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작가 선정 (3)2021.10.23.
메시지 알림 소리가 나서 확인하니 다영이었다. ‘오빠. 탕비실에서 잠깐만 봐요.’ 탕비실로 부르는 것을 보니 핫초코가 마시고 싶은 모양이다. 이병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씹을까 생각하다, 마침 당이 떨어지기도 해서 갔다.
“내가 네 쫄다구냐. 그만 좀 부려먹어라.”
그런데 다영이 오히려 핫초코를 건넸다. 나는 왜 이러나 싶어 물끄러미 다영을 봤다.
“맨날 부려먹는 것 같아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타드리는 거예요.”
“부탁할 게 있는 건 아니고?”
내 가늘어진 눈을 보고 다영이 새침하게 말했다.
“부탁할 게 있는 건 아니고, 전할 말이 있긴 해요.”
“전할 말?”
“김승재 알죠?”
“삼원그룹 망나니 김승재?”
“네. 이수지 관장 남편이요.”
“그 사람이 왜?”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다영이 답했다.
“위탁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서, 오빠를 꼭 집어서 보내달라고 했거든요.”
“서면 심사 아직이지?”
“네.”
김승재 정도 되는 VIP들은 직접 스페셜리스트가 와서 서면 심사할 부분들을 작성하길 원한다. 그건 자주 있는 일이라서 별로 상관없는데 영 쎄한 느낌이 든다.
“아마 김승재도 그 소문 들었겠지?”
“들었겠죠. 얼마나 파다했는데.”
현성재단을 통해 이수지가 주인탁을 몰아낸 이유가 내가 애인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한때 퍼진 적이 있었다. 이수지가 결혼을 하면서 그 소문은 사그라지는 듯 보였지만, 김승재가 대놓고 바람을 피운다는 말이 돌면서 소문은 다시 살아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사실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런데 굳이 나를 만나길 원한다…….”
“내가 보기엔 오빠 떠보려는 것 같아요.”
“그러네. 굳이 만나고 싶진 않지만, 피하면 더 그림이 이상해질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문득 어떻게 연락이 온 건지 궁금해졌다. 김승재 정도 되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전화하길 꺼린다. 그런데 어떻게 다영과 연락이 된 걸까?
“김승재가 회사에 전화한 거야?”
“아니요. 저한테 직접 연락했어요.”
“그 망나니가 네 번호는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게 흥분했고, 그 모습을 본 다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누가 보면 제가 여동생인 줄 알겠어요.”
“말 돌리지 말고.”
“어떻게 알긴요. 1년 전쯤 이수지 관장님 뵈러 갔다가 우연히 봤어요. 탑 옥션 다닌다고 하니까 명함 달라고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내가 볼 땐 그때 이미 오빠를 알고 어떻게든 꺼리를 만들어서 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날카로운 눈빛이 명탐정에 빙의한 모양새였지만 난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럼 왜 지금 연락을 해. 말이 안 되잖아.”
“뭔가 계기가 있었겠죠.”
“아이구. 누가 보면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명탐정인 줄 알겠다.”
“무시하지 마요! 여자의 직감이에요!”
그 망나니놈이 다영에게 수작질을 건 건 아닌지 신경 쓰였다.
“김승재가 너한테 다른 이야기는 안 했어?”
“했어요.”
가슴이 철렁했지만 태연한 척 반문했다.
“뭔데?”
“소문이 있는 만큼 오빠가 별로 안 만나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제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놨거든요. 요새 ‘신인 작가 후원 경매’를 맡고 있어서 담당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요. 뭐 사실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랬더니 김승재가, 오빠가 담당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으면 제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죠.”
나는 다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었다.
“뭐라고 답했어?”
“뭐라고 답하긴요.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죠. 김승재 같은 VIP 담당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얘가 애가…… 큰일 날 소리 하네! 그 인간 망나니야. 그것도 여자 자주 갈아치우는 걸로 아주 유명하다고!”
상관없다는 듯 다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짜증나지만 어쨌거나 VIP잖아요. 그리고 모델, 배우 만나는 그런 사람이 일반인한테 관심이나 있겠어요?”
“어쨌든 위험하잖아.”
