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6월 메이저 경매 (1)2021.10.11.
“강민수 씨랑 위탁 가지고 내기했다면서요?”
헉……. 어떻게 알았지?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려 재빠르게 표정을 지웠다. 그런 나를 보고 김도균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부정할 생각하지 마요. 확실한 출처에서 들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나는 인정했다.
“네. 맞아요…….”
“왜 그런 일을 해요?”
“강민수 씨가 먼저 저를 도발했습니다.”
“의미 있는 도발이었네요. 이렇게 떡하니 넘어가 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김도균의 입장에서는 작품이 거래되는 회사에서 내기 도박판을 벌이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승패의 기준이 뭡니까?”
“6월 메이저 경매 낙찰가의 합입니다.”
“낙찰가의 합이 똑같으면요?”
“그때는 몇 점 위탁받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것으로 했습니다.”
얕은 한숨을 쉰 김도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눈으로 나를 봤다.
“한지감 씨에게 탑 옥션은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보죠?”
“그게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라고 해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가족을 내기판에 거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김도균의 말이 맞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영이 말할 때도, 아버지가 말할 때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제 이해가 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만했습니다. 강민수 씨에게 지금이라도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겠습니다.”
“그 말을 이제 와서 강민수 씨가 들어줄 것 같진 않군요. 그 내기에 응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 한지감 씨가 탑 옥션에서 나가지 않을 방법은 이기는 것뿐입니다.”
“도와주신다는 뜻입니까?”
“네.”
미소가 감도는 내 얼굴을 보고 김도균이 정색했다.
“절대 한지감 씨가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까 도와준다는 거죠. 고객들에게 한지감 씨가 위탁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추천드릴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도균을 살피다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이 비서에게 들었어요.”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느낌이 왔다. 진 회장이 이 비서에게 말했고, 이 비서가 김도균에게 전한 것이다.
“그랬군요.”
“행여나 이 비서 다그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내가 다그칠 대상은 이 비서가 아닌 진 회장이다.
“이제 그만 나가 보세요.”
“네.”
나는 인사를 하고 회의실에서 나와 핸드폰을 들고 유리문을 지나쳤다. 곧바로 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달칵 전화를 받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부탁할 것 있어?]
“이번에는 따지러 전화 드렸습니다. 이 비서님께 다 말씀하셨다면서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미안해.]
“제가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렸지 않습니까.”
[나도 말 안 하려고 했지.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와버렸어…….]
풀 죽은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좋지 않아,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누그러트렸다.
“그럼 저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시연이가 아무한테도 말 안 하겠다고 해서 그럴 줄 알았지…….]
그 ‘아무한테’에는 김도균이 포함되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황이었다. 통화를 마친 나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트렸다. *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다영과 함께 고기집으로 향했다. 경환이 입사한 기념으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음식이 세팅되고 얼마 있지 않아 경환이 가게로 들어섰다. 경환을 발견한 다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경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배송 때문에 좀 늦었어요. 미안해요.”
“늦을 수도 있죠.”
경환과 다영이 연출한 화기애애한 분위기 때문에 나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경환아. 형은 안 보이냐?”
“왜 안 보이겠어. 다영 씨한테 먼저 예의를 차린 거지! 형이 이렇게 질투심이 심해요.”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다영은 킬킬대고 웃었다.
“그렇네요. 채령이랑 데이트해도 저래요?”
“그렇다니까요. 가끔, 아니 자주 좀 피곤해요.”
나는 인상을 쓰고 말했다.
“그 피곤한 사람 여기 있으니까 조심해라.”
“이거 봐요. 형이 이렇게 샘이 많아요.”
“하하하.”
나는 경환에게 집게를 들려주면서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빨리 구워.”
“내가 구워?”
“그럼 내가 구우리? 여기 결제 누가 하더라?”
“알았어. 알았어.”
경환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순순히 구웠다. 구우면서도 다영과의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졌다.
“지난번에 채령이가 지하철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 좋더라구요.”
“다영 씨도 그거 좋았구나. 나도 그 작품 좋았어요.”
