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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경매사 데뷔 (2) (147/226)

147화 경매사 데뷔 (2)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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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약속이라도 한 듯 핸드폰 벨소리 3개가 연이어 울리더니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보통 이럴 경우 주인이 빨리 핸드폰을 끄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지는데, 3개의 벨소리는 꺼지지 않고 계속 울려 퍼졌다. 흥분과 짜증이 뒤섞이면서, 잘 받아냈던 시선들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메슥거리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하얘졌다. 망할 벨소리가 빨리 꺼지길 바랐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 돼……! 이렇게 경매를 망칠 수 없어. 나는 입안의 살을 꽉 깨물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흐릿하게 현장의 모습이 들어왔고, 어느새 벨소리는 멈춰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분명 패들을 들고 있었다. 그쪽을 가리키며 나는 언제 멈칫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경매를 이어 갔다.

16560292253912.jpg“이천팔백. 삼천.”

삼천……! 삼천을 넘겼다! 다행히 좀 정신이 돌아오면서 눈이 또렷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발생했으니 패들을 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16560292253912.jpg“삼천이백 없으십니까?”

고객들을 쭉 둘러봤지만 망설이는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누가 패들을 들었는지 제대로 못 봤는데, 어떻게 하지? 가슴이 철렁했지만 태연한 척 애매모호한 시선 처리를 하면서 말했다.

16560292253912.jpg“삼천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제가 패들 번호를 보지 못해서요. 들어주시겠습니까?”

뒤쪽에 앉아있는 고객의 23번 패들이 스윽 올라왔다. 나는 낙찰봉을 두드리면서 다시 한번 낙찰을 알렸다.

16560292253912.jpg“23번 고객님께 삼천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때 강정휘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 3개의 핸드폰 소리가 격차를 두고 끊어졌다. 핸드폰 벨소리는 백이면 백, 강정휘가 꾸민 일이다. 그녀가 독사같은 눈으로 나를 봤고, 나는 지지 않고 응시했다. 이를 악문 강정휘가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버렸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 나는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두 번째 작품을 소개했다.

16560292253912.jpg“이수현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인 ‘야경’입니다.”

물흐르듯 자연스레 경매가 진행되면서 마침내 마지막 작품이 화면에 떠올랐다.

16560292253912.jpg“50번. 경매의 마지막 작품인 이수현 작가의 ‘자화상’입니다. 고흐를 연상시키는 터치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시작가 천만 원에서 오십만 원씩 올라갑니다.”

직원석에 있는 김도균과 서정선이 긴장해서 고객석을 살폈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시작가가 천만 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경합을 통해서 높은 가격이 되면 모를까, 시작가가 이렇게 높으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고 모두 그랬다. 심지어 작가인 이수현조차도 시작가가 너무 높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이 작품의 최고가는 10억이었고, 그래서 나는 시작가 천만 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수현 작가의 그림을 경매해 보니 확실히 다른 작가들에 비해 반응이 뜨겁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작품이 오늘 경매의 최고가가 될 것이라 자신한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멘트가 끝났음에도 패들을 올리는 고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16560292253912.jpg“천만 원 없으십니까?”

그때 제리 왕이 104번 패들을 들었다.

16560292253912.jpg“천만 원.”

그때부터 터져나오듯 이수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응찰을 시도했다.

16560292253912.jpg“천오십. 천백. 천백오십.”

빠르게 호가는 올라갔고 어느새 사천이 되었다.

16560292253912.jpg“사천만 원. 이제부터 삼백만 원씩 올라갑니다.”

이제 경합에는 제리 왕과 이수지만이 남아있었다. 이수지의 얼굴에는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서려있었다. 저럴 걸 왜 처음에는 그렇게 소극적이었대. 조금만 하면 오천만 원이다. 오천만 원을 넘기고 싶다는 욕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16560292253912.jpg“사천삼백. 사천오백, 1번 고객님 사천팔백.”

제리 왕이 패들을 들지 말지 고민하는 표정이 보였다. 나는 멘트 대신에 서정선이 했던 마법의 손짓을 취해 보기로 했다. 그 손짓에 홀린 듯이 제리 왕이 패들을 들었다.

16560292253912.jpg“104번 고객님 오천!”

