끄러미 봤다.
왜 그렇게 봐?”
“오빠, 나 좋아해요?”
나는 발끈했다.
“좋아하긴 누가? 괜히 이상한 오해를 할까 봐 그러는 거지.”
“이상한 오해 안 해요. 두 사람이 사귀든 말든 이제는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그런 변명 같은 말 할 필요 없어요.”
벌써 정리하다니, 역시 다영은 과감하다. 한번 뒤돌아서면 그대로 끝이다. 강정휘 갤러리에서 나올 때도 그랬다. 그런 성격을 잘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들어 뾰로통하게 굴었다.
“변명이 아니라 설명이야.”
“어쨌든요. 다음에 또 그런 이야기하면 오빠가 나 좋아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알았죠?”
“알았다. 알았어.”
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이스 초코를 쪽쪽 빨아마셨다. * 강정휘 갤러리 대표실. 흥분한 강민수는 엄마에게 자랑을 하는 아이처럼 재잘거렸다.
“한지감이 하겠다고 받아들였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볼 것도 없는 사람들이 꼭 그렇게 자존심을 세운다니까요.”
강정휘는 능숙하게 강민수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좋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그냥 미술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민수 씨 같은 사람들이 남고 한지감 같은 사람이 없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죠.”
헤벌쭉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강민수를 보면서 강정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저렇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서야 무슨 일을 하겠다고.’
미술계의 고객들은 대부분 자산가들이고, 그런 사람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능구렁이 같은 면이 필요하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화를 부른다.
‘이용해 먹고 버리면 그뿐인 일회용이니 상관없지.’
음흉한 미소가 강정휘의 입가에 스쳤지만, 강민수는 기쁨에 빠져 미처 보지 못했다. 표정을 바꾼 강정휘는 다정한 태도를 보였다.
“이번에 민수 씨가 이길 수 있도록 제가 물심양면으로 도울게요. 판매를 원하는 고객이 있으면 민수 씨에게 연결시켜 줄 거예요. 사고 싶다는 고객이 있으면 이번 메이저 경매를 소개할 거구요.”
그럼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낙찰받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냥 민수 씨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요. 다른 마음 없어요.”
이번 대결에서 지면 한지감은 탑 옥션에서 나간다. 엄청난 돈을 마다하면서까지 한지감은 탑 옥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오는 상황에 처하면 정신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강정휘가 노리는 것이다.
“잘 알죠.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뭐죠?”
“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을 한지감이 위탁받았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걱정이 많이 되네요.”
“그 작품이 과연 낙찰될까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째서죠?”
“최근에 옥션 시장에 고가의 작품들이 많이 유찰됐어요. 보나마나 내정가가 높을 테니, 낙찰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두고 봐요. 내 말대로 될 테니까.”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강정휘가 이토록 자신있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살아왔던 방법을 써서 그 작품이 유찰되도록 만들 것이다. * 졸린 눈으로 나는 소파에 기대 있었다. 평화로운 토요일이어야 했지만, 눈앞에서 서성이는 경환 때문에 그렇지가 않았다.
“가만히 좀 앉아있으면 안 되겠냐?”
“나도 그러고 싶은데 불안해서 그게 안 돼.”
울상을 지은 경환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오늘까지 작품 관리팀에서 합격 여부를 통지해 주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정 그러면 내가 박 팀장님에게 전화 걸어서 슬쩍 물어볼까?”
“아. 됐어! 난 떳떳하게 입사할 거거든?”
정색하는 경환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
“알아봐 준다는 거지, 압력을 넣는다는 것이 아니거든? 난 일개 사원이라 그럴 능력도 안 되고.”
“어쨌든 같이 일하는 입장인데 부담스러울 거 아니야. 부담 주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일개 사원이 아니라 무려 사원이거든! 요새 취업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미안하다. 형 생각이 짧았다.”
경환의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나는 당사자도 아니건만 경환과 함께 움찔했다. 천천히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제가 김경환 맞습니다.”
합격했는지 알고 싶어서 은근슬쩍 다가갔지만, 수화기 너머의 소리는 나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아 경환의 얼굴을 살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떨어졌구나……. 괜히 추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환아. 다른 곳 내가 알아봐…….”
“됐어. 괜찮아…….”
많이 실망했는지 그는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내 앞에서까지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 임마.”
“정말 괜찮아. 왜냐면…… 합격했거든!”
훅 고개를 든 그가 폴짝 폴짝 자리에서 뛰었다. 환한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야! 그럼 그렇다고 처음부터 말할 것이지. 감히 형을 낚아!”
“놀래주려고 그랬지! 우리 채령이한테 얼른 말해줘야겠다!”