“어떤 그림인데? 말 좀 해줘봐.”
내가 끼어들자 두 사람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진짜 이러기냐?”
“우리 채령이가 말하지 말라 했다 말이야.”
“저도 친구인 채령이의 당부를 어길 순 없어요.”
“어이구! 됐다, 됐어! 치사해서 내가 안 물어본다.”
내가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데도 다영과 경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영은 싱긋 웃기까지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 참 괜찮은 선택이네요. 그 선택 존중해서 말 안 할게요.”
“진짜 너무들 한다.”
“형. 그러지 말고 채령이 작업실 한번 가봐. 형이 한 번도 안 온다고 채령이 섭섭해하는 눈치더라니까.”
가고 싶지 않아서 안 가는 것이 아니기에 억울했다.
“시간이 없어서 못 간 거지, 안 간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시간을 좀 내봐.”
“이번 메이저 경매 끝나고 갈 거야.”
“진짜지?”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과일바구니라도 사들고 갈 테니까 딱 기다리라고 해.”
눈살을 찌푸리며 다영이 야유를 했다.
“오빠. 혼자 20세기 살아요? 요새 누가 과일 바구니를 사서 가요? 화환도 아니구.”
나는 욱해서 말했다.
“과일 바구니가 어때서!”
“형. 내가 보기에도 과일 바구니는 너무 올드해.”
“그건 올드한 게 아니라 클래식한 거야. 클래식은 영원하다고! 고미술처럼!!”
내가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영과 경환은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고기를 먹었다. 나도 질세라 경쟁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서야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하는 건 어때?”
“어렵지만 재밌어. 팀장님하고 선배들이 잘 챙겨주기도 하고. 회사 옮기기 잘한 것 같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마음이 놓인다. 이럴 때는 술 한잔 해 줘야 하는데.”
다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프리뷰 준비하느라 작품 관리팀 바쁘니까 어쩔 수 없죠.”
“그건 그렇지.”
나는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셋이서 같은 회사를 다니니까 느낌이 이상하다.”
“우리 채령이까지 있으면 딱인데!”
경환의 말에 다영이 눈을 반짝였다.
“저 왠지 채령이 작품이 곧 우리 옥션에서 다뤄질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영 씨!”
“옥션에서 다뤄지는 현대 한국화 작가는 손에 꼽지만, 나도 채령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해요.”
허공에서 사이다를 채운 세 개의 잔이 부딪혔다. 하루 빨리 채령의 그림이 옥션에서 다뤄져서 이 자리에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늦잠을 자는 바람에 나는 차를 타고 출근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김도균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총괄님.”
쓰윽 나를 훑어본 김도균이 덤덤하게 말했다.
“늦잠을 잤군요?”
“네에……. 내일이 경매일이라 그런지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내기 때문에 더 그럴 테죠.”
“……네. 그렇습니다.”
나는 김도균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른 사람도 같이 탔다면 좋았겠지만 둘만 타서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데 김도균이 정적을 깨고 말했다.
“서 팀장한테 한지감 씨가 위탁한 작품들 신경 써달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내기도 말씀하셨나요?”
“그럼 안 되는 거였나요?”
서정선에게 내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으로 보였을지 생각하니 눈을 질끈 감게 됐다.
“그렇게 심각할 것 없어요. 말 안 했으니까.”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지감 씨한테 거짓말하겠습니까? 이번에 많이 무리한 것 같으니 유찰되면 심적으로 힘들 것 같다, 그러니 신경 좀 써달라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눈을 매섭게 뜬 김도균이 나를 나무랐다.
“지감 씨가 예뻐서 도와준 것이 아니에요. 우리 회사의 얼굴격인 서 팀장이 아끼는 팀원을 잃고 상실감이 생길까 걱정해서 그런 겁니다.”
“네. 압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김도균은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9시가 되기 20분 전이라 그런지 사무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강민수가 보였지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모른 척했다. 고미술팀에 있는 김 책임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강민수에게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옥상에서 좀 보죠.’ 더워 죽겠는데 왜 자꾸 옥상에서 보자는지 모르겠다. 강민수가 사무실을 나갔고,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싫었던 나는 조금 있다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입니까?”
