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청동 향로 (1)2021.12.06.
회의실로 들어서자 서정선이 가볍게 말했다.
“앉아.”
“네.”
서류를 내려놓은 김도균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내일 모레 홍콩 출장 가죠?”
“네. 제리 왕이 주최한 전시회를 보고, 바로 ‘아트21’로 넘어가서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대해 업무를 보고 코멘트할 예정입니다.”
안쓰러운 눈길로 서정선이 나를 봤다.
“해외출장 다녀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또 해외 출장이네. 건강은 잘 챙기고 있지?”
“네. 잘 챙기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물끄러미 나를 보던 김도균이 입을 열었다.
“6월 메이저 경매 때문에 불렀어요.”
“6월 메이저 경매요?”
딱히 다른 특이 사항이 있는 건 아니기에 나는 의아했다. 그런 나를 보며 서정선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번에 경매사로 서는 것 어떠냐고.”
“아…….”
홍콩 고미술 경매의 초석을 다지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한 강 회장에게 약속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경매사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볍게 서정선이 말했다.
“나는 지감 씨가 6월 메이저 경매에 섰으면 좋겠어.”
말투만 보면 ‘과자를 사 왔으면 좋겠어’ 같이 정말 별것 아니라고 여겨질 만큼 가벼웠다. 하지만 실상은 그다지 가볍지 않다. 메이저 경매에는 신인 작가 후원 경매의 현장 고객만 하더라도 2-3배이고, 구경꾼들까지 하면 훨씬 많다. 생각만으로도 등 뒤에 식은땀이 나는 그런 모습이다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저는 신인 작가 후원 경매, 경험 한 번밖에 없어요. 작은 경매에서 조금 더 경험을 쌓은 이후에…….”
고개를 저은 서정선이 단호하게 말했다.
“메이저 경매는 작은 규모의 경매들과는 공기 자체가 달라.”
“그러니까 더 경험을…….”
“작은 경매를 반복해 봐야 채워지지 않는 경험이야. 실패해도 괜찮아. 큰 무대 위에 서 봐야 아는 것들이 있어. 나는 한 책임이 그 공기를 느꼈으면 하는 거야.”
담담하게 김도균도 말을 보탰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무리하게 한 책임을 경매사로 올리고 싶진 않지만, 저와 서 팀장 모두 한 책임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6월 경매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이 남아 있다. 지금부터 집중해서 준비하고 싶지만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과부하가 걸릴 정도는 아니지만, 6월 메이저 경매를 전력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 경매대에 섰을 때 정말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고 당당해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때문에 고민되었다. 조심스레 서정선이 물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면 줄게.”
“아니요. 결정했습니다. 하겠습니다.”
“정말?”
“네. 일이 많아서 충분히 연습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서정선이 헤벌쭉 웃었다. 회의가 끝나고 서정선이 먼저 회의실을 나서자 나는 김도균에게 말했다.
“서운합니다. 이런 일은 귀띔 좀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나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서 팀장이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해서 말이야.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고 그러더라.”
정곡을 찔려 나는 움찔했다.
“원래 그런 성격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사람들은 답답한 성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네 성격이 이 일에 맞다고 생각해.”
“지금 돌려까기 하시는 겁니까?”
답답한데 일에 맞다니…….
“칭찬이야! 칭찬!”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 칭찬 맞아. 우리가 일하는 곳은 예술과 돈이 만나는 곳이잖아. 예술을 돈으로 평가하지만, 예술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곳이야. 그래서 생각해고 또 생각해야 해. 지금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슬픈 눈을 한 김도균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지 않는 순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돈만 보고 달리게 되거든.”
“돈이 좋지만 저도 돈만 아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강정휘처럼 되고 싶진 않거든요.”
“그러니까 잘하고 있다고.”
“감사합니다.”
대견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돈만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단 사람치곤, 돈을 너무 많이 번 거 같다? 이번에 홍도관도 그렇고.”
“그러게요. 운이 너무 좋은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기부도 했습니다.”
“잘했다.”
내가 받은 운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100억을 취약계층을 위해 기부했다. 전에도 돈이 생길 때마다 작게는 5백만 원, 크게는 5천만 원까지 기부를 했지만 억 단위의 기부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술비가 필요했단 사람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이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정말 뿌듯했다. 자리로 돌아와 어떻게 시간을 내서 메이저 경매를 준비할지 궁리했다. 긴장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된다. *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호텔로 가서 짐을 풀고 제리 왕의 주최한 전시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전시회가 열리는 빌딩은 상당히 럭셔리한 느낌을 풍기는 곳이었다. 그는 소장품을 가지고 이번 전시를 열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2년에 한 번씩 이런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실 앞에 서 있는 직원이 물었다.
“초대장 있으십니까?”
“네.”
나는 제리 왕이 친히 보내주었던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초대장이 있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프라이빗한 전시회여서 일반인은 관람할 수가 없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들어가시죠.”
안으로 들어서는데 멀리서 있던 제리 왕이 나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한 책임!”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정말 와 줬군요!”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리가 있다 보니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멀리서 자신의 전시회를 보러 왔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한 모양이다.
“다른 분도 아니고 왕 회장님이 하는 전시회인데 당연히 와야죠.”
“고마워요.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식사하죠.”
“저야 좋죠.”
멀리서 그의 이름을 누군가 불렀다.
“이런, 가 봐야겠네요.”
“어서 가 보세요.”
