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창과 방패 (1)2021.12.15.
“지난번에 집 사달라며.”
당황한 다영이 눈을 깜박였다.
“그…… 그거야,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거였죠. 진짜 집 사달라는 말은 절대 아니었어요!”
“알아. 그냥 내가 그 핑계로 해주고 싶어서 그래.”
싱긋 다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누구 남자친구인지 말 참 예쁘게 하네.”
“그럼 받아주는 거야?”
“마음만 받을게요.”
“알았어.”
아쉽긴 했지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말을 끝내고 나와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곳곳에 장미가 피어 있어 코끝을 간지럽혔다. 향기로운 냄새가 결혼에 대한 마음을 부추겼다.
“두 사람 참 좋아 보이지?”
“네. 정말 좋아 보여요.”
“확실히 안정감도 생긴 것 같아. 우리도 결혼하면 저런 모습일까?”
“오빠, 결혼하고 싶어요?”
“이제 나이도 있고, 슬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성공에 목말라 앞만 보면서 달려왔지만, 이제는 속도를 늦추고 주변 경관을 보면서 가고 싶었다. 다영을 보며 슬쩍 물었다.
“너는 어때?”
“언젠가 하고 싶지만 당장은 하고 싶지 않아요.”
“천천히 하고 싶구나?”
“아무래도 결혼하면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잖아요. 오빠랑 결혼하는 게 좀 겁나기도 하구요.”
“왜?”
어째서 나와 결혼하는 것이 겁나는 것일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영을 봤다.
“오빠랑 결혼하면 ‘정다영’이 아니라 ‘한지감 부인’으로 불릴 테니까요. 오빠가 좋지만,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고 싶진 않아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 서운했다.
“그렇구나. 알았어.”
“혹시 화났어요?”
“화난 건 아니고 약간 서운해서.”
“미안해요.”
“천천히 생각하자. 나도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으니까.”
“고마워요.”
싱긋 웃은 다영이 폭 품에 안겼고, 따듯한 체온이 약간의 서운함까지 녹여버렸다. 급할 것은 없다. 아직 다영도 나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 형태가 어떻든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채령의 작업실로 향했다. 오늘 이수현 작가와 채령을 소개시켜 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와 달리 정장을 차려입은 채령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 괜찮아요?”
“그럼 멋있어! 개인전 하는 화가 같아!”
그 말에 채령은 빙그레 웃었다.
“말이라도 기분 좋네요.”
“금방 그렇게 될 거야. 가인 갤러리에서 전속 작가로 일하는 것 어렵다 해도, 내가 너 개인전 한번 못 열어주겠냐.”
“풍속화며 전셋집이며 신세 진 게 얼마인데, 개인전까지 열어주시면 저 너무 염치없어요.”
고개를 떨군 채령을 보며 나는 말했다.
“해주고 싶어서 그래. 경환이하고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나는 네 그림 정말 좋아해. 그림에 메시지가 뚜렷하잖아.”
무심코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시선이 갔다. 여러 명을 쓰러트렸을 것 같은 근육질의 남자가 링에 걸터앉아 뜨개질을 하는 그림이다. 시선은 자연스레 그 옆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가정주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면서 반사적으로 거울을 보는데, 거기에는 커리어우먼의 모습이 비춰진다. 전통적으로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했던 것과 다른 개인의 욕망들을 그림에 담았다.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현대 미술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은 친해졌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그런데 네 작품은 안 그래서 좋아.”
“사람들은 그런 걸 촌스럽다고 생각해요…….”
“그게 왜 촌스러운 거야. 친근한 거지. 업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거 강점이라고 생각해. 대중에게서 멀어진 예술은 잊혀지기 마련이야.”
“그런 말 들으니까 힘이 나네요.”
그제야 빙그레 채령이 웃었다.
“채령아. 내가 계속 있는 게 나아, 아니면 소개만 시켜주고 빠질까?”
“음……. 빠지는 것이 나을 듯해요. 그래야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알겠어. 그렇게 할게.”
그때 이수현에게 전화가 왔다.
“네. 작가님. 지금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나는 채령과 함께 건물 정문으로 갔고, 멀지 않은 곳에 이수현 작가가 음료수 세트를 들고 있었다.
“작가님 오셨어요!”
“네.”
“그냥 오셔도 되는데 이런 걸 다 사오셨어요?”
“어떻게 그냥 오겠어요.”
얼마 전까지 채령과 같이 무명이었기에 남 일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자연스레 채령을 소개했다.
“여긴 안채령 작가예요.”
