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경매사 데뷔 (1)2021.11.06.
퇴근 시간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정선이 나가다가 나를 보면서 물었다.
“한 책임, 집에 안 가?”
“내일 경매 순서 한 번 더 보고 가려구요.”
“착실하게도 준비하네. 모르겠는 것 있으면 바로 연락해서 이야기하고.”
“네!”
텅 빈 사무실에서 나는 다시 한번 경매 순서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도 진정이 되지 않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깜깜해진 도시를 불빛들이 비추고 있었다. 빌딩마다 켜진 불들이 나만 혼자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조그마한 위로를 주었다.
“왜 혼자 청승은 떨고 그래?”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지 팀장이 서 있었다.
“팀장님. 안 가셨어요?”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돼서 담배나 태우러 왔지.”
“그러셨군요.”
담배에 불을 붙인 지 팀장이 연기를 깊숙하게 빨아들이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내일 경매 때문에 긴장했어?”
“네. 긴장했어요.”
“너무 잘하려고 집착하지만 않으면 돼.”
“그러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문득 서정선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희 팀장님이요. 경매사 시작하셨을 때 정말 못했어요?”
“누구한테 들은 거야?”
“팀장님한테 직접이요.”
그러자 그는 악동처럼 웃었다.
“하하하. 본인도 그때 못했다는 걸 알긴 하는군.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정말 못했어.”
“그 정도로 못했어요?”
“올라가서 소개 멘트도 제대로 못하고, 입술하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디가 아픈 줄 알았을걸.”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도였어요?”
“응. 그뿐만 아니라 호가도 틀려서 경매를 여러 번 중단시켰지.”
“중단시킬 정도로요?”
“그래. 중단시킬 정도로.”
경매 진행 속도는 워낙 빨라서, 호가를 틀려도 알아차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호가를 심하게 틀리면 경매를 중단시키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연기를 다시 깊게 빨아들이고 그가 말을 이어갔다.
“서 팀장이 경매에 익숙해지기 전에 최 팀장님이 있었는데, 경매가 중단되면 그분이 나서서 상황을 진정시키고 이어갔지. 그것 때문에 본인도 스트레스가 심했을 거야.”
백 책임에게 일어났던 일이 서정선에게도 몇 번이나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 서 팀장님 모습을 보면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네요. 언제부터 잘하기 시작하신 거예요?”
“3년 정도 헤매다가 어느 순간 딱 카리스마가 생기더니, 그때부터 최 팀장님을 뛰어넘더라구.”
“어느 날 갑자기요?”
“우리가 느끼기엔 그렇게 보였지만, 서 팀장은 계속 연습했어.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잘했다기보다 발현이 된 거지.”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대강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공부 능력의 향상도 대각선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비슷한 능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날 팍 능력이 상승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한 책임이 못하면 본인은 힘들겠지만, 서 팀장은 그런 것까지 받아줄 여유가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정 불안하면 한 책임 자신 말고, 서 팀장을 믿고 올라가.”
“그래야겠네요.”
“부담감이 큰 만큼 잘하면 성취감도 클거야. 해내고 나면 너무 뿌듯해서 연인이나 가족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
“글쎄요. 전 안 그럴 것 같은데요.”
이미 다영을 비롯한 동료들이 나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거기에 연인이나 가족까지 보러 온다면 더 부담을 느낄 것 같았다. 내 어깨를 지 팀장이 툭툭 두드렸다.
“그런지 안 그런지, 내일 제대로 하고 나면 알겠지.”
“궁금하네요. 정말 그럴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알람을 맞추기 전에 눈이 떠졌다. 평소보다 공들여 씻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는데, 식탁에 네모난 도시락 상자가 있었다.
“뭐지?”
상자 옆 경환이 쓴 메모가 있었다. ‘형. 든든히 먹고 오늘 잘해!’ 살짝 열어 보니 샌드위치였다.
“언제 해 놨대?”
싱긋 웃으면서 나는 샌드위치를 들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고 회사로 향하면서 먹은 샌드위치는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채령이에게 그렇게 해서 바치더니 솜씨가 늘었구만.”
