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홍콩 린 사장 (3)2021.11.29.
[한 선생님이 소장하신 홍도관, 강 회장님께서 원하십니다.]
아…… 이런 꼬였다…….
“저도 강 회장님께 판매를 하고 싶지만, 예약된 분이 이미 계셔서요.”
[그간 회장님과의 관계를 봐서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비서실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강 회장이 홍도관을 많이 원하는 것 같았다 그간 강 회장에게 워낙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단칼에 잘라버리기 어려웠다.
“그럼 생각을 더 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뵐 수 있을까요?]
“네. 저녁에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마친 나는 얕은 한숨을 쉬었고, 옆에서 듣던 다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일이 꼬였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 회장님께는 빚이 있어서 거절하기가 어렵네.”
“그냥 강 회장님께 파는 건 어때요?천 회장에게서 지금까지 연락 안 오는 것을 보면, 구매 의사가 없을 확률이 높잖아요. 그리고…….”
“오늘 이야기가 잘되면 굳이 천 회장이 소장한 유물들이 필요 없기도 하지. 알아…….”
지그시 나를 보던 다영이 물었다.
“국보급 유물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거죠?”
“응. 그래서 웬만하면 천 회장이 다시 대만으로 홍도관을 가져가줬으면 좋겠어.”
내 손으로 직접 유물을 가져와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웃기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천 회장의 마음이 있을 때잖아요.”
“그렇지.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결정할게.”
내일 강 회장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기다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아트21’으로 간 나는 지난번과 다른 분위기로 업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위탁할 유물들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고 준비했소.”
린 사장이 턱짓을 하자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비서가 답했다.
“따라오시죠.”
비서를 따라 다영과 나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비서의 모습은 어제 본 모습과는 많이 달라 신기했다. 아무래도 어제 보여준 화려한 명품들은 오해를 만들기 위한 장치이고, 이쪽이 평소 모습인 듯 했다. 그때 훅 다영의 팔꿈치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아……!”
왜 그러냐는 듯 다영을 보자 다영은 비서를 눈짓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억울했다.
“그게 아니라…….”
설명을 하려는데 비서가 끼어들었다.
“다영 씨, 원피스가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다영은 비서에게 상냥하게 말하고선 나에게는 눈을 부라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면서 비서가 내렸고, 우리도 따라 내렸다. 그녀가 수장고 직원에게 말하자 그가 맨 뒤쪽에 있는 수장고를 열어주었다. 그곳에는 50점이 넘는 유물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우봉 조희룡의 괴석묵란도와, 귀얄기법이 인상적인 분청사기였다. [ 17,000,000원 | 진 | 20,000,000원 | 우봉 조희룡 | 소유자 판매 결정 ] [ 21,000,000원 | 진 | 25,000,000원 | 1490년대 | 소유자 판매 결정 ] 좋은 물건들을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대부분 진품이었고, 가격대가 천만 원에서 오천만 원 선으로 높지 않지만 질이 좋은 물건들이다. 유물을 본 다영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옥션에 올릴 수 있을 만한 괜찮은 물건들이에요.”
“맞아. 그런데 메인으로 쓸 유물이 없어서 조금 아쉽긴 하다.”
“그건 그렇네요.”
“사장님이 들으시면 슬퍼하시겠어요.”
훅 끼어든 유창한 한국말에 우리는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비서가 싱긋 웃었다.
“저도 어머니가 한국인이시라 한국말을 하거든요.”
“아…… 그러세요.”
진작 말하지. 하여튼 린 사장 비서 아니랄까 봐, 사람을 이렇게 테스트하는 것 같아 살짝 언짢았다. 사장실로 돌아온 나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물건들이네요. 다 위탁하고 싶습니다.”
“감정할 수 있도록 홍콩 지점으로 배송해 드리죠.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대한 건 언제 도와주실 수 있소? 지금 당장은 어렵소?”
“자료에 관련한 건 지금 당장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가 곁에서 보고 도와드리는 건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서요.”
