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6월 메이저 경매 (2)2021.10.13.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플라워가든이…… 문을 닫았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김 책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 내 얼굴도 똑같을 것이다. 서정선은 플라워가든에서 파는 아이리시 커피를 마셔야 경매가 잘 풀리는 징크스를 갖고 있다. 이대로라면 오늘 경매는 망할지도 모른다. 그 말 한마디에 회의실 공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싸한 공기를 없애려고, 김 책임은 애써 밝게 말했다.
“팀장님은 아이리시 커피를 안 드셔도 경매 잘하시잖아요.”
평소 서정선이라면 밝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말했을 터였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아. 아이리시 커피가 필요해…….”
한마디를 더했다가는 울어버릴 것 같아, 나는 김 책임을 끌고 회의실에서 나왔다.
“지금은 혼자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래……. 무슨 말을 하겠냐. 나도 빨간 팬티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찔한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고개를 돌리니 김도균이 김 책임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서 있었다. 김 책임이 당연히 설명할 거라 여겼으나, 그가 딴청을 부려 어쩔 수 없이 내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 경매일마다 이용하시는 카페가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징크스와 관련된 거군요.”
“네.”
설명하면서도 나는 심란했다. 아무리 좋은 미술품이 나오더라도 그날의 상황에 따라 낙찰률과 가격이 많이 차이 난다. 고가인 ‘예술가의 초상’ 같은 작품은 경매사의 능력에 절대적으로 좌우된다. 서정선이 기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면 ‘예술가의 초상’은 유찰될지도 모른다. 현기증이 나서 멍하니 있는데, 김도균이 나를 불렀다.
“한지감 씨.”
“네.”
“경매 시작 전까지 그 카페 아이리시 커피, 어떻게 해서든 가져와요.”
알았다고 대답하려는데 김 책임이 끼어들었다.
“경매를 준비하려면 일손이 부족…….”
“그건 제가 커버하면 돼요. 하지만 경매사가 흔들리면 그 경매 전체가 흔들려요. 지감 씨, 할 수 있죠?”
“네.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믿을게요.”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나와 플라워가든 카페로 갔다. 가게는 닫혀 있었고, 문에는 ‘개인 사정으로 하루 쉽니다.’라는 급하게 쓴 듯한 안내문이 붙여져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가게 주인 연락처를 확인해야 뭐라도 시도할 수 있다. 나는 카페 근처에 있는 부동산에 들어갔다. 부동산 중개사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플라워 가든’이란 카페가 있는 건물 주인을 뵐 수 있을까요?”
“상가 건물 사시려고 하는 구나?”
“그게 아니라 ‘플라워 가든’ 사장님 연락처가 꼭 필요해서요.”
“네?”
밝은 표정을 사라지고 순식간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난색을 표했다.
“사정은 알겠지만, 요즘 개인정보법인지 뭐인지 때문에 건물주의 번호도 함부로 알려주기 어려워요.”
“번호 주는 것이 어려우시면, 통화라도 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메이저 경매가 망하면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래요……. 중개사님, 제발 부탁드릴게요.”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으로 애원했다. 딱하게 나를 본 그가 마지못해 말했다.
“건물주에게 전화는 해보죠.”
“감사합니다.”
바로 중개사는 통화를 시도했다.
“안녕하세요. 희망 부동산입니다.”
그는 설명했고 곧 통화를 마쳤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물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곧 여기로 오겠다고 하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얼마 후, 깐깐한 인상의 60대 여자가 부동산으로 들어섰다. 중개사가 밝은 얼굴로 그 여자를 맞았다.
“오셨어요?”
“이 분인가?”
건물주가 스윽 나를 훑어봤고 나는 넉살 좋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탑 옥션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전화 거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해줄게. 하지만 카페 사장이 싫다고 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네. 그럼요.”
그녀가 핸드폰으로 카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박 사장. 나야. 오늘 가게 문을 닫았던데, 무슨 일 있었어?”
수화기 너머 카페 사장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랬구나. 다름이 아니라 여기 탑 옥션에서 오신 분이 있어서. 오늘 경매하는 날인데, 거기 경매사가 여기 커피를 마셔야 일을 잘한다네? 이야기 좀 해볼래?”