“천천히 즐기다 가요.”
“네.”
제리 왕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은 어마어마했다. 탑 옥션에서 낙찰받은 ‘예술가의 초상’을 시작으로 제프 쿤스, 카우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카우스도 좋아하시는구나.”
제리 왕이 클래식한 취향을 가졌다고 여겼기에 카우스는 다소 의외였다. 미술 업계 종사자 사이에서도 카우스에 대한 평가는 갈리곤 했다.
“한 책임님?”
고개를 돌리니 린 사장의 비서가 있었고, 린 사장은 없었다. 호텔에서의 기억 때문에 민망한 감정이 들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영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비서님. 여기서 뵙게 될 줄 몰랐네요.”
“그러게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죠. 비서님도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 잘 지냈죠.”
약간 비꼬는 듯한 억양이 느껴져 거슬렸지만 나는 웃음으로 무마했다.
“아. 그리고 제 이름은 ‘서가인’이에요.”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 지난번에 이름을 여쭤보지도 못했네요.”
힐긋 카우스의 작품을 본 서가인이 말했다.
“카우스 작품을 좋아하세요?”
“네. 재밌어요.”
“많은 큐레이터, 평론가들이 카우스를 100년 뒤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거라 예측하죠. 한 책임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평가를 누군가는 질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거야 모르죠. 어떤 화가가 기억될지, 어떤 화가가 잊혀질지 그건 역사가 선택하는 거니까요.”
“역사요?”
“네. 당대에 인정받고 후대까지 그 인정을 이어가는 화가가 있는 반면, 당대와 후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화가도 있죠. 또 당대에 사랑을 받았지만 후대에는 잊혀진 화가도 있고요.”
싱긋 웃으며 서가인이 내가 할 말을 가져갔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러니 감히 판단할 수 없다?”
“네. 그저 저는 현재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죠.”
“흥미롭군요.”
“그런데 오늘은 근무를 안 하시나 봐요?”
별일 아니라는 듯 서가인이 가볍게 말했다.
“아아. 비서 일은 관뒀어요. 굳이 그런 걸 할 필요 없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한 책임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홍도관을 팔아서 엄청난 수익을 챙기셨다고 들었어요.”
이제 소문이 참 글로벌하게 퍼진다.
“네. 챙겼죠.”
“그럼 굳이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살 이유가 없지 않나?”
“그 전에도 월급쟁이로 살 이유는 없었어요. 제가 일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오. 그래요?”
“네.”
전시회를 다 보고 택시를 타려는데 다시 서가인이 등장했다.
“우리 회사 가는 거죠?”
“네.”
“같이 가요.”
그만뒀다면서 회사는 왜 가는 거지? 갸우뚱거리면서도 분위기에 쓸려 같이 택시를 탔다.
“저 근데…… 그만두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비서 일을 관뒀다고 했지, 회사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 적은 없어요. ‘신인 작가 후원 경매’ 팀을 제가 운영하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당한 느낌이 들었다. * 서가인이 웃는 얼굴로 나를 배웅했다.
“오늘 많이 배웠어요. 내일 또 보죠.”
“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트 21’을 나왔다.
“아……. 진절머리 나.”
지난번에는 업무적으로 교류할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서가인은 질문 폭격기였다. 50점 위탁받은 값을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는 듯,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려고 들었다. 덕분에 2시간 있었는데도 이틀은 있었던 것처럼 피곤이 몰려왔다.
“저녁 식사까지 2시간 남았네.”
호텔에 가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강 회장이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골동품 거리인 캣 스트리트로 출발했다.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괜찮은 물건을 찾았지만 강회장이 원하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저녁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딤섬을 파는 가게로 영화에서 전통 음식점 느낌이 나도록 인테리어를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 가게를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계산대 뒤에 있는 장식장에는 도자기, 향로 등 골동품이 자리잡고 있었다. 직원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예약하셨습니까?”
“제리 왕과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을 따라 방으로 들어서니 제리 왕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한 책임, 어서 와요! 이쪽을 앉아요.”
“감사합니다. 좋은 전시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구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다양한 딤섬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어서 들어요.”
“네. 감사합니다.”
딤섬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조심스러웠는데, 생각 이상으로 맛있었다.
“입맛에 맞아요?”
“네. 딤섬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맛있습니다.”
“그거 아주 기분 좋군요.”
나는 싱긋 웃으면서 홍콩 지점 이야기를 꺼냈다.
“탑 옥션 홍콩 지점 이야기는 들으셨죠?”
“언제 이야기하나 기다렸어요.”
소문은 언제나 빠르다.
“10월에 첫 경매를 열 예정입니다. 한국 고미술품 경매로 꾸며질 겁니다.”
“한국은 고미술품 반출이 안 되지 않나요?”
“네. 그래서 해외 소장자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회장님께서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가야죠.”
식사를 하다가 잠시 화장실을 들리고 가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운터 뒤 장식장에 있는 청동 금향로가 자꾸만 눈길을 사로잡았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하지만 중국 유물에 대한 지식이 없어 안경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청동 금향로의 정확한 가치는 모르는 건 당연하고, 진짜 같은 가짜도 있었다. 식사를 끝나고 가게 앞에서 제리 왕과 작별 인사를 했다.
“언제라도 홍콩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해요.”
“네. 감사합니다.”
제리 왕이 가고 나도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본 금향로가 눈에 밟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만 이대로 가면 청동 향로가 계속 밟힐 것 같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