바로 이수지 쪽을 보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 뿐 패들을 올리지 않았다. 나는 바로 낙찰봉을 두드리며 말했다.

16560292253912.jpg“104번 고객님께 오천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현장 고객, 직원 할 것 없이 박수를 치며 제리 왕을 축하했고, 제리 왕은 가벼운 목례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나는 경매대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무사히 끝마쳤다는 안도감과 해냈다는 성취감에 뿌듯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다영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다영이 직원석에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입술 모양으로 말했다.

16560292281436.jpg‘해낼 줄 알았어요.’

그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울컥했다. 바로 그때 지 팀장이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1656029228144.jpg‘해내고 나면 너무 뿌듯해서 연인이나 가족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

  그런 상대가 나에게는 다영이었다. 나는 다영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 쿵, 뒷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 로비 끄트머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다영을 여자로 좋아하는 걸까? 동생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전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16560292281446.jpg“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첫 경매사로서 데뷔가 성공적이잖아.”

고개를 돌리니 김도균이 싱긋 웃으며 서 있었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16560292253912.jpg“당연히 기쁘죠.”

16560292281446.jpg“그런데 왜 그렇게 멍해? 고객들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로비에는 간단한 핑거푸드와 샴페인, 와인이 차려졌다. 메이저 경매가 끝나면 고객들은 돌아가지만 신인 작가 후원 경매는 그렇지 않았다. 낙찰자에 한해 참가할 수 있는 작은 파티가 열린다. 이 파티를 통해 커뮤니티가 시작되고, 다음 신인 작가 후원 경매가 열리는 10월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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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92253912.jpg“너무 전력을 다해서 그런가 봐요.”

16560292281446.jpg“그럴 수 있지. 강정휘 때문에 고비 왔지?”

16560292253912.jpg“아셨어요?”

16560292281446.jpg“어떻게 모르겠어. 미안하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연락도 없이 와서 나도 놀랐어.”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이 주로 VIP들이긴 하지만, 일반 고객들의 응찰을 막아놓진 않았다. 그러니 강정휘가 온다면 막을 명분은 없다.

16560292253912.jpg“오는 사람을 어떻게 막아요. 제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죠.”

나를 보며 김도균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황덕현이 김도균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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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92281446.jpg“네! 난 이만 가볼게.”

16560292253912.jpg“네.”

김도균이 가자 나는 멈추었던 다영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수지가 씩씩거리면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16560292253912.jpg“왜 이렇게 화가 나 있으세요?”

16560292309782.jpg“몰라서 물어? 심규민 작가 그림은 윤이서에게 뺏기고, 이수현 작가 그림은 제리 왕에게 뺏기고!”

16560292253912.jpg“안이현 작가 그림 가져가셨잖아요. 그럼 됐죠.”

16560292309782.jpg“몰라. 억울해.”

입술을 앙다문 이수지의 모습이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같이 심통 맞았다. 어르고 달랠까 하다가 그럴 기분도 아니라서 허를 찌르기로 했다.

16560292253912.jpg“이수현 작가 ‘자화상’ 유찰되기 바라셨죠?”

움찔한 이수지의 모습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태연한 척 말했다.

16560292309782.jpg“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16560292253912.jpg“맞잖아요. 제가 관장님 안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옥션에서 내정가 이하로 그림을 구매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현장에서 유찰된 이후 스페셜리스트를 통해서 위탁자와 협의하는 것이다. 싼 가격으로 그림을 가지고 싶을 때 옥션 시스템을 잘 아는 고객들이 부리는 꼼수였다.

16560292309782.jpg“그래. 유찰시켜서 뒷거래하려고 했다. 이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어?”

화가 난 이수지가 눈을 부라렸다.

16560292253912.jpg“네. 들으니까 좋네요.”

16560292309782.jpg“솔직히 신인 작가 그림인데 시작가가 천만 원인 것이 말이 돼?”

16560292253912.jpg“시장에서 인기가 있으면 가능하죠. 보셨잖아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응찰한 것.”

보란 듯이 웃는 나를 보면서 이수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악담했다.

16560292309782.jpg“그래 봤자. 금방 떨어질걸. 톤이 너무 우중충하잖아.”