목소리를 높이는 나에게 다영은 수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지금 VIP 나한테 주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죠? 그냥 가져가요! 지명 받은 것 뺏어서 냉큼 받을 만큼 내가 그렇게 양심 없지는 않거든요!”
“그래. 너한테 주기 싫어서 그런다. 연락처나 메시지로 보내줘. 꼭 내가 만나야겠으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누가 뺏어가나? 쳇!”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영은 입을 삐죽이며 탕비실에서 나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거절하면 다영을 담당자로 하겠다는 것이 왠지 김승재가 나에게 보내는 암묵적인 협박처럼 느껴졌다. * A호텔 룸 앞에 선 나는 짜증스럽게 초인종을 바라보았다. 암묵적인 협박이 두려워 여기 오긴 했지만 영 찜찜하다.
“만나도 꼭 여기서 보자고 하냐.”
A호텔 스위트룸 예전에 이수지가 나를 종종 부르곤 했던 곳이었다. 찜찜함을 뒤로한 채 나는 초인종을 눌렀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김승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탑 옥션 한지감입니다.”
“김승재예요. 들어오시죠.”
나보다는 키가 작았지만 길쭉한 키에 탄탄한 몸매, 미남형 얼굴이라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에다 삼원그룹 아들이니, 성격이 거지같아도 여자들이 붙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파에 앉은 나는 안을 둘러봤지만 김승재 외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보통 김승재의 신분이면 수행원이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나의 시선을 읽은 김승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수행원은 따로 없어요. 걸리적거리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럴 수 있죠.”
“생각보다 소탈하거든요.”
행적이 일일이 밟히는 것이 싫은 거겠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결혼식 때 멀리서 뵙고 인사는 처음 드리네요.”
“우리 결혼식 때 왔었어요?”
“네. 그럼요. 관장님 결혼식에 미술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다 참석했죠.”
이런 식으로 나는 이수지와 끈끈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김승재는 그런 식으로 넘어가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미술계 분 가운데서도 인연이 깊은 분들만 초대하겠다고 했는데요. 그중에서도 한지감 씨는 아내와 인연이 깊으시잖아요. 담당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하고, 골동상일 때도 아내가 고객이었잖아요.”
“그렇죠.”
애써 웃었지만 입꼬리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김승재 저 자식은 가증스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압박하고 있다. 차라리 이수지나 강정휘처럼 소리지르면서 난리치는 것이 훨씬 명확하고 편하다. 그럼에도 나는 일단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관장님은 잘 지내시죠? 요즘 정신이 없어서 안부 전화 한 통도 드리지 못했네요.”
“저도 아내도 달콤한 신혼에 푹 빠져있죠.”
달콤한 신혼을 보내는 것이 진짜라는 듯 김승재는 씨익 웃었다. 자꾸 이수지와 좋은 사이를 강조하는 것을 보니 한 가지는 확실하다. 둘의 사이는 안 좋다.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이기도 하다. 쓰윽 김승재가 나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결혼할 나이인 것 같은데, 바빠서 생각이 없나 봐요?”
네가 내 엄마 아빠도 아니면서 결혼 걱정은 왜 하냐? 입밖으로 말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웃으며 답했다.
“네. 아직 일이 더 재밌어서요.”
“그래요. 참. 여기 잘 알죠? 아내가 여기 있을 때 몇 번 오지 않았나?”
“네. 업.무.차. 몇 번 들렀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상대는 고객이다. 일단 맥을 끊자.
“위탁하시고 싶다는 미술품을 볼 수 있을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방으로 나를 안내해서 2점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이 눈에 익숙하지가 않다. 십중팔구 옥션에서 다뤄지는 작가가 아니다. 서명을 보니 그건 더 확실해졌다.
“안타깝게도 옥션에서 다뤄지는 작가가 아닙니다.”
“아. 그래요? 친구가 부탁해서 산 거라 거기까진 몰랐어요. 옥션에서는 주는 대로 받아먹는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은가 봐요?”
이수지의 애인 취급을 하는 것보다 옥션을 가볍게 여기는 그의 태도가 더 나를 화나게 했다. 한번 들이받아? 아니다. 나는 이 자리에 스페셜리스트이자 경매팀 직원으로 와있다. 거기다 들이받는 것이 이 기분 나쁜 놈의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순 없지.
