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홍도관의 주인 (2)2021.12.04.
나는 이수지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사들고 현성 미술관으로 향했고, 마카롱을 발견한 이수지의 수행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관장님이 좋아하시는 마카롱이네요?”
“네. 오다 보여서 사왔어요.”
오다 보여도 이수지가 좋아하는 마카롱을 사올 리는 없다. 아니 이수지가 좋아하는 건지 기억 자체를 못한다. 폭탄 발언하는 입장에서 미약하게나마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기억을 쥐어 짜내서 사온 거다. 내 설명에도 이수지의 수행원은 쉬이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일단 넘어갔다.
“아. 그러세요. 오늘 관장님 기분이 안 좋으십니다. 주의하셔야 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남편분 일로 기분이 상해 계세요.”
바람피우는 사진이라도 또 찍혔나? 날짜를 잘못 잡은 것은 아닌지 후회가 밀려왔다. 수화기를 든 수행원이 내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이수지에게 알린 후, 관장실 문을 열었다. 퀭한 눈을 한 이수지가 힘없이 나를 맞았다.
“왔어?”
“네.”
수행원이 나가고 관장실에는 우리만 남았다.
“관장님이 좋아하시는 마카롱 사왔어요. 좀 드셔 보세요.”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대?”
“관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제가 어떻게 흘려듣겠습니까.”
아부성 발언이 싫지 않은 듯 이수지는 마카롱을 한입 먹었다.
“평소에 연락 한 번 없던 사람이 무슨 일로 이렇게 왔어?”
“제가 대만에서 홍도관을 사왔다는 소문은 들으셨죠?”
“응. 들었지.”
힘없이 이수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장님께서 연락을 주실 줄 알았는데 안 와서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걱정되더라구요.”
“아프긴, 그냥 일이 많아서 그런 거지.”
김승재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이수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 아니던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께서 중국 고미술에는 별 관심이 없으셔. 우리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도 중국 고미술은 없고. 그런 상황에서 덩그러니 홍도관이 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
분명 금액이 부담스러운 것도 한몫했을 텐데, 거기에 대해선 말을 쏙 빼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 부분을 건드렸을 테지만, 고해성사를 하러 온 입장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제가 생각이 짧아서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현성 미술관 관장님은 다르십니다.”
나를 낮추고 높여주자 이수지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당연한 것 아니야.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관인데?”
“그렇죠.”
턱을 치켜든 이수지의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춰주었다. 어느 정도 이수지의 기분은 풀린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솔직히 억울하다. 여러 상황에 동조해서 장단을 맞췄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입으로 동성애자라고 주장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이걸 이용하면 불똥이 덜 튈 수 있지 않을까. 먼저 밑밥부터 깔자.
“요즘 관장님과 이사님 모습, 정말 보기 좋아요. 사람들이 다 비주얼 커플이라고 칭찬이 자자한 것 아시죠?”
“당연한 이야기를 뭐하러 해.”
김승재의 이야기라 살짝 거슬려하면서도 치켜세우는 건 좋아한다. 사람들 위에 있는 것이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제 본래의 목적을 꺼내놓을 차례다.
“관장님을 보다 보니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최근에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누구?”
이수지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관장님도 아는 사람이에요.”
“나도 아는 사람이라고?”
“네. 다영이요.”
“……드림 갤러리 출신 정다영?”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이수지가 되물었다.
“네. 맞아요.”
“……정말 정다영하고 사귄다고?”
“네. 왜 그러세요?”
“아니…….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는 순진하게 답을 했다.
“여태까지 사귀였던 ‘여자친구’하고 좀 느낌이 다르긴 하죠. 무엇보다 다영이랑은 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었으니까.”
“여자……친구?”
“네.”
나는 불안감을 내보이지 않고 최대한 미소로 일관했다.
“그럼 그때 좋아했다고 한 사람이 정다영이었어?”
2년 전 이수지가 고백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때 좋아하는 사람 없었어요.”
이수지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면서 나를 죽을 듯 노려봤다.
“그럼 내가 싫어서 거짓말을 했다는 거네?”