“안녕하세요. 안채령입니다.”
“가인 갤러리 이수광입니다. 이수현이란 예명으로 활동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야말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작가님 작품 보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이수현이 물었다.
“내 그림을 본 적 있어요?”
“신인 작가 경매 프리뷰할 때 갔었거든요. 그때 ‘자화상’ 보고 울컥했어요.”
이 에피소드는 알고 있었지만, 채령의 성격으로 봤을 때 내가 따로 이수현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잘한다. 이채령!
“내 작품을 좋게 봐줬다니 고맙네요.”
“어머.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이즈음해서 나는 빠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핸드폰을 보면서 나는 중요한 연락이 온 사람처럼 굴었다.
“저…… 이거 어쩌죠. 저는 일 때문에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바쁘시면 가셔야죠.”
이수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있고 싶은데 아쉽네요. 가볼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나는 차에 오르니 한 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 퇴근 시간이 되자 김도균이 일어서서 말했다.
“이제 퇴근하죠.”
“네!”
“넵!”
우르르 사람들이 나가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긴장돼?”
고개를 돌리니 서정선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냈다.
“네. 많이 긴장돼요.”
“지난번에도 잘 했잖아.”
내일 바로 6월 메이저 경매가 있는 날이고, 나는 경매대에 서야 한다. 가볍게 서정선이 말을 이어 갔다.
“걱정할 것 없다니까.”
“신인 작가 경매하고는 공기 자체가 다르다고 하셨던 분이 팀장님이시거든요?”
“그게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책임이 잘 해낼 거라 믿어!”
너무 신나 보이는 서정선이 어딘지 얄미웠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신나신 거예요?”
“고통을 함께하는 사람이 오니까 좋아서?”
너무 포장된 말이다.
“‘너도 당해 봐라?’가 아니구요?”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사람을 뭘로 보구. 전혀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 한 책임은 잘할 거니까.”
개구진 표정으로 서정선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자리에서 일하는 척 연기하고 있는 다영을 봤다.
“다영 씨랑 오붓한 시간 지내야 하니까 나는 빠져 줘야겠다!”
“안 찍어 붙이기로 하셨잖아요.”
“찍어다 붙인 게 아니라 진짜잖아. 사람들 다 알아! 나 간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정선은 사무실을 떠났다. 텅 빈 사무실에는 나와 다영만 남아 있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다영이 후다닥 나에게 다가왔다.
“언제 들킨 걸까요?”
“글쎄…….”
들킬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그걸 이렇게 확인받게 될 줄은 몰라 궁시렁거렸다.
“팀장님은 모른 척 좀 해 주시지.”
“됐어요.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른 건 쿨하면서 남녀관계에서 유독 짓궂어.”
“그러게요.”
물끄러미 나를 보던 다영이 물었다.
“내일 경매…… 괜찮아요?”
“안 괜찮지.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봐야지.”
“그래야죠.”
다영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경매는 내가 하는데 왜 네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 내가 그렇게 못할 것 같아서 그래?”
“오빠를 못 믿어서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
“강정휘 때문에 그렇죠. 지난번에도 분탕질했잖아요. 이번에는 아예 못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나는 픽 웃었다.
“뭘 근거로. 그때 누가 그랬는지 확인도 안 됐잖아.”
“모두 강정휘 짓이라는 것 알잖아요. 고객들도 강정휘 가방에서 소리가 났다고 말했다구요.”
“경매 때문에 확인하지 못했잖아. 그리고 확인했다고 한들 고의성이 없었다고 우기면 회사 입장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지.”
“……정말 화가 나요. 나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것 같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다영의 뺨을 감쌌다.
“도움이 안 되긴 왜 안 돼. 이렇게 내 위로가 되어주고 있는데.”
그때 김태하에게 전화가 왔다.
“네. 형. 지금 갈게요.”
“김 비서님이에요?”
“응. 호칭 좀 바꿔. 비서 그만둔 지 한참 됐어.”
“딱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그래요. ‘오빠’라고 부르긴 좀 그렇고, 건물 세입자도 아닌데 관리인님이라고도 할 수 없잖아요.”
“그냥 선배라고 불러. 지금은 아니어도 한때 갤러리에서 일했으니 업계 선배는 맞으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영이 동의했다.
“그게 가장 무난하네요. 그럼 앞으로 김 선배라고 부를게요.”
“그래. 같이 내려가자.”
“일 처리하지 못한 게 있어요.”
“알았어. 일 끝나면 전화해.”
“그럴게요.”
* 회사 정문으로 나가자 김태하가 보였다.
