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홍콩 고미술 경매 (1)2021.11.13.
회사로 돌아온 나는 어색하게 다영이 있는 고미술팀을 지나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까 차에서 떠올린 기획안을 막힘없이 쭉쭉 써내려갔다. 그렇게 한 시간 만에 기획안을 완성시켜 서정선 앞에 섰다.
“팀장님. 봐주셨으면 하는 기획안이 있습니다.”
“어떤 기획안인지 기대되네.”
기획안을 이은 서정선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봤다.
“좋긴 한데, 현실화시키기 많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알겠어. 그럼 총괄님께 보고 드리고 회의 잡도록 할게.”
“네. 감사합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서정선의 말대로 현실화시키기 어려운 기획안이긴 하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불가능하진 않다. 만약 현실화된다면 다영도 홍콩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분명 좋아하겠지. 그 생각에 저절로 다영을 보게 되었다. 일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데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고, 나는 급하게 눈을 피했다. 아. 위험했다. 곁눈질로 슬쩍 보는데 다영이 들썩이고 있다. 저벅저벅 나에게 걸어와 잠깐 보자고 할 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다영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밖으로 나가자! 나는 지갑을 들고 쌩하니 사무실을 나왔다. 리틀 포레스트로 들어간 나는 한숨을 돌리면서 사장에게 말했다.
“핫초코 부탁드려요.”
“이제 아이스 초코로 바뀔 타이밍 아닌가요?”
4월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추워서인지 따듯한 것이 마시고 싶네요.”
“두 잔이죠?”
“아니요. 한 잔이요.”
대답을 하는 나를 사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더니 내 뒤를 보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다영이 있었다. 억지웃음을 짓는 다영은 공포영화에서 볼 만큼 공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사장님, 아이스 초코 한 잔도 만들어 주세요. 누구 때문에 속에서 불이 나서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어떻게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지 머리를 굴렸다. 테이크 아웃해서 나가자!
“저는 일회용 컵에 담아…….”
“아니요. 담아주실 필요 없어요. 그냥 머그컵에 주세요.”
다영의 단호한 말에 나는 꼬리를 내렸다. 음료가 나오고 우리는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팔짱을 낀 다영이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나는 눈도 맞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왜 사람을 그렇게 보냐…….”
“그럼 오빠는 왜 사람을 피해요?”
“피하긴 누가 피했다고 그래…….”
“일주일 동안 피했잖아요. 나만 느낀 게 아니라 경매팀 모두 느꼈을걸요? 지금 당장 사무실 들어가서 다 물어볼까요?”
전투적인 다영의 자세는 지금 당장 들어가서 사무실 사람들에게 다 물어볼 기세였다. 일어서려는 다영을 나는 붙잡았다.
“그러지 마.”
“그럼 말해 봐요. 왜 그러는지. 그래야 내가 이해를 할 것 아니에요.”
‘얼마 전에야 널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 그러니까 우리 사귀자.’
2년 전 단호하게 다영을 거절했으니, 차마 이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동료로 남길 원한 건 나니까. 뭐라고 둘러댄다……? 고민하는 나를 보는 다영의 눈빛이 한껏 날카로워졌다.
“진짜 이유 아닌 다른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정곡을 찔렸지만 나는 그동안 쌓아온 연기력을 바탕으로 부정했다.
“심란해서 그런 거야. 벌써 들켜버려서.”
“뭘 들켜버렸는데요.”
“홍콩에 가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내가 고미술팀도 갈 수 있는 방법을 딱 생각해냈거든.”
“뭔데요?”
반신반의하면서 다영은 물었다.
“아직 채택되지 않은 기획안이라 말해주기 좀 그런데.”
“빨리 말 안 하면 당장 서 팀장님한테 가서 물어볼 거예요!”
눈을 부릅뜬 모습이 진심임을 말해주었다. 놀라게 하고 싶었기에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털어놓기로 했다.
“홍콩 지점 첫 경매를 고미술 경매로 여는 것 어떠냐고 제안했어.”