“싫어서가 아니라 흔들려서요.”
“흔들……려서?”
호기심이 어리면서 이수지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관장님, 멋진 분이잖아요. 미술 업계를 이끌어가는 분이시기도 하구요. 그런데 저는 작은 사람이라 관장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결국 결혼은 못할 텐데, 그럼 그게 너무 상처가 될 것 같아서요.”
스쳐 간 감정을 시간이 지나서야 담담히 털어놓는 사람처럼 연기했다. 이수지가 이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불안해서 슬쩍 보는데, 눈이 촉촉했다. 내 말을 완전히 믿은 이수지가 감정에 젖어있었다.
“……맞아. 결혼까지는 안 됐을 거야.”
“지금 관장님 모습을 보니 그때의 제 판단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이쯤해서 빠지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쓸데없이 제가 말이 너무 길었네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잘 가.”
옛사랑을 떠나보내듯 이수지의 목소리는 애틋했다. 양심이 좀 찔렸지만 모두를 위해 가장 나은 판단이라고 합리화시키며 문을 나왔다.
문 앞에 서있던 수행원이 나를 죽일 듯 노려봐서, 나는 도망치듯 계단으로 직행했다. 뒤에서 수행원이 이수지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한 책임님,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쫓아올 작정이다. 지금 잡히면 엄청 난리를 칠 게 분명하다.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이를 악물고 뛰어서 내 차 앞에 도착했다. 이수지의 수행원이 보이지 않아 안심하며 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행원이 나를 가로막았다.
“한 책임님. 저랑 상의도 없이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는 교토에서 있었던 일과 연애의 시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구구절절 설명했고, 덕분의 수행원의 얼굴은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도 저한테 언질 좀 주시죠.”
“반대하실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애초에 그렇게 하자고 한 제 잘못이 크죠. 그래도 마지막에 마무리를 잘해 주셔서, 관장님이 히스테리를 많이 부릴 것 같진 않아요.”
“잘 넘어가고 싶어서 신경 썼습니다.”
수행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덕분에 관장님 기분도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는 차에 올랐고, 수행원의 배웅을 받으면서 주차장을 떠났다.
“잘 풀려서 다행이야.”
그제야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 맥주잔을 쾅 내려놓은 다영이 눈으로 나를 흘겼다.
“왜 무섭게 눈은 그렇게 뜨냐?”
“오빠. 정말 이수지한테 마음 없었어요? 있었던 거 아니에요?”
잘됐다고 얼버무리면 될걸 어떻게 상황을 풀었는지 무용담식으로 말하다 보니 쓸데없이 자세하게 말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만약 마음이 있었다면 고백했을 때 받아들였겠지.”
“멘트가 아련하니 사심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하는 소리예요!”
“그게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랬지. 기분 풀어.”
내 말에도 다영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다영아. 다영아아.”
“왜 사람 이름은 자꾸 부르고 그래요.”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데? 이수지랑 내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이런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우스울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영은 내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긴 뭐가 없어요? 이수지가 오빠 좋아했잖아요.”
“나는 거절했지. 그걸로 끝.”
“예쁘고, 돈 많은 여자가 좋다고 하는데 싫다는 남자가 어딨어. 솔직히 말해 봐요. 오빠도 좀 흔들렸죠?”
“돈 많고, 칭찬해 주는 박선호에게 흔들렸어?”
인상을 팍 쓰면서 다영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말 돌리지 말구요.”
“이건 말 돌리는 게 아니라 팩트거든? 너 요새도 박선호랑 연락하지? 남친 생겼다는 말은 했어?”
“안 했어요. 그런 이야기 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거든요.”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몰아가지 말라고.”
“…….”
논리에서 밀린 다영은 더 이상 반박하진 못했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수지보다 네가 훨씬 예뻐.”
“쳇. 입만 살아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영의 입꼬리는 춤추고 있었다.
“웃었다!”
“안 웃었거든요?”
정색하려 했지만 좋은 기분을 쉽게 숨길 수는 없었다. 목을 가다듬은 다영이 말을 이어 갔다.