이해한다는 듯 린 사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언제가 좋소?”
“가능하다면 5월 중순에 해도 괜찮을까요? 제가 그때 홍콩에 올 일이 있어서요.”
제리 왕이 초대한 전시회에 오는 김에 일도 처리하고 가면 딱이다.
“좋소.”
이후 일정에 대한 정리를 마치고 다영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서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우리를 배웅했다.
“다음에 뵐 때는 자극적 모습들은 잊은 상태였으면 좋겠네요.”
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갸우뚱거렸다.
“자극적 모습이라니, 뭐가 있었나요?”
“먼 길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목례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다영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내가 있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서를 볼 수가 있어요?”
“신기해서 본 거야. 어제랑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어쨌든요!”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 안 그럴게. 화 풀어.”
내가 아부하듯 다영의 어깨를 주무르자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알았어요. 이번엔 넘어가 줄게요. 그래도 신경이 좀 쓰여요.”
“린 사장 비서, 그냥 날 테스트하려고 그런 것뿐이야. 나도 그 사람도 아무 감정 없다고.”
“글쎄요. 상대방도 과연 그럴까요?”
“당연하지. 태도를 봐라.”
로비에서 내린 나는 환하게 웃음지었다.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이제 한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게요. 한국에 가면 제일 먼저 뭐 먹고 싶어요?”
“나는 김치찌개! 너는?”
“저는 매운 떡볶이요!”
“그래. 그럼 떡볶이부터 먹으러 가자!”
며칠 해외로 돌았다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나고 즐거웠다. * 사무실로 돌아온 비서를 보고 린 사장이 반색했다.
“잘 배웅했어?”
“응.”
비서는 편하게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고, 린 사장은 못마땅하다듯이 그녀를 봤다.
“건강 생각해서 담배 좀 끊어라!”
“오빠는 계속 그 소리지.”
지겹다는 듯이 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서의 이름은 서가인. 린 사장의 아버지와 서가인의 어머니는 남매이기에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었다. 타향살이 덕에 사촌인데도 가족애가 끈끈한 편이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친했다.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으니, 바로 ‘아트21’의 린 사장 다음으로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서가인이란 점이다. 서가인의 어머니가 회사를 설립할 당시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를 마시는 서가인을 보며 린 사장은 놀렸다.
“한지감을 놓친 것이 아까워서 그러지?”
“무슨 소리야? 일한 것뿐이거든?”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는 일을 굳이 네가 나서니까 그렇지.”
몇 번의 사고를 겪은 이후로 린 사장은 사업 파트너가 생길 때마다 미인 비서를 두고 부적절한 관계를 연기하곤 했다. 하지만 비서 역할을 서가인이 맡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직접 하겠다고 먼저 나섰다.
“한지감이란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하긴, 소문에 현성 이수지 애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잖아.”
“그건 아닌 것 같던데? 같이 온 여자를 무척이나 아끼더라구.”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는 그녀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스쳤다. 처음에는 이수지 관장의 세컨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벌인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밀쳐내는 모습을 보고 꽤 괜찮은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 옆자리에 이미 차 있어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음에 오면 다시 보고 싶어.”
한지감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곁에서 제대로 지켜보고 싶었다. * 다음 날.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다영을 만날 생각에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빨라졌다. 사무실로 들어서 인사를 하려는데 모두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한지감! 한지감!”
“한지감! 한지감!”
불가능하게 보였던 홍콩 고미술품 경매의 초석을 깔았다는 환호였다. 그 환호의 물결에는 다영도 끼어 있어 더욱 뿌듯했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와아!”
“한지감 남자다!”
“잘생겼다!”
환호성을 받으면서 나는 자리로 갔다. 며칠 만에 봐서인지, 내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책상도 반가웠다. 싱긋 웃으며 나는 서정선에게 다가갔다.
“잘 계셨죠?”
