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소문 (2)2021.10.09.
“기분 나쁘네요.”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끌려요.”
응? 이게 무슨 소리일까?
“무슨 뜻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용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강정휘를 골탕 먹일 수 있는 것이 끌린다는 거예요. 그때 당한 것, 아직 돌려주지 못했거든요.”
“그때라면 제가 사장님을 처음 뵀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그렇군요.”
아들과 비슷한 느낌을 줘서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앙심이 남은 건 당연한 일이다. 나도 그것 때문에 이곳에 왔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이용한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조심스럽다.
“고민하실 시간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생각해 보니 기분 나쁠 것도 없네요. 이익이 맞아 떨어져 잠시 한배를 타는 것뿐이니 말이에요. 좋아요. 내가 그 시작이 되죠. 어떻게 하면 되나요?”
“어렵진 않습니다. 그저 모임에 나가서 살짝 말만 흘려주시면 됩니다.”
설명을 들은 권미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 이틀 후. CEO들이 모이는 자선 행사 파티에 권미애가 참석했다. CEO라고 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실질적 오너들이 참석하는 파티였다. 소문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 파티를 선택한 것은, 강정휘와 안성미가 다 참석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연회장에 들어선 권미애는 안을 쓰윽 둘러보았다. 아직 강정휘는 도착하지 않았는지 안 보였지만, 멀지 않은 곳에 안 회장이 보여 다가갔다. 권미애를 발견한 안 회장이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어! 권 사장님,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안 회장님도 잘 지내셨죠?”
“그럭저럭 잘 지냈죠!!”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권미애는 먼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시간 괜찮으실 때 같이 쇼핑해요.”
“정말요?”
사회적 지위가 높은 권미애와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안성미를 흥분시켰다. 화이트 백화점은 새길 출판사와 그 규모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곳이었다. 안성미가 팔짱까지 끼면서 친한 척을 하는 모습이 권미애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목적의 달성을 위해 웃으며 응대했다.
“당연히 정말이죠.”
“호호호. 저야 좋죠. 연락드릴게요.”
슬슬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권미애는 직감했다.
“안 회장님, 강정휘 대표와 친하시죠?”
강정휘가 재벌들 사이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는 채 안성미는 인맥을 과시하듯 으스대는 표정을 지었다.
“그림을 구매하시려나 봐요?”
“그것도 그렇지만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궁금한 것이요?”
“네. 얼마 전에 창평동에 갔다가 멀리서 강정휘 대표님을 봤어요. 작가 만나러 가신 줄 알았는데, 갤러리 직원들 말 들으니까 그쪽에 사는 작가는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럼 거기는 왜 가셨대요?”
권미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안 회장을 낚을 준비를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그 근처에 주인탁 교수가 살더라구요.”
안 회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식민사관…… 그 주인탁 교수요?”
“네.”
데구르르 구르는 눈동자가, 강정휘와 주인탁을 이을 연결고리를 찾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부추기며 권미애는 말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좀 신기했어요.”
“뭐가 신기해요?”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두 사람 다 탑 옥션 한지감 씨랑 사이가 안 좋잖아요.”
“탑 옥션 한지감 씨요? 쌍룡검 위탁했다는 그 스페셜리스트 말하는 거예요?”
권미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스페셜리스트가 이번에 ‘예술가의 초상’도 위탁받았잖아요.”
“‘예술가의 초상’ 위탁받으신 분은 총괄 아니에요?”
얼마 전 모임에 나갔다가 주워들은 이야기로 안 회장은 아는 척을 했다.
“소장자가 총괄의 지인이긴 한데, 위탁은 한지감 씨가 받았대요. 왜 가작이라는 소문 돌았잖아요. 들으셨어요?”
그 소문을 퍼트린 것이 자신이라고 말하기 뭐해 안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죠. 그게 왜요?”
“한지감 씨가 강 대표를 의심하더라구요. 증거가 없어서 뭐라고 하진 못하는 모양이지만.”
