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홍콩 린 사장 (1)2021.11.24.
탑승 수속을 맞히고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천 회장의 수행원에게 전화를 걸어 중국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한지감입니다.”
[지난번에 이야기는 다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상나라 때 만들어진 홍도관에 관심이 없으신가 해서요.”
[홍도관이요?]
그는 ‘홍도관’이란 단어 자체를 처음 들어보는 듯했다.
“잘 모르시는군요.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인데, 천 회장님이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관련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일단 받아는 보죠.]
전화를 마친 나는 바로 아버지에게 받은 자료를 수행원에게 보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다영이 턱을 괸 채 나를 물끄러미 봤다.
“왜 내가 멋있냐?”
“멋있는게 아니라 부러워서요. 로또를 친구한테 선물로 줬는데 덜컥 당첨된 느낌이랄까.”
“넌 로또에 관심조차 없었거든요.”
“알거든요. 배가 아파서 그래요. 천 회장이 관심을 보일까요?”
“기본적으로 고미술품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거기에다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유물이니, 당연히 관심을 보이지.”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지감아. 이 씨가 말을 흘려서 여기저기서 사겠다는 말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하냐?]
이런 상황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연줄을 쓰면 빠르게 가치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렇게 정보가 샐 가능성도 농후해진다. 희귀한 골동품이라니 모두 침을 흘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한테도 파시면 안 돼요. 이 물건은 팔 사람이 있어요.”
[알았다. 연락 딱 끊고 있을 테니 걱정 마라.]
“네. 물건은 아버지가 갖고 계신 거죠?”
[그럼. 혹시 몰라 가게 금고에 넣어 놨다.]
예전에 김태하가 가게를 무단 침입한 이후 보안이 대폭 강화됐다.
“잘하셨어요. 감사해요.”
통화를 마친 나는 바로 핸드폰을 껐다.
“왜 벌써 꺼요?”
“천 회장님 애 좀 태워보려고.”
악동 같은 미소를 보면서 다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만 보면 꾼이야, 꾼.”
“내가 괜히 골동상으로 이름을 날렸겠니? 그것도 1년 좀 넘는 짧은 시간 동안 말이야.”
“부정할 수가 없어서 더 짜증나!”
나는 가볍게 다영의 볼을 잡아당겼다.
“짜증내지 말고 배울 생각을 해.”
볼을 잡고 있었던 손을 다영이 찰싹 때렸다.
“아. 아파!”
“저도 아파요.”
“살짝 잡았거든?”
“저도 살짝 때렸어요. 저는 저만의 길을 잘 가고 있거든요!”
그때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고, 다영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낌새가 이상해서 슬쩍 보니 박선호가 보낸 가증스런 메시지가 보였다. ‘다영 씨 건강이 상할까 봐 걱정돼요.’
“너 박선호랑 연락하냐?”
급히 다영이 핸드폰 액정을 안 보이게 돌렸다.
“왜 남의 핸드폰은 훔쳐보고 그래요?”
“훔쳐본 게 아니라 보인 거거든?”
“네네. 그러시겠죠.”
나한테 보이지 않게 자세를 취하고선 신나게 답장을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쁘다.
“재벌은 관심 없다더니?”
“이성으로 관심 없다고 했지, 고객으로 관심 없다는 건 아니거든요?”
“과연 박선호의 생각도 같을까?”
그놈의 시꺼먼 속이 어떤 줄 아냐, 정신 차려라! 이런 말들이 목구멍까지 몰라왔지만 옹졸해 보일까 애써 삼켰다.
“선 분명히 그었어요. 좋아하는 사람 있다구요.”
“그 말 박선호는 안 믿을걸?”
“그거까진 어쩔 수 없죠.”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글쎄요. 시간 다됐어요. 가죠.”
말을 마친 다영이 벌떡 일어섰다. 캐리어를 가지고 급하게 다영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 있어?”
“노코멘트할게요.”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노코멘트가 연예인들만의 단어는 아니잖아요.”
묘한 미소를 지은 다영을 보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지 더 알쏭달쏭해졌다. * 홍콩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켰다. 천 회장의 수행원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23통이었다. 불쑥 다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원하는 대로 애가 달으셨네요.”