꿀꺽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다행히도 건물주는 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급하게 인사를 하고 넙죽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안녕하세요. 탑 옥션 한지감입니다.”
목이 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그 경매사님 때문에 오신 거죠?]
“네!”
남자는 심하게 기침을 했다.
“감기가 걸리셨나 봐요?”
[네. 감기 몸살이 와서…… 제가 지금 움직일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죠?]
“괜찮으시다면 레시피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카페 주인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다.
[그건…….]
상대방에서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가게 레시피를 공개하는 것이 껄끄러운 듯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보상을 제공하는 수밖에 없다.
“괜찮으시다면 레시피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백만 원 어떠십니까? 레시피를 제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해서 그럽니다.”
[레시피를 백만 원에 사시겠다구요……?]
“네. 그 정도로 저한테는 그 레시피가 간절합니다.”
빠른 태세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정도로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죠. 연락처 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번호를 불렀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레시피가 도착했다. 그 레시피를 보면서 나는 불로초를 찾은 사람처럼 헤벌쭉 웃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중개사와 건물주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 잘못했다기보다, 그 돈 회사에서 주는 건가?”
건물주의 물음에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아니요. 제 개인 사비로 내야죠.”
“얼굴에 여유가 있네. 집안이 넉넉한가 봐?”
“집안이 넉넉하기보다 제가 넉넉합니다. 회사 들어오기 전에 돈 좀 벌었거든요.”
갑자기 훅 부동산 중개사가 끼어들었다.
“혹시 부동산에 투자할 생각 없어요? 이 근처에 좋은 상가 건물 있는데에.”
“얼마 전에 상가를 구입해서 당장은 구입할 생각이 없지만, 추천해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일단 들어나 봐요.”
지금 바로 설명을 시작할 것 같아 나는 급하게 말했다.
“제가 지금은 바빠서, 내일 점심시간에 들러도 될까요?”
“아유. 안 될 것이 뭐가 있어요. 명함만 가져가요. 여기!”
중개사가 내민 명함을 받은 이후 나는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부동산에서 한참 걸어나온 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쓱 레시피를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일반 아이리시 커피랑 다른 점이…… 아이리시 위스키가 아닌 브랜디를 베이스로 하고, 레몬이 아니라 라임이 들어가네.”
* 나는 근처 대형 마트로 가서 필요한 재료들을 싣고 회사 근처로 갔다. 그곳에서 동냥꾼처럼 이 카페 저 카페를 돌며 사정을 해 보았지만 모조리 거절당했다. 다들 알바생이라, 사장의 허락 없이 멋대로 새 메뉴를 만들어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어느새 시간은 점심시간을 넘은 1시가 되었다. 4시까지는 3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골몰하며 검색하던 나의 레이더망에, 작은 길로 들어가야 있는 작은 카페가 들어왔다. 너무 안쪽에 있어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작은 간판에 리틀 포레스트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카페라면 사장이 직접 운영하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붙잡으며 나는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로 들어선 순간 손님이 하나도 없어 순간 멈칫했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라는 멘트와 달리, 사장으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 그냥 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가 아니면 택시를 타고 옆 동네로 가야 할 것 같아 일단 말이나 해보기로 하였다.
“안녕하세요.”
“네. 주문하시고 싶은 음료 정해지면 말씀해주세요.”
보통 카페에서 기분과 상관없이 의무적인 미소를 짓는 것과 달리, 이곳의 사장은 희미한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네……. 저 부탁할 것이 있는데요. 이 레시피대로 아이리시 커피를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레시피를 빤히 보던 사장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건 아이리시 커피가 아닙니다.”
“그럼…… 뭐죠?”
“베이스가 브랜디이기 때문에 로열 커피입니다.”
“아……. 그렇군요.”
왜 손님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로열 커피를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이 레시피대로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그러죠.”
“정말 만들어주시는 건가요?”
“재료까지 사오셨는데 못 만들 이유가 없죠. 여기서 드시고 가시는 건가요?”
“아니요. 가져가야 합니다.”
“그럼 텀블러에 해야겠군요. 원래 유리컵에 해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가 있는 건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페 사장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사장은 완성된 아이리시 커피, 아니 로열 커피를 내놓았다.