순간 안 회장은 움찔했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강 대표가 아무리 한지감 씨를 싫어해도 그런 소문을 퍼트렸을까요? 그럴 분은 아닌 거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답답해서 한 말이겠죠. 그런데 단시간에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진 것을 보면, 누가 고의로 소문을 낸 것 같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 가던 권미애는, 잠시 후 다른 사람을 발견한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안 회장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연스레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안 회장은 자리를 옮기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권미애의 말과 강정휘가 자신에게 한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런 결과가 도출된다. 한지감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주인탁과 강정휘가 한편이 되어 그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고, 강정휘가 얼마 전 안 회장을 불러 ‘예술가의 초상’이 가작이란 말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결국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감히 나를 이용해……!”
기가 막힌 타이밍에 강정휘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고, 그런 강정휘를 발견한 안 회장은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야! 강정휘!!!”
그런 안 회장을 보고 강정휘는 흠칫 놀랐지만 애써 담담하게 굴려 노력했다.
“안 회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뻔뻔스럽게 다 저질러 놓고 모른 척이야!!! 네가 나 이용해서 ‘예술가의 초상’ 가작이라는 소문을 냈잖아!!!!”
연기에 능숙한 강정휘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많은 회사 오너들이 보고 있지 않은가. 곱지 않은 눈초리들이 강정휘를 압박했고, 이럴 때는 발뺌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 무슨 소리? 이제는 나도 정신병자로 만들 생각인가 보지? 주인탁 같은 친일파랑 붙어서 어린애 골탕먹이는 게 좋냐? 골탕을 먹이려면 알아서 할 일이지, 감히 나를 끌어들여!!”
“주인탁 교수님은 손님이어서 만난 것뿐이에요!”
“웃기지마. 같잖은 장사꾼 주제에 나를 이렇게 이용한 대가를 받게 될 거야! 내가 너 가만히 안 둬!!!!”
안 회장이 강정휘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고, 강정휘는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졌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강정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화악 얼굴이 달아오른 강정휘는 급하게 일어나 도망치듯 연회장을 나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수군거렸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다른 작품도 아니고 ‘예술가의 초상’인데 그걸 어떻게 모조품을 만들어?”
“만들어도 백퍼센트 걸리지. 요즘 기술이 좀 좋아? 그런 거였으면 감정사들이 걸러내지.”
“강정휘 장사치 된 건 진작 알았지만, 이 정도로 망가졌을 줄은 몰랐네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주인탁 교수랑 손잡을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 ‘예술가의 초상’이 가작이라는 소문은 완벽하게 없어질 것이다. 그림이 가작의 오명을 벗는다고 권미애에게 이익이 되는 건 없었지만, 강정휘를 창피 주었기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연회장을 나간 권미애는 조용한 곳으로 가 한지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잘됐어요. 안 회장이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크게 화를 냈어요. 그 과정에서 강정휘가 무슨 소문을 퍼트렸는지 다 이야기 나왔구요.”
[다시 소문만 내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훨씬 잘됐네요!]
“그렇죠.”
[이제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겠네요.]
권미애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내 사적인 복수도 했는데요.”
[그래도요.]
문득 얼마 전 들은 한지감의 소문이 떠올랐다. 지난번 한지감과 마주했을 때 물어보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쳐 묻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뭐든 물어보세요.]
“현성 갤러리 이 관장하고 사귀어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단호한 음성에 권미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하. 역시 그랬군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신 분치고 너무 신나신 것 같은 느낌은 제 착각이겠죠?]
“맞아요. 지감 씨 착각이에요!”
* 다음 날. 대표실에 들어선 강정휘가 날카롭게 말했다.
“얼음물 가져와.”
“네.”
잠시 후, 얼음물을 가지고 나타난 비서에게 강정휘가 버럭 소리쳤다.
“왜 이렇게 늦어! 빨리빨리 하지 못해!!!”
“죄…… 죄송합니다.”
“느려 터져서는! 돈 먹는 하마가 따로 없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나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고!!!”
“……네.”
비서가 나가고 강정휘가 벌컥벌컥 얼음물을 들이켰다. 한 잔을 다 비워냈지만 화가 내려가지 않았다. 어제 파티에서 창피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푼수 주제에 감히 나를…….”
상대가 안 회장이어서 그 불쾌감은 더 높았다. 강정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반드시 갚아주지.”
안 회장에 대한 앙심은 언젠가 갚아주면 되었지만, 문제는 이미 ‘예술가의 초상’이 가작이라는 오명을 벗었다는 데 있었다.
“이걸 어쩐다.”