“그 무슨 무리수예요. 외국에 있는 우리나라 유물들을 위탁받아야 할 텐데,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어렵지만 의미 있지. 탑 옥션이 어느 나라에 있어?”
“대한민국.”
“그럼 첫 경매만은 무리를 해서라도 우리가 누군지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다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의미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는 사람 대부분이 한국분일 거예요. 외국인 비율은 10%도 되지 않을 거라구요.”
“그 10%에게 뭘 보여주냐에 따라 홍콩에서 탑 옥션의 이미지가 달라질 거야. 애초에 3년 정도는 마이너스를 감수하면서 여는 것이 홍콩 지점이야.”
“그건 맞지만…… 어떻게 외국인에게 고미술품을 위탁받으려구요?”
한국에서 고미술품 위탁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탑 옥션이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고객들이 위탁자가 되어주고, 골동상이나 나까마와의 관계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국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도 알아. 쉽지 않을 거란 걸. 뚫어야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홍콩 가고 싶다며.”
“가고 싶지만, 폐를 끼치면서까지 가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 홍콩 사람들한테 한국이 어떤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도자기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더 인상적일걸? 유물은 살아있는 역사야.”
진지하게 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하고 싶어요! 결정되면 저도 열심히 할게요!”
“그래. 열심히 하자.”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다음 날. 기획안에 관한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도균이 지 팀장에게 물었다.
“지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야 당연히 하면 좋죠. 단지 현실화시킬 수 있을지가 걱정이죠. 위탁이 쉽지 않잖아요.”
끄덕거리면서 김도균이 말했다.
“적어도 100점 정도가 필요하죠. 한 책임은 어떻게 현실화시킬 계획이죠?”
“일단 외국 고객들을 최대한 활용한 계획입니다.”
“외국 고객 중에서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 텐데요.”
한국의 유물들은 외국으로 가져나갈 수 없기에, 한국에 살지 않은 이상 외국인 중에는 한국의 유물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지 팀장이 다시 설명했다.
“외국 고객뿐 아니라 외국 고객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서정선이 끼어들었다.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고객이 부담스러워할 수 있어요.”
“부담스럽지 않도록 잘 만들어봐야죠. 또 일본 같은 경우는 저희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연을 맺었던 골동상이 있어서 연락을 드릴 생각입니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말에도 서정선은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한 책임 능력은 알지만,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적어도 1년은 준비해야 한다고. 근데 지금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야.”
김도균이 서정선에게 물었다.
“그럼 서 팀장은 홍콩 지점 오픈 경매는 근현대미술로 하고, 고미술품 경매는 1년 정도 준비해서 하길 원하는군요?”
“네. 너무 시간이 짧아서 그래요. 홍콩에 있는 팀들도 당황스러워할 거구요.”
“확실히 그렇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고미술품 경매는 날아간다. 처음에는 다영 때문에 생각해 낸 아이템이지만, 첫 오픈에 고미술품 경매가 이루어져야 인상적일 거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일주일만 저에게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홍콩 지점에 고미술품을 위탁할 수 있는 골동상과 소장자를 뚫어 보겠습니다.”
지 팀장이 걱정을 내비쳤다.
“한 책임. 그건 너무 무리하는 거 같은데…….”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간곡히 청하자 김도균은 입을 꾹 다문 채 고민을 했다.
“그래요. 일주일 시간을 주죠. 그 안에 결론이 나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 팀장도 서 팀장도 한지감 씨가 일주일 동안 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 챙겨주세요.”
“네!”
“네…….”
서정선은 말리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김도균의 결정에 반발하기 어려운지 입을 다물었다. 김도균과 서정선이 회의실에서 나가고 나도 나가려 일어서는데 지 팀장이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열심히 해봐야죠.”
“결과가 어찌 될진 모르겠지만 고마워. 사실 우리 팀 사람들, 홍콩 지점 오픈에서 제외되는 분위기라 침울해 있었거든.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한 책임이 이렇게 나서주네.”
그렇게 공익적인 목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기에 나는 머쓱했다.
“기획안이 생각나서 제안한 것뿐인데요.”