회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리틀 포레스트로 향했다. 가게가 작아서 주변에 주차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로 들어선 나는 사장에게 인사를 하며 주문했다.
“안녕하세요. 핫초코 두 개 주세요.”
“오늘은 그러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네?”
사장의 손짓에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다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바로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웬일이야?”
“오늘 오빠한테 중요한 날인데 힘을 줘야죠! 어서 마셔요.”
주문해 놓은 핫초코 두 잔 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고맙다.”
“고맙긴요. 매번 못 이기는 척 핫초코 만들어줘서 제가 고맙죠! 오늘 기분 어때요?”
“긴장해서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겠다.”
그때 다영의 얼굴이 쓰윽 코 앞까지 가까워지더니 덥석 손을 잡았다. 나는 놀랐지만 짐짓 태연하게 반응했다.
“왜 이래?”
“힘내라구요!”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난다.
“하하하. 알았어. 힘낼게.”
“오빠 잘 해낼 거예요. 혹여 이번에 못한다고 해도 기회는 또 올 거예요.”
서정선, 지 팀장, 경환, 다영 모두 날 응원한다. 든든한 기분이 들어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그래. 고맙다.”
“이수현 작가도 오빠 생각대로 이슈화시켰잖아요.”
“운이 따라줬지.”
홍 기자가 기사를 잘 써줘서 업계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고, 그러면서 인터뷰 문의가 쇄도했지만 건강을 이유로 다 거절했다. 나의 의도대로 기자들은 주변인들을 인터뷰했고, 미술계의 대마초 사건과 대비되어 ‘유혹을 이겨내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작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 있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다영이 투덜댔다.
“오빠는 맨날 운이 좋았대. 그건 실력이잖아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 있잖아. 키케로도 말했지.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는 건 운이지, 뛰어난 지혜가 아니다.’”
“무시할게 못되긴 하죠.”
“어렸을 때는 운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거든? 그런데 실력이 아무리 있어도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빛을 못 봐. 실력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예술가가 너무 많잖아.”
그래서 과거에 조선웅은 빛을 보지 못했고, 채령도 현재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음료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결국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공든 탑이 무너지겠냐고 하지만, 정말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야.”
진 회장이 망하고 작은 집에서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5년 전에 아무도 없었다. 잘나갈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요새 들어 뼈저리게 느낀다.
“그건 정말 그래요. 그래도 오빠가 해낸 것에 대해 너무 저평가하지 말아요. 이번 경매만 해도 오빠 때문에 오겠다고 한 외국인 고객인 10명이나 되잖아요.”
‘예술가의 초상’이 경매대에 오른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왔던 제리 왕과 동양계 외국인뿐만 아니라, 소문이 나면서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도 호기심에 탑 옥션을 찾았다. ‘예술가의 초상’의 위탁자인 아론 터너도 이번 경매에 전화로 응찰했다.
“그래. 거기엔 내 능력이 한몫했지. 인정!”
“막상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재수 없어요.”
“뭐?”
“에이. 장난이에요. 장난! 긴장 풀라구요!”
“아닌 것 같은데?”
의심의 눈초리를 내가 보내자 다영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 3시 57분이 되자 나는 경매장에 들어서서, 보조 경매사 자리에 앉은 장희정과 김 책임을 지나쳤다. 내가 있었던 곳을 지나치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경매대에 서자 100여 명이나 되는 시선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앞이 하얘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3년 동안 익숙해진 사무적 미소를 지으며 시간을 벌었다. 다시 시야가 환해지면서 사람들이 보였다. 현장에 있는 고객들과 직원석에 있는 동료들, 그리고 의자도 없이 뒤에 서 있는 많은 구경꾼들. 윤이서, 이수지, 제리 왕 등 앞자리에 앉은 나의 고객들이 들어와 마음이 편해졌다. 메이저 경매에서는 이수지가 주로 전화 경매를 통해 응찰했지만,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는 꼭 모습을 드러냈다. 윤이서가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하기 때문이다. 인사를 하려는데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강정휘가 등장했다. 저 사람이 여기에 왜 온 거지? 나는 불안함을 뒤로한 채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현장 고객들을 향해 인사했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4번째를 맞는 이 경매를 통해 많은 분들이 신인 작가를 후원해주셨고, 그중 다수가 인정받는 작가로 발돋움하였습니다.”