“형. 더운데 안에 계시죠, 왜 나와 있으세요.”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 있을까 봐 그랬지. 얼른 밥 먹자. 배고프다.”
“네.”
나는 미리 예약해둔 한정식 집으로 갔다. 고급스런 인테리어에 김태하는 부담감을 느끼는 듯 했다.
“왜 이렇게 비싼 데를 왔어.”
“형한테 고마워서 그렇죠. 건물 관리하느라 정신없죠?”
강남에 있는 빌딩 8채는 모두 김태하가 관리했다. 혼자가 아니라 이제 그 아래로도 사람들이 3명 들어왔고, 김태하는 팀장이다. 그는 혼자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지만,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무리였다.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닌데 힘든 게 뭐가 있어. 월에 다달이 나가는 비용이 너무 큰 것 아니야?”
“그 정도는 괜찮아요.”
술병을 들어 김태하의 잔을 채우자, 그는 술잔을 비우고서 내 잔을 채웠다.
“내일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강정휘하고 김승재가 만났으니 뭔 일이 생기긴 생길 것 같은데…….”
“제 생각도 그래요. 그런데 뭐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미안하다. 내가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형은 이미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어요. 형이 아니었으면 김승재와 강정휘가 만났다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나의 말에도 김태하의 마음은 계속 불편한 모양이다. 그가 가방에서 사진을 꺼내 내 앞에 늘어놓았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김승재 주변 인물들이야.”
“언제 찍으셨어요?”
“혹시 몰라서.”
사진에는 대부분 삼원 재단 직원으로 보이는 인물과 김승재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러다 조금 다른 느낌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김승재가 여자 정리할 때 쓰는 흥신소 직원.”
“아아. 그래서 좀 튀었구나.”
이해가 돼서 끄덕거리는 나를 보며 김태하가 물었다.
“강정휘가 못 들어오게 할 수는 없는 거지?”
“그 사람도 탑 옥션의 정회원이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한 응찰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 아시잖아요.”
“알지. 답답해서 해본 소리야.”
술을 마시던 김태하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잔을 내려놓았다.
“강정휘가 아예 못 오도록 만드는 건 어때?”
“무슨 일이 있어도 강정휘가 실행할 테니, 아예 못 오도록 만들자는 말씀이시군요.”
“맞아. 바로 내 말이 그거야. 강정휘를 막는 건 내가 할게.”
“그거 괜찮네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그제야 김태하는 환히 웃으면서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 강정휘 갤러리 대표실. 강정휘는 못마땅한 얼굴로, 제 집인 양 편하게 있는 김승재를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김승재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안방처럼 있는 것이 고까워요?”
정곡을 찔렸지만 강정휘는 전혀 아니라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럴 리가요. 혹시라도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그렇죠.”
“역시 제 착각이죠? 고작 핸드폰 벨 울리는 그딴 걸 방해라고 하는 사람이, 나를 홀대할 수가 없죠.”
“그럼요.”
강정휘는 입꼬리가 일그러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더럽고 짜증나도 앞에 앉은 사람은 재벌 3세이다. 심기를 상하게 했다가 어떤 후환이 있을지 모른다. 더욱이 강정휘 갤러리는 이제 업계에서 입지가 약하다. 여기서 김승재까지 등지는 것은 발등을 스스로 찍는 격이다. 게다가 그와는 ‘한지감’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지 않은가. 손을 더럽히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니 이 정도 거슬림은 참아줄 수 있다. 찻잔을 내려놓은 김승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그쪽은 시선만 잘 끌면 돼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한지감이 눈치가 빠른 편이라 걱정이 됩니다.”
김승재가 세운 계획은 이랬다. 그는 흥신소 직원에게 메인 작품을 낙찰을 받게 한 뒤 철회하게 할 작정이다. 경매일에는 높은 가격으로 낙찰되었다는 것에 기뻐할 테지만, 그 다음 날 낙찰을 철회시켜 그 기쁨을 앗아갈 것이다. 그런 뒤에 한지감이 경매사로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소문을 퍼트릴 생각이다. 그럼 회사 안에서, 또 외부에서 한지감의 신뢰감은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눈치를 보면서 강정휘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낙찰 철회한다는 것도 좀 걸리구요.”
서늘한 눈초리로 김승재가 말했다.
“그게 왜 걸린다는 거죠?”
“사람이 여럿 모이면 말이 새어나갈 가능성도 높아지니까요. 저와 이사님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을 사람으로 섭외해 놨어요.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좋아할 한지감을 생각하니, 벌써 즐겁네요.”
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