“그래도. 밀어줄 수 있는 한 팍팍 밀어줄게. 도와줄 것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네. 감사합니다!”
회의실에서 나온 나는 곧장 대표실로 올라갔다. 나를 본 이 비서가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 비서님, 내일 저녁에 바쁘세요? 진 회장님하고 식사나 했으면 좋겠는데.”
이 비서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진 회장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까?”
“네. 있어요. 회사일 때문이니까 이 비서님도 좀 도와주세요.”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 회장님께 부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부담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탑 옥션 이미지에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자 이 비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회사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기획이었고, 그녀는 애사심이 높으니 말이다.
“하면 되게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좋을 것 같긴 한데…….”
“제가 진 회장님께 사정 설명하고 자리 만들게요. 제 편 드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제발 앉아있기라도 해주세요.”
진 회장과의 친분이 많이 두터워졌다고는 하나, 이 비서와의 사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꼭 사정 설명하시고 자리 만드셔야 합니다.”
“네. 그럼요.”
* 놀란 황덕현이 찻잔을 내려놨다.
“진 회장이 한 책임에게 천안핑 회장을 소개시켜주기로 했다고?”
“응.”
별거 아니라는 듯 김도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이렇게 덤덤해? 네가 나서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정도 거물을 한 책임이 상대하긴…….”
천안핑 회장은 대만에서 유명한 부자로, 대대로 미술품을 소장하는 부호다. 현성 미술관처럼 사립미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현성 이 회장의 자산 규모가 10조인 반면 천안핑의 자산 규모는 그 2배이니 그야말로 거물이란 말이 잘 어울렸다. 그런 상대를 만나러 가는데 팀장도 아닌 책임 혼자서 나간다는 것이 황덕현은 걸리는 모양이다.
“한 책임이 잡아온 약속인데 알아서 하겠지.”
“너 너무 한 책임을 믿는다?”
“한 책임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김도균이 차를 홀짝였다. 그런 김도균을 황덕현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예전에 한지감이라면 눈을 켜고 반대하던 김도균은 어디 갔냐?”
“그건 오해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 한지감이 그런 사람 아닌 것 알면서.”
“알지. 아는데, 믿어도 너무 믿는 것 같아 대표 입장에서 불안해서 그런다.”
찻잔을 내려놓은 김도균이 픽 하고 웃었다.
“어째 형하고 내 상황이 바뀐 것 같다? 예전에는 형이 이렇게 한 책임을 두고 봤고, 나는 불안해서 난리였잖아.”
“알긴 아네. 천안핑 회장은 그렇다고 쳐도, 홍콩 지점 오픈은 우리한테 중요한 일이야. 한지감에게만 두고 볼 수는 없어.”
“알아. 안 그래도 오늘 홍콩 갤러리에서 일한 갤러리스트 만나러 가려고.”
그 말에 황덕현의 눈이 반짝였다.
“홍콩에 있는 우리 유물 소장자랑 손이 닿는 사람이야?”
“응. 고객 중에 있었대. 아버지가 한국인이라서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사오는 모양이더라구. ‘아트21’이란 경매회사도 운영하고 있고.”
“오호라. 역시 김도균이네.”
“형. 솔직히 말해봐. 이번 홍콩 지점 오픈, 한 책임이 낸 기획안으로 하고 싶지?”
“하고야 싶지. 다만 상황이 허락할지 그게 걱정인 거지.”
이해한다는 듯 김도균이 끄덕거렸다.
“한지감은 그럼 며칠 동안 회사 안 나오는 거야?”
“이틀 정도? 내일 천 회장 만나러 대만 가고, 모레는 아버지의 오랜 거래처 만나러 일본 간대. 대만하고 일본에서 일 박씩 하고 귀국하는 걸로.”
“일정이 많이 빡빡하네.”
“걱정돼?”
“홍콩 지점 오픈 경매가 달려있으니까,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한지감하고 김도균이 움직이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럼, 돼야지.”
싱긋 웃는 김도균의 얼굴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한지감에 대한 기대감이 서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