“내일이 싸움의 승패가 갈리는 날이라는 것을 잊진 않았겠죠?”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런데도 아주 여유로워 보이네요?”
전혀 여유롭지 않았지만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에게 약점이 잡힐 만한 부분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여유롭지 않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위탁받는 것도, 경매도 평소에 다 하던 일인데.”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이건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죠.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제가 위탁받은 미술품들이 더 낫지 않습니까.”
얼굴이 일그러진 강민수는 사납게 나를 노려보다 이내 웃었다.
“자신감인지 오만인지는 내일 결과가 나오면 알겠죠.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예술가의 초상’을 제외하면 위탁 받는 양이나 질은 비슷해요. 그리고 ‘예술가의 초상’은 너무 고가라 사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여기가 런던이나 뉴욕도 아니고 서울인데.”
깐족거리는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받아쳤다.
“글쎄요. 다른 작품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예술가의 초상’인데요? 강민수 씨 손님들 중에서도 가격 문의하는 사람이 많았던 걸로 아는데요.”
흠칫한 강민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유명한 미술품이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겠죠. 하지만 그게 살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
그는 나를 죽일 듯 노려봤고, 나도 지지 않고 봤다. 그가 나를 지나쳐 옥상을 나가고 나서야 눈에 준 힘을 풀 수 있었다.
“아. 눈 아파.”
눈싸움에 이긴다고 경매 결과가 더 좋게 나오는 것도 아니건만 지기 싫었다. 평소에 잘 나오지 않는 승부욕이 이상하게 강민수한테 발동한다.
“나를 물로 보니까 그렇지.”
강민수가 단순히 나를 경쟁상대로 봤다면 나도 이렇게 날을 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날 자신의 경쟁상대조차 되지 않지만 운이 좋아서 주목을 받는 인간으로 여긴다. 그래서 더 이기고 싶다.
“‘예술가의 초상’이 높은 가격으로 팔려야 하는데…….”
강민수 앞에서 강한 척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한국 옥션 역사상 이렇게 고가의 작품이 출품되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불안했다. * 다음 날. 한 시간 전에 출근한 나는 김 책임과 함께 호흡을 맞춰봤다. 서정선을 대신해 그가 경매사 역할을 했고, 나는 노트북으로 호가를 올렸다. 다섯 작품을 하자 김 책임은 거친 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지감 씨. 조금만 쉬자. 나 너무 힘들어.”
“네. 물 좀 갖다 드릴까요?”
“부탁 좀 할게.”
나는 얼른 물을 가져다 김 책임에게 내밀었다. 그는 벌컥벌컥 물 한 잔을 다 마셨다.
“아……. 살 것 같다. 고마워. 지감 씨.”
싱긋 미소로 답하는 나를 보면서 그는 말을 이어갔다.
“몇 작품 이렇게 해보는 걸로도 힘든데, 서 팀장님은 어떻게 200작품을 그렇게 하면서 버티시는 걸까?”
“그러게요. 정말 신기해요.”
“난 아무리도 경매사는 못 될 것 같아.”
“왜 약한 말씀을 하시고 그러세요.”
김 책임이 노트북으로 경매 순서를 쭉 훑어봤다.
“이번에 경매 순서, 지감 씨가 짰지?”
“네. 서 팀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분위기가 고조되도록 잘 짰더라.”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한 거야.”
문득 오늘도 징크스대로 빨간 팬티를 입었는지 궁금해졌다.
“오늘도 입으셨어요?”
“당연하지! 지난번에 사고 칠 뻔한 걸 막아준 것도 다 이 빨간 팬티 덕분이라니까.”
김 책임의 말을 듣고 웃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서정선이 파리한 얼굴로 들어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서정선에게 물었다.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플라워가든이…… 문을 닫았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김 책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 내 얼굴도 똑같을 것이다. 서정선은 플라워가든에서 파는 아이리시 커피를 마셔야 경매가 잘 풀리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 이대로라면 오늘 경매는 망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