강정휘를 제외한 현장석에 있는 고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소개하는 10인의 작가는 122개의 갤러리로부터 선별한 작가들입니다. 여태까지 이어진 선순환이 오늘도 계속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내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장희정은 첫 번째 화가인 심규민 작가의 1번 작품을 올렸다.
“리아 갤러리 심규민 작가의 ‘어둠 속에서’입니다.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새가 이 그림에도 등장합니다.”
심규민 작가의 이력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 작가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 1회 때는 작가 후원 경매라는 것 때문에 어느 대학을 졸업하고 어디에서 유학을 했고, 이런 이야기를 줄줄이 말했다. 아무래도 신인 작가이다 보니 굵직한 경력이 없어 오히려 구차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다.
“시작가는 사백만 원, 호가는 삼십만 원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수지가 1번 패들을 들었다.
“1번 고객님 사백만 원.”
윤이서도 지지 않고 169번 패들을 들었다.
“169번 고객님 사백삼십.”
뒤쪽에서 소심하게 패들이 올라오는데,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서정선의 조언을 떠올리면서 일단 호가만 했다.
“사백오십.”
경합이 벌어진 것은 역시 윤이서와 이수지였다. 운동선수가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해서 첫 게임을 이기려는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덕분에 가격은 쭉쭉 올라갔다.
“구백팔십. 천만 원.”
나는 맥을 끊지 않기 위해 짧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이제부터는 호가를 오십만 원으로 하겠습니다.”
바로 윤이서가 패들을 들었다.
“169번 천오십만.”
이수지가 들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이수지에게 시선을 두면 그녀는 패들을 들 것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과열되는 것은 좋지 않다. 양은 냄비가 아니라 뚝배기처럼 그 열기가 오래가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러 먼 곳을 보며 물었다.
“천백만 없으십니까?”
패들을 드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낙찰봉을 두 번 두드렸다. 매번 낙찰봉을 두드리는 것을 듣기만 했는데, 이걸 두드리는 날이 올 줄이야.
“169번 고객님께 천오십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윤이서에게 박수가 쏟아졌고,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이 상황을 즐겼다. 가정주부 생활을 오래 해서 사회와 멀어진 상황에서 이런 주목을 받는 것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박수소리가 잦아지면서 장희정은 두 번째 그림을 화면에 띄웠고, 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어 마침내 마지막 작가인 이수현의 차례가 되었다. 로트 번호 46번이자 이수현의 첫 번째 그림이 떠올랐다.
“가인 갤러리 이수현 작가의 ‘백합’입니다. 백합의 청초하고 단아한 느낌이 극대화되도록 안정된 구도로 표현했습니다.”
이수현 작가의 그림이 떠오르자 현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신인 작가 중에 가장 이슈화가 된 작가이기 때문이다. 소란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시작가는 오백만 원입니다. 호가는 삼심만 원입니다.”
이수지가 턱을 치켜세우며 패들을 들었다.
“오백만 원.”
이후 경쟁적으로 패들이 올라왔다.
“오백삼십. 오백오십. 오백팔십. 육백.”
가격은 눈 깜짝할 새 이천만 원까지 올라갔다.
“이천. 이천이백. 이천사백, 이천육백.”
신인작가 후원 경매에서 이천만 원이 넘은 것은 처음이라 고무적이었고, 삼천을 바라본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때 약속이라도 한 듯 핸드폰 벨소리 3개가 연이어 울리더니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보통 이럴 경우 주인이 빨리 핸드폰을 끄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지는데, 3개의 벨소리는 꺼지지 않고 계속 울려 퍼졌다. 흥분과 짜증이 뒤섞이면서, 잘 받아냈던 시선들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메슥거리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