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안채령 작가 (1)2021.12.22.
네 개의 맥주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당사자보다 더 흥분한 경환이 큰 소리로 말했다.
“첫잔은 원샷입니다!”
그 말에 나와 다영, 채령까지도 다 깨끗하게 잔을 비웠다. 신나서 경환은 비워진 잔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그를 말렸다.
“아직 초저녁이야. 벌써부터 이렇게 달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걱정하지 마! 오늘은 세상에 있는 술 다 마셔도 안 취할 자신 있어!”
“그래도…….”
뭐라고 하려는 나를 다영이 말리더니 나지막히 말했다.
“좋은 날이잖아요. 술 좀 취하면 어때서요.”
“그렇죠. 역시 다영 씨가 뭘 좀 알아.”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경환은 비틀대면서 일어섰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멀어지는 경환의 모습을 채령이 지그시 바라봤다. 그런 채령을 보고 다영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4년 동안 만나도 두 사람은 막 시작한 사이 같네. 부러워.”
“부럽기는. 신나서 저러는 건데.”
부끄러운 듯 채령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누가 자기 일처럼 저렇게 좋아해 주냐고. 저런 남자 흔치 않은 것 알지?”
“그럼, 알지. 그러니까 이렇게 결혼까지 하는 거잖아. 언니, 반지 예쁘지?”
채령이 손을 내밀자, 다영은 반짝이는 결혼반지를 물끄러미 봤다.
“응. 너무 부럽다.”
다영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에 결혼 천천히 하고 싶다는 분이 누구셨더라.”
“오빠는 왜 이렇게 맥락을 못 읽어요. 결혼 자체가 부러운 게 아니거든요.”
“그럼?”
“상대의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부럽다구요!”
“나도 너한테 좋은 일 생기면 내 일처럼 좋아하잖아.”
눈치가 왜 이렇게 없다는 듯 다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도 채령이처럼 크게 해내고 축하받고 싶어서 그래요!”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해서 당황하는데, 채령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이미 언니는 그렇게 하고 있잖아. 업계 1위 옥션 회사에서 커리어 만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야?”
“……그런 말 들으니 위안이 되네. 고마워!”
“진심이야.”
계속 이 이야기가 나오면 불리할 것 같아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참. 채령아.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
“자세한 건 대표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 바뀌는 건 없을 것 같아요. 낮에는 그림 그리고, 밤에는 학원 가고.”
그러면 계약 전과 계약 후의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계약금 받은 걸로 생활하면서 몇 달이라도 그림에 집중하는 건 어때?”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제가 계약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작가도 아니고…… 자리 잡을 때까지는 학원 일을 해야 할 것 같더라구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민망한지 채령이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어갔다.
“오빠는 자기가 뒷바라지할 테니까 그림에만 집중하라고 하는데, 그럼 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몸이 힘들더라도 마음이 편한 게 낫잖아요.”
“그래. 잘 생각했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영이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 호프집에서 술을 마실 만큼 마셨건만 경환의 흥은 잦아들지 않았다.
“우리 채령이 그림 보러 가요. 유명해지기 전에 볼 기회를 주는 거야!”
“오빠. 그만해요!”
채령이 제지하는데도 경환은 듣지 않았다.
“진짜 모처럼의 기회인데, 안 갈 거야?”
그 모습이 웃겨서 나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모처럼의 기회니까 보러 가야겠네.”
“갑시다! 가요!”
발랄하게 다영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우리는 채령의 작업실로 갔다.