“옥션은 2차 시장이다 보니 선별된 작가들만 다룹니다. 곧 3월달 메이저 경매가 있습니다. 그때 관장님과 함께 오시죠.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네가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이수지와 다정한 모습 구경 좀 하자.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김승재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러죠. 수지가 좋아할 것 같네요.”
* 김승재를 만나 의미 없는 신경전을 버리느라 힘이 쫙 빠졌다. 반차를 쓰고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다음에는 더 껄끄러운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세원 갤러리 임병규와의 미팅이다.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나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예전에 왔을 때와 사뭇 다른 태도였다.
“탑 옥션 한지감 책임님 맞으시죠?”
“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의 안내를 따라 나는 임병규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지감 씨, 아니 이제 한 책임이군요!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내심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너무 뻔한 길을 선택해서 흥미가 떨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나도 그처럼 반가운 척을 했다.
“대표님도 잘 지내셨죠?”
“나도 잘 지냈죠. 신인 작가 발굴도 하고, 또 그림도 팔고. 어서 앉아요.”
“네.”
소파에 앉자 직원이 금방 다과를 세팅했다. 안타까운 척 임병규가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밥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해야 하는 건데.”
“저도 그러고 싶지만, 여러 군데를 봐야 하는 상황이어서요.”
“그래요. 바쁜 사람 괴롭힐 순 없죠.”
과하게 친절한 척하는 그 얼굴을 보니 속이 메슥거렸다. 빨리 그림을 보고 나가고 싶다.
“그림부터 볼 수 있을까요?”
“그래요. 이쪽으로 와요.”
그를 따라 수장고로 가서 그림을 보았다. 다른 그림은 그저 그랬지만 ‘또 다른 세계’는 인상적이었다. [ 0 | 진 | 5,000,000원 | 2020년대, 윤세빈 | 소유자 판매 결정. ] 그림은 괜찮은데 왜 이렇게 최고가가 낮을까? 후원을 받는다면 천만 원은 받을 수 있는 그림인데.
“그림 좋죠?”
“네. 직접 보니 정말 다르네요.”
이럴 때마다 왜 사람들이 그림을 직접 봐야 한다고 말하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직접 보면 훨씬 인상적인 것이 있는 반면, 반대로 사진으로 봤을 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 있었다.
“어때요? 우리 윤세빈 작가, 그림 경매에 올릴 수 있겠어요?”
은근슬쩍 결정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릴 결정은 아니었다.
“조금 더 고민해보고 확정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순간 임병규의 눈에 경련이 일었지만 그는 애써 웃었다.
“하하하. 역시 우리 한 책임 정확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감사합니다.”
마음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사무적인 말이었다. 그가 어떤 모멸감을 느끼든 말든,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나였다. * 일주일 후. 나는 오전에 회의실로 호출되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김도균과 서정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안으로 들어선 나는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서정선이 말했다.
“궁금하지? 맞춰봐아!”
해맑은 서정선은 김도균이 나무랐다.
“서 팀장.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하죠.”
“총괄님은 너무 시도 때도 없이 진지하세요. 사람은 가끔 긴장을 풀어야 한다구요.”
“지금은 긴장을 풀 때가 아닙니다.”
엄마 아빠의 싸움을 지켜보는 아이처럼 나는 덩그러니 그 모습을 봤다.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린 두 사람이 마침내 말을 멈췄다.
“다 하셨나요?”
“…….”
“…….”
민망한 두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헛기침을 한 김도균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신인작가 후원 경매 준비는 잘 되어 갑니까?”
“네. 이제 봐야할 그림은 다 봤습니다. 회의해서 후보 30명 중에 10명을 뽑기만 하면 됩니다.”
논의를 통해 결정되지만, 내가 담당자인 만큼 입김이 크다. 김도균과 서정선을 번갈아 보며 나는 물었다.
“준비 잘 되어 가는지 확인하려고 부르신 건가요?”
“아니.”
고개를 단호하게 저은 서정선이 말을 이어갔다.
“이번 후원 경매 말이야. 한 책임이 직접 경매를 하는 거 어때?”
“당연히 제가 직접 참여하죠.”
“내 말은, 경매사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