‘예술가의 초상’의 시작가가 오백억이라고 했으니 낙찰이 되면 당연히 강민수가 진다.
“하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경매시장에서 나온 적 없는 가격이잖아. 누가 그 돈에 그림을 사가려고 하겠어.”
언론에는 연일 높은 가격으로 낙찰된 그림들이 보도되지만, 국내 경매시장이 그만큼 호재인 것은 아니었다. 30-40억 되는 작품들도 유찰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물며 오백억인데 누가 사려고 하겠어. 모르긴 몰라도 내정가도 높을 거고.”
한국에서 그림에 그 정도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강 회장과 이수지 정도인데, 강 회장은 현대미술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이수지가 응찰하겠지만 내정가 위로 올라가진 못해서 결국 유찰되겠지.”
자신의 말이 무조건 맞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강민수가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이러시면 안 돼요!”
비서가 말렸지만 강민수는 듣지 않았다. 강정휘는 비서에게 그만하라는 표시를 하면서 반가운 척을 했다.
“민수 씨, 무슨 일이에요?”
거친 숨을 진정시키고 강민수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앉아요.”
비서가 나가고 강정휘와 강민수는 소파에 앉았다.
“말해 보세요.”
“주인탁 교수와 아는 사이이십니까?”
그제야 강민수가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어제 창피를 당한 일이 말이 퍼지면서, 주인탁과 같은 편인 것까지 강민수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알죠. 그림을 추천해 달라고 하셔서 해 드렸어요.”
“하지만 저한테 아는 사이라는 말씀을 안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말 안 했나요? 하긴 며칠 전에 처음 알게 돼서 민수 씨한테 말할 시간도 없었네요.”
“며칠 전이요?”
“네. 일주일도 안 됐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그렇지’하고 안도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참 다루기 쉬운 사람이다. 강정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요?”
“아…… 아닙니다.”
“아. 어제 자선 파티에서 있었던 일 들었구나? 주인탁 교수와 있었던 건 또 언제 봤는지, 안 회장이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썼더라구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어떻게 하죠? 이제 사람들은 ‘예술가의 초상’이 진작이라고 생각해요.”
“걱정 말아요. 여기가 뉴욕이나 런던도 아니고, 그런 고가의 작품이 먹힐 리가 없으니까.”
강정휘가 달래는데도 강민수는 불안한지 계속 말했다.
“고객들이 가격이 어떻게 되냐고 계속 문의를 해서 솔직히 불안해요…….”
어제 사건으로 짜증이 날 데까지 난 강정휘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질러 강민수를 쫓아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강민수가 필요했기에 그녀는 분노를 누르고 간신히 말했다.
“다 잘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민수 씨.”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네요.”
헤벌쭉 웃는 강민수를 보면서 강정휘는 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 외근을 끝내고 나는 회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는 나에게 장희정이 슬그머니 물었다.
“양 교수가 뭐래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다 변명이라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주인탁의 압력 때문에 양 교수는 쌍룡검 원고를 갑자기 뺐다. 그렇게 연락을 피하더니 며칠 전 연락이 와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압력을 받아서 어쩔 수 없는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상황을 설명이라도 해줬어야죠.”
쌍룡검 원고가 빠지게 되었을 때 모두 마음을 졸였기에 장희정은 격앙되어 있었다.
“제가 믿음을 드리지 못했나 봐요. 제 탓이죠.”
“그게 왜 지감 씨 탓이에요. 그런 소리 말아요.”
양 교수를 직접 마주했을 때는 불편한 감정이 많이 올라왔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장희정의 말대로 설명조차 해주지 않은 것이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장희정이 대신 화를 내줘서인지 그런 불편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려는데 톡톡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려 돌아보니 김도균이 있었다. 나는 놀라서 일어섰다.
“총괄님.”
“지감 씨. 잠깐만 회의실에서 보죠.”
“네.”
나는 김도균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아마 그도 양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 같다.
“양 교수는 잘 만나고 왔어요?”
“네. 많이 미안해하셨습니다.”
“그랬군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글쎄요. 그건 좀 회의적이네요.”
말을 마친 그가 나를 물끄러미 봤다.
“더 여쭤보실 것이 있으십니까?”
“네.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강민수 씨랑 위탁 가지고 내기했다면서요?”
헉…….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