“흠흠. 아무튼 이제 더 이상 이수지랑 엮이지 말아요. 다른 여자들하고도요.”
“너도 박선호랑 엮이지 마.”
“안 그래도 오빠랑 사귀는 것 이야기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철벽치기. 약속.”
“약속.”
유치하고 손가락을 걸고 나서야 바보 같은 사랑싸움은 끝났다. 맥주를 마시고 떠들다가 다영이 물었다.
“홍도관 싸게 판 거, 아깝지 않아요?”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300억, 나한테도 큰돈이잖아. 그래도 박물관에 기증한다니까 300억을 포기할 가치가 있었지. 사람들한테로 돌아간 거니까.”
“스페셜리스트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픽 웃으면서 나는 말했다.
“국보급 물건이잖아.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큼 받기도 했고.”
“그렇죠. 돈 들어온 건 확인했어요?”
“아……. 이수지 때문에 깜박했다.”
“빨리 확인해 봐요.”
나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설마하니 천 회장이 돈을 떼어먹겠어?”
“그래도요. 얼른요!”
등쌀에 밀려 나는 핸드폰을 들고 은행에 접속했다. 계좌를 본 내 얼굴이 굳었다.
“아…….”
“돈 안 들어왔어요?”
“아니. 돈이 더 들어와서.”
분명 1,200억이 들어와야 하는데 1,500억이 들어와 있었다. 바로 천 회장의 수행원에게 전화를 걸어 중국어로 말했다.
“탑 옥션 한지감입니다. 대만에 잘 도착하셨나요?”
[네. 잘 도착했습니다.]
“계좌를 확인했는데요. 300억을 더 보내셨더라구요. 계좌로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천 회장의 수행원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네?”
[1,200억은 유물의 가격이고, 300억은 감사의 의미로 한 선생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큰돈인데요.”
[받지 않으시면 앞으로 보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아시겠다고 합니다.]
“잘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마친 나는 얼떨떨했다. 놓쳤다고 생각했던 300억이 내 계좌로 들어와 있다니……. 그런 나를 보고 다영이 물었다.
“뭐래요?”
“300억은 감사의 의미라고 그냥 가지라네.”
“헉……. 300억을 감사의 의미로 줬다구요?”
“그러게 말이다.”
예상치 못한 큰 선물을 받아서인지 좀 기분이 얼떨떨했다. * 라운지에서 열린 자선 파티에서 나와 이수지는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딴 거지같은 놀이를 해야 하는 거야!”
뒤따라온 김승재도 지지 않고 말했다.
“대외적 활동을 같이 하기로 했잖아. 너야말로 얼마나 됐다고 이래?”
“필요 없는 노력이니까 하는 말 아니야! 사람들이 네가 매번 여자 바꿔서 놀아나는 걸 모를 것 같아? 그런데도 모임에서 너랑 다정한 척하는 나를 얼마나 비웃을까!”
며칠 전, 김승재가 만난 여자가 이수지를 찾아와서 헤어져 달라고 울고 갔고, 그때부터 이수지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자존심이 센 이수지는 여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승재의 눈에는 그저 이수지가 자신의 화풀이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는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기분 상하는 일 있었어?”
“그딴 것 없어! 그냥 너랑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짜증난다고!”
화가 난 이수지가 손에 있는 핸드폰을 던졌고, 그 핸드폰이 김승재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이런 걸 원한 것은 아니기에 이수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자존심상 괜찮냐는 말 한마디 꺼내고 싶지 않았다.
“빨리 이혼 서류 보내.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어.”
“…….”
말을 마친 이수지가 싸하게 룸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김승재가 분노를 삭일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늘 한지감이 관장님을 뵙고 갔습니다.’ 현성 미술관 근무하는 직원으로 그는 삼원 예술 재단의 후원을 받았다. 이를 빌미로 김승재는 한지감이 미술관에 오면 알려 달라 했다. 문자를 확인하자, 간신히 삭였던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의적이었던 이수지의 태도가 바뀐 것은 모두 한지감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한지감을 미술계에서 매장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