“레시피대로 만들었지만 같은 맛이 날지는 모르겠군요. 원두에 따라서 미묘하게 맛이 달라지기 마련이거든요.”
“감사합니다. 잘 전달할게요.”
“네.”
그제야 사장은 싱긋 웃어 보였다. * 유리문을 지나 사무실을 들어섰다. 모두 로비에 있어서인지 사무실의 자리는 거의 비어 있었지만, 서정선은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팀장님.”
“…….”
서정선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고, 나는 텀블러를 내밀었다.
“플라워 가든의 아이리시 커피예요.”
“정말?”
그녀의 눈빛에는 의심이 가득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무사히 경매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 커피가 플라워 가든의 아이리시 커피라고 믿는 것이 필요하다.
“당연히 정말이죠.”
“문 닫았던데, 어떻게 한 거야?”
“카페 건물주 통해서 전화해서 나와 달라고 사정사정했죠. 어서 드셔 보세요.”
텀블러를 연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시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그 맛이네. 고마워, 지감 씨. 덕분에 살았어!”
홀짝 홀짝 커피를 마시는 서정선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경매가 시작되자 서정선은 넘치는 카리스마로 경매 현장을 압도했다.
“이억 천. 이억 이천.”
나는 특별경매 경험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호가를 올릴 수 있었다.
“이억 삼천. 이억 사천 없으십니까?”
서정선이 망설이는 현장 고객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보자 그 고객은 홀린 듯 패들을 들었다. 보면 볼수록 경매대에 선 서정선은 눈이 부시게 멋졌다. 하지만 존경일 뿐 동경은 아니다.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경매대에서 나에게 쏟아질 시선들이 두렵다. 낙찰을 알리기 위해 서정선은 경매봉을 두 번 두드렸다.
“21번 고객님께 이억 사천에 낙찰되었습니다. 53번 작품은 이기환 화가의 무제입니다.”
다음 작품을 설명할 동안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는데 직원석에 있는 강민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저 자식이! 짜증나지만 현재까지의 낙찰가 총액은 강민수가 3억이나 앞서고 있다. 내가 위탁받은 작품들의 내정가가 높은 것이 문제였다. 그 바람에 유찰이 많이 되었고, 반면 강민수가 위탁받은 미술품들은 위탁자인 강정휘 덕분에 내정가가 낮아서 유찰이 별로 되지 않았다. 쭉 둘러보니 강정휘 밑에서 일할 때 갤러리에서 스쳤던 얼굴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저 중 다수가 강민수가 위탁받은 작품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어 경합을 벌인다. 강민수가 받은 미술품이 아니라고 해도 그다지 시장성이 있는 작품들이 아닌데, 강정휘가 뭐라고 약을 쳤는지 엄청 전투적이다. 만약 이런 기세가 굳어지고, ‘예술가의 초상’마저 유찰된다면 내가 진다. 그 생각을 하니 온몸이 굳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정선의 우렁찬 외침에 나는 열심히 호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7번 고객님 사억, 사억 삼천, 사억 오천, 사억 팔천.”
경매 현장의 흐름을 읽으려고 고객석과 직원석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고객석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동양인이었지만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외국인들이 3명 정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이제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호가를 맞추는 것이 쉽진 않기 때문이다.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어느새 ‘예술가의 초상’이 화면에 띄워졌다.
“83번 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입니다. 수영장 시리즈 중 하나로 특유의 색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때 가장 비싼 그림으로 불렸던 작품이죠.”
서정선의 소개를 들으며 내 입안은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익숙한 얼굴을 보면 긴장이 풀릴 것 같아 직원석에 있는 다영을 봤다. 기합이 잔뜩 든 얼굴이 웃겼다. 다영의 손에는 현성그룹 이 회장의 1번 패들이 들려있었다. 이 회장은 요즘 그림을 사들이는 것을 전부 이수지에게 맡겼고, 그래서 요즘 그 패들은 이수지가 쓰고 있다. 어느 정도 선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수지는 응찰할 것이다. 하지만 내정가가 800억이기 때문에 경합을 벌일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과연 그럴 사람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