“덕분에 잘 있었지. 이번에도 한 책임이 해낼 줄은 몰랐네.”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어요.”
“천 회장이 들은 척도 안 했다며. 일본에서도 홍콩에서도, 쉽지 않았는데도 잘 해냈네.”
백 책임도 대견스럽다는 듯 나를 보면서 말했다.
“한 책임이야 무슨 일을 맡겨도 잘 하잖아요.”
“과찬이십니다. 다영 씨도 많이 도와줬고, 운도 좋았어요.”
딱딱한 장희정이 평소에 보이지 않던 장난기 어린 태도로 말했다.
“너무 겸손한 것도 보기 안 좋아요, 책임님.”
“진심이에요.”
한창 분위기가 좋은데 불쑥 김도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 책임. 잠깐 회의실에서 보죠.”
“네.”
무슨 일이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상나라 홍도관 대만에서 샀다는 말, 진짜야?”
“어디서 들으셨어요?”
“어디서 듣긴. 뉴욕 크리스티하고 런던 소더비에서 연락 왔어.”
어떻게 정보가 거기까지 퍼진 걸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들은 어떻게 알았대요?”
“감정한 교수가 말한 모양이야. 하긴, 대단한 물건인데 입이 근질근질하겠지.”
어떻게 한국에까지 손을 뻗고 있는지, 그 정보력이 대단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대단한 정보력이네요.”
“그래서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직 모르겠어요.”
“아직 모르겠다고?”
“네.”
나는 현재 어떤 상황인지 김도균에게 설명했다.
“언제까지 천 회장을 기다릴 수는 없잖아.”
“오늘 연락 안 오면 강 회장님께 판매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소더비하고 크리스티에서까지 연락이 오니 정신이 없네요.”
“말을 전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좀 우습지만, 난 옥션에 위탁하는 것은 반대야.”
나는 어렵지 않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중국 유물이기 때문이죠?”
“맞아.”
불법 반출된 중국 유물이 옥션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시엔 불법 반출되었지만 현재 소장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구매한 것이기 때문에, 옥션에 올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경우 기이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는 점이다. 옥션을 통해 낙찰받은 이는 입금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람처럼 사라지고, 물건이 뜬 상태일 때 중국 정부에서 연락이 온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모두 중국이 뒤에서 벌인 일일 거라고 의심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다. 낮은 한숨을 쉬며 김도균이 말을 이어갔다.
“홍도관은 불법 반출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끼고도 남아.”
“그렇죠. 대만에서 나온 유물이라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어요.”
중국은 대만을 독립적인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만에서 나온 유물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길 터였다.
“총괄님 말씀대로 옥션에 내놓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정중하게 거절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지감이 네가 직접 하는 건 어때?”
“제가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도균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네 이름을 상대에게 인식시킬 수 있잖아. 나중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인연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나를 그냥 부하직원으로 생각했다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다. 김도균이 나를 정말 아낀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 제가 연락할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신경은. 귀찮아서 그러는 거야.”
“지금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어른 그만 놀려.”
그때 이수현 작가가 옥션에서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담당자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을 지라던 김도균의 말이 떠올랐다.
“총괄님. 이수현 작가 잘됐는데, 저 인센티브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잘됐으면 그걸로 땡이지. 회사는 책임 질 건 많아도, 잘한 것에 대한 칭찬은 직급과 립서비스로 끝나는 냉정한 곳이야.”
“총괄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서운해요.”
“서운해도 그게 사실이야.”
회의실을 나서려던 그가 무언가 떠오른 듯 멈추고 나를 봤다.
“천 회장 말이야. 오늘 강 회장 만나기 전에 네가 한번 연락해 보는 게 어때?”
“감정이 이미 상해 있는 상태라서, 말이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모르잖아. 일단 너 스스로도 홍도관이 대만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고.”
“그러자니 강 회장님이 걸려서요.”
“그건 또 그렇네. 잘 생각해서 결정해봐.”
“네.”
강 회장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