16560292253912.jpg“당장은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더 오를 겁니다. 최소 10배는 오를걸요.”

16560292309782.jpg“말도 안 돼.”

가당치도 않다는 듯 이수치가 코웃음을 칠 때 김승재가 갑자기 등장하더니 이수지의 어깨를 감쌌다.

16560292365202.jpg“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서 우리 자기 얼굴을 이렇게 구겨놨어요?”

어울리지도 않는 달콤한 연인 컨셉에 눈이 버릴 것 같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연기력을 바탕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었다.

16560292253912.jpg“관장님이 낙찰받지 못한 그림이 몇 배로 뛸거라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16560292365202.jpg“한지감 씨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네. 행운의 여신인 이수지를 피해 간 작품의 가치가 오를 리 없잖아.”

16560292309782.jpg“그러게 말이야.”

달콤한 연인 컨셉이 이수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주변을 생각하는지 억지로 웃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보였다. 바로 박선호였다. 그가 다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김승재가 음흉하게 웃었다.

16560292365202.jpg“선호랑 같이 왔어요. 다영 씨랑 그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수작질할 거리를 찾고 있는 거겠지. 다영에게 가려는데 김승재가 능글거리면서 말했다.

16560292365202.jpg“낙찰자만 참석할 수 있는 파티라고 설마 내 친구를 쫓아내진 않겠죠?”

16560292253912.jpg“원칙적으로 그래야겠지만, 관장님 지인분이시니 예외로 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이수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자 김승재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협조할 생각이 없지. 나는 가식적으로 미소 지으면서 덧붙였다.

16560292253912.jpg“그럼 저는 인사드리러 가보겠습니다.”

16560292309782.jpg“그래. 잘 가.”

이수지의 인사까지 받으면서 나는 그곳을 벗어나 다영이 있는 쪽으로 갔다. 나를 발견한 다영이 말했다.

16560292281436.jpg“한 책임님. 오늘 정말 멋졌어요.”

16560292253912.jpg“고마워.”

앞에 선 나를 보는 박선호의 얼굴이 굳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끼어들었다.

16560292253912.jpg“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뵙네요.”

16560292393459.jpg“네. 안녕하세요.”

안녕이란 말을 하는 얼굴이 전혀 안녕하지 않았다. 다영은 알아서 박선호에게 선을 긋고 있는 모양이지만, 고객이란 입장을 고수하면서 질척거리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내가 하나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 고객과 스페셜리스트의 입장으로 만나 방패막이가 되기 위해서는, 짜증 나지만 친한 척하는 방법이 제일 좋았다.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16560292253912.jpg“지난번에 정신이 없어서 명함도 못 드렸네요.”

16560292393459.jpg“아…… 네.”

덟은 얼굴로 박선호가 내 명함을 받아들었다. 보통 명함을 받으면 자신도 명함을 주기 마련인데, 뚱하게 내 명함만 봤다.

16560292253912.jpg“저도 명함 받고 싶은데.”

16560292393459.jpg“아……!”

그제야 생각난 모양새를 취하며 마지못해 명함을 내밀었다.

16560292253912.jpg“원하시는 미술품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꼭 옥션에 필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갤러리, 골동상 인맥을 활용해서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친절한 직원 흉내를 내었지만 이 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줄이었다.

16560292253912.jpg‘미술품 핑계로 다영이한테 연락하지 마라.’

  이번에는 박선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16560292393459.jpg“제 담당 스페셜리스트는 한지감 씨가 아니라 다영 씨인데요.”

다영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은근슬쩍 발을 빼려고 들었다.

16560292281436.jpg“저보다 한 책임님이 훨씬 좋은 미술품들을 많이 추천해 주실 거예요.”

봤지? 다영이도 너랑 엮이고 싶지 않단다. 이 정도 되면 창피한 줄 알고 꺼져라. 그런데 이 녀석이 꺼지질 않고 입을 턴다.

16560292393459.jpg“그래도 전 다영 씨한테 추천받고 싶어요. 지난번에 이야기하면서 느꼈지만 다영 씨가 미술품을 보는 시각은 따듯해요. 미대를 나오셔서 그런지 정말 미술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져요.”

그 말을 들은 다영의 표정이 풀어지면서 진심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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