“어이구. 사랑꾼 나셨네, 나셨어.”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경환은 바로 채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령아! 나 합격했어! 바로 다음 주부터 출근해!”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경환과 채령의 통화를 봤다.
“채령아. 내가 꼭 행복하게 해줄게!”
1분 만에 나는 그 절절한 통화 내용이 지겨워져서 TV를 켰다. 30분이 지나서야 그 애틋한 통화는 끝을 맞았다. 감동에 흠뻑 취한 경환은 훌쩍거리며 내 앞에 섰다.
“형.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나 많이 도와줘.”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아. 좀 잘해 줘.”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당연히 도와주지.”
“고마워어.”
나는 그를 힐긋 보고 물었다.
“채령이 좋아하지?”
“응. 울더라구……. 내가 고생한 것이 뭐가 있다고……. 생활비 대준 것도 없는데…….”
“데이트비 더 냈잖아. 그것도 쉽지 않지.”
“돈 모으는 것만 아니면 내가 다 내는 건데.”
“돈 모아서 뭐할 건데?”
“빨리 돈 모아서 프러포즈하고 싶어.”
생각만 해도 좋은지 경환이 헤실거렸다. 예쁜 사랑을 하는 경환의 모습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래. 빨리 결혼해서 집 좀 비워줘라. 나도 예쁜 각시 데려오게.”
“내가 나가면 데려올 사람이나 있고?”
바로 깐죽거리는 모습에 나는 헤드락을 걸었다.
“없을 거 같냐! 나 좋다는 여자 많거든!”
헤드락에서 빠져나온 경환이 지지 않고 말했다.
“좋다는 여자가 많으면 뭐해. 형이 좋아하는 여자는 없는데. 이수지한테는 게이라는 핑계나 대고, 비겁해!”
“내가 일부러 그랬냐? 자기가 멋대로 오해한 거지!”
“그건 그렇다고 쳐도, 주인탁 돈줄 막는 걸 그냥 뒀잖아.”
경환이 다 안다는 듯 팔짱을 꼈다.
“어제 찾아가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거든?”
안 그래도 찔려서 어제 이수지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나 때문이 아니라, 식민사관이 한국에서 없어지기 바라서라고 하더라!”
절대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냐는 식으로 묻진 않았다. 골동상 때부터 이어온 인연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형은 뭐라고 했어?”
“바른 생각을 가지신 분이 있어 다행이라고 했지. 이래도 내가 비겁하냐?”
“아니, 난 그냥 궁금해서 그랬지.”
본인이 아니라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그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내가 확 노려보자 경환은 자신의 입을 톡톡 때렸다.
“하여튼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야.”
웃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무 웃겨, 나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화난 거 아니지?”
“아닌 걸로 해줄게.”
나를 살핀 경환이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좀 다른 이야기인데, 나는 형이 너무 일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연애는 안 하든 말든 자유거든?”
“알지. 아는데 너무 일만 하는 거 같아서, 걱정돼서 그래. 어떤 상황에서도 형 옆에 있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잖아.”
“그런 사람 만나기가 쉽냐?”
“쉽지 않지. 나와 채령이는 운명적인 관계니까.”
“어이구.”
닭살이라고 눈살을 찌푸리는데도 경환은 나를 똑바로 봤다.
“형이 놓쳐버릴까 봐서 그래. 형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인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서 놓쳐버릴지도 모르잖아. 우리 아빠처럼.”
말을 하는 경환의 눈빛이 슬퍼졌다. 경환의 아버지는 일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가정을 소홀히 했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혼당했다.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기에 나는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알았어.”
어쩌면 내가 일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 출근한 지 얼마 안 돼서 서정선이 나를 불렀다.
“지감 씨가 경매 순서 정리한 것 잘 봤어.”
괜찮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어서,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셨습니까?”
“잘 했던데?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어.”
“감사합니다.”
칭찬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모두 다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와 서정선을 주시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서정선이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6월 경매 순서는 지감 씨가 맡았으면 좋겠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원래 잘하는 사람이 열심히까지 한다니까 기대가 되네.”
백 책임이 시크하게 축하를 전했다.
“축하해요. 지감 씨. 잘해봐요!”
장희정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못해본 건데 지감 씨가 먼저 하네요. 좀 질투나려고 한다.”
장희정의 말을 들은 서정선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발전적인 질투라면 환영이야. 희정 씨.”
“그런가요?”
“왜 아니겠어.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도 있잖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도는데 난데없는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그 발전적인 질투, 저도 하고 싶습니다.”
불청객의 존재는 강민수였다. 온라인 팀에서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두 의아하게 봤다.
“저에게도 경매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