“그렇…….”
고개를 돌린 나는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다영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좋으시겠어요. 원하는 대로 돼서.”
썩은 미소까지 짓는 여유를 부린 후 다영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당연히 좋지.”
“통화 여기서 할 거예요?”
“응. 통화하고 움직이자. 가방 좀 봐줘.”
“네.”
나는 도망치듯 최대한 멀어졌다. 빨리 걸어서인지, 다영 때문인지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한지감. 진짜 너 왜 그러냐?”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 스스로 실망스러웠다.
“다영이는 아무렇지 않은데…….”
다영에게 이제 나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닌 친한 동료일 뿐이다. 짝사랑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다영에게 그 마음을 들키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그게 너무 힘들다. 내가 이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인간일 줄 몰랐다.
“하아…….”
얕은 한숨을 쉬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천 회장의 수행원에게 온 전화였다.
“딱 맞춰서 전화하셨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탑 옥션 한지감입니다.”
대만에서 전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다급한 수행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도관 안 파셨죠?]
“사겠다는 사람은 있지만 아직 결정하진 않았습니다.”
[회장님께서 홍도관을 구매하고 싶어 하십니다. 가격은 원하시는 만큼 주시겠답니다.]
“글쎄요……. 저도 웬만하면 천 회장님께 넘기고 싶지만, 회사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그때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걸 말해보게.]
직접 나서는 걸 보니 확실히 홍도관에 사로잡혔다.
“회장님이 소장하고 계신 한국 고미술품을 위탁하신다면 홍도관을 천 회장님께 팔겠습니다.”
[감히 나한테 조건을 붙이는 거냐.]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분노를 응축하고 있었다.
“원하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죠. 다른 구매자를 찾아보겠습니다.”
[탑 옥션을 홍콩에 연다고? 발도 못 붙이게 만들 수 있어.]
천 회장은 확실히 그러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홍도관이 나에게 있는 이상, 이 우위는 내가 점유하고 있다.
“회장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홍도관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런 대응이 도박인 것은 맞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통화를 마친 나는 다영에게 돌아갔고,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맞았다.
“뭐래요?”
“내가 내건 조건을 듣더니 화를 내더라구. 탑 옥션이 홍콩 땅에 발 못 붙이게 만들겠다고 협박하던데?”
덤덤하게 말하는 나를 다영은 어이없게 봤다.
“무슨 남의 이야기 하듯 그렇게 덤덤해요? 진짜 천 회장이 그러면 어떻게 해요?”
“홍도관이 내 손에 있는 이상 그럴 순 없어.”
“그래도 모르잖아요.”
“이 정도 위험 감수는 해야지. 시간 없어. 빨리 가자.”
“그래요.”
다영은 걱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 호텔에서 짐을 놓고 바로 린 양 사장이 운영하는 경매사 ‘아트21’로 갔다. 건물 외부를 보니 탑 옥션을 처음 봤을 때처럼 위화감이 느껴졌다. 탑 옥션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세련되어 보인다. 멍하니 건물을 보는 다영을 보니, 그런 위화감을 받은 것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규모가 크네요.”
“우리 회사만 하지 뭐.”
“우리 회사보다 큰 것 같은데…….”
“낯서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들어가자.”
“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런 느낌을 받아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안내 데스크로 직진해 영어로 나를 소개했다.
“탑 옥션에서 온 한지감입니다. 린 사장님과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데스크 직원이 수화기를 들었고 통화는 짧게 끝났다.
“비서가 모시러 내려온다고 합니다.”
“네.”
잠시 후. 모델 같은 외모를 가진 여자가 우리 앞에 섰다.
“린 사장님의 비서입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비서를 따라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명품 브랜드로 유명한 향수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채웠다. 무슨 향수를 들이부었나? 회사인데도 몸매가 몹시 도드라지는 의상을 입었다. 홍콩이라 그런지 확실히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것 같다. 다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말했다.
“옷이 예쁘네요. 어느 브랜드 옷인가요?”
“에르마스에서 한정판으로 나온 옷이에요.”
“비서님이 입어서인지 너무 예쁘네요. 정말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다영의 아이스브레이킹 덕에 비서의 표정은 한결 환해졌다. 나는 다영만 보이게 조용히 엄지를 들었고, 다영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비서에게 잘 보일 필요가 뭐가 있나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보좌하는 사람의 영향력을 무시하진 못하는 법이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따라 보스의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게다가 여기 이 비서는 린 사장과 좀 더 깊은 관계일지도 모른다. 사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린 사장이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맞으며 영어로 말했다.
“멀리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사장님을 뵈러 오는데 그 정도 고생이야 할 수 있죠.”
나의 아부성 발언에 그는 좋은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이거 한 책임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만!”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다과를 내온 비서가 린 사장 옆에 섰고, 슬쩍 비서를 보는 린 사장의 눈빛은 끈적했다. 역시 더 깊은 사이가 맞구만. 확신이 들자 불쾌감이 밀려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말을 꺼냈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를 린 사장님께서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기획하는 사람을 이렇게 직접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 사실 우리도 비슷한 걸 생각하고 있어서, 한 책임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다른 분도 아니고 린 사장님인데 도와드려야죠.”
린 사장은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도 비서를 자꾸 힐끗거렸다.
“그거 참 반가운 이야기군 그래. 대가로 여기 있는 동안 최상의 대우를 제공하지.”
어째 너무 공으로 먹으려 들어 쎄한 기분이 든다.
“다른 걸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것?”
“아직 대외비지만, 시월에 탑 옥션도 홍콩지점을 열 계획입니다. 첫 경매인 만큼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고미술품 경매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린 사장님께서 한국 고미술품을 꽤 많이 소장하시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떫은 표정이 얼굴에 스쳤다.
“홍콩에 지점을 여는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나는 소장품을 팔 계획이 없어. 굳이 판다고 해도 그건 내 회사가 되어야겠지.”
그러니까 경쟁사를 도와줄 수는 없다, 이 말인가. 그런 경쟁사에게 도와달라고 한 당신은 뭔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이대로 밀어붙이는 건 좋지 않다. 치고 빠져야 하는데 짜증이 나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다영이 나서서 기획안을 내밀었다.
“‘아트21’에 탑 옥션이 드릴 수 있는 도움을 적어 봤습니다. 시간 나실 때 한번 읽어봐 주십시오.”
“그러지.”
귀찮은 표정으로 린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끈적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비서였다. 기분 나쁘게 뭐야. * ‘아트21’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는 도움을 받고, 우리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겠다?”
“있는 동안 최상의 대우를 해? 완전히 날로 먹겠다는 거 아니야! 그리고 앞에 사람이 있는데 비서는 자꾸 왜 보는데? 진짜 더러워서!”
“너도 눈치챘구나?”
“어떻게 모르겠어요. 옷뿐만 아니라 구두, 목걸이, 귀걸이 다 최근에 출시된 명품인데!”
다영도 나도 명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산가들을 상대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기도 하고, 패션에 관심 있는 고객들과 대화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공부하기도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안이 부자거나, 로또를 맞았거나 아니면 물주가 있다는 거지.”
“둘이 부적절한 관계인 것까지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왜 저렇게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왜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여자 때문에 사고를 쳤는지 알겠다.”
“그러니까요.”
이곳에 오기 전 린 사장에 대해 간단하게 조사를 했는데, 오른팔이었던 남자 이사가 불륜을 저지르고 외부적으로 알려지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렀다. 린 사장이 공공연하게지지 의사를 피력했던 정치인도 성상납 문제로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턱을 만지며 다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만. 미리 알아본 정보로는 린 사장 짠돌이인데, 비서한테만은 돈을 펑펑 쓰는 것 같죠?”
그건 비서한테 푹 빠져 있다는 증거였고, 그녀의 말에 따라 린 사장이 태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하나의 희망이다.
“그래. 비서를 공략해 봐야겠어. 네가 연락 좀 해서 저녁에 만나 봐.”
“네. 알겠어요. 하는 데까진 해 봐야죠.”
다영은 바로 연락을 했지만 약속이 있다는 말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희망이 없어져 버린 것에 힘이 빠졌지만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그날 밤. 린 사장의 비서는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을 입고 자신 내 숙소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