“마실 것 내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채령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다영과 나는 작업실을 둘러봤다. 이수현과의 만남을 주선하느라 한 달 전쯤에도 이곳에 왔기에 그림들은 모두 익숙했다. 여러 명을 쓰러트렸을 것 같은 근육질의 남자가 링에 걸터앉아 뜨개질을 하는 그림이다. 최고가가 1억인 그림이어서 탐냈지만, 언젠가 채령이 높은 금액으로 그림을 팔기를 바라면서 그냥 두었던 그림이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전에 없었던 특이사항이 생겼다. [ 0원 | 진 | 100,000,000원 | 2020년대, 안채령 | 가격 폭등 예정. ] 이 그림의 가격이 폭등한다고? 특이사항은 다른 그림에도 똑같이 있었다. [ 0원 | 진 | 70,000,000원 | 2020년대, 안채령 | 가격 폭등 예정. ] [ 0원 | 진 | 80,000,000원 | 2020년대, 안채령 | 가격 폭등 예정. ] 이수현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놀랐던 때가 머릿속을 스쳤다. 멍하니 그림을 보는데 경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 그림 참 좋지?”
“……응. 좋아.”
언제 왔는지 채령이 음료수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 그림 마음에 드시면 드릴까요?”
“주긴 뭘 줘! 안 돼. 우리 채령이는 유명 화가가 될 거니까, 사갈 순 있어도 그냥 줄 순 없지!”
“오빠. 왜 그래요……! 지감 오빠한테 도움만 받아서 죄송한데…….”
채령의 말에 깨갱 경환이 꼬리를 내렸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림도 좋고 가격도 곧 오르는, 그야말로 워너비 그림이다.
“나도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래도 그럴 순 없지. 이제 곧 계약할 거고, 이수현 작가님이 난감할 수도 있잖아.”
다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래, 채령아. 전속 갤러리 입장에서는 민감한 문제일 수 있어.”
“아……. 그 생각까지는 못했어.”
전속 작가가 생기면 갤러리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작가의 그림을 사들이면서까지 가격을 관리한다. 작가가 어느 정도 뜨면서 그림 값이 올라가기 시작할 즈음 문제가 발생한다. 청탁이 들어와서 갤러리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림을 줄 때 일어난다. 그림을 가져간 사람이 작가를 생각하며 잘 간직한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여러 사유 등으로 인해 아는 갤러리에 판매를 위탁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한 점이 시장에 나온 것이 뭐가 그렇게 대수냐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시장에 그 그림이 나오면 몇십 몇백 개의 다른 갤러리가 그림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구매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한다. 하지만 이 연락이 종종 겹치면서 구매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많으면 10곳 정도에서 전화를 받으면서, 한 점이 아닌 여러 점이 시장에 나온 것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그림 값은 떨어진다. 채령이 민망하지 않게 다영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이름 좀 알려지기 시작하면 갤러리 안 통하고 개인적으로 그림 달라는 사람들 생길 거야. 그럴 때 인정에 휘둘리지 말고, 잘 대처해야 해. 내가 달라고 해도 주면 안 된다. 알았지?”
“응. 언니!”
조언을 듣고 채령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술에 취한 경환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다영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나 혼자 가도 된다니까 뭐하러 따라 와요.”
“요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절대 안 돼.”
다영은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내가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쳤고, 결국 우리는 같이 택시에 올랐다.
“하여튼 은근히 고지식하다니까.”
“고지식한 게 아니라 안전제일주의인 거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면서도 다영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아까 그 그림 탐났죠?”
“응. 엄청 났어. 분명히 오를 그림이라.”
“분명히 오른다구요?”
다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말실수를 깨달았다. 나는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딱 감이 온다니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사짜’같아.”
“알았어.”
다행히 다영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미래의 일을 정확히 몰라도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있기 마련이다. 술도 마셨고, 다영의 앞이라 긴장을 풀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다시 이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되뇌면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말했다.
“너도 그림 탐났지?”
“저도 사실 은근슬쩍 달라고 하고 싶었어요.”
“역시 같은 마음이었구만. 그런데 왜 안 그랬어?”
“결과적으로 채령이한테 안 좋은 거잖아요. 안 알려지면 모를까, 이수현 작가가 작업실 와서 저 그림을 안 봤을 리도 없고.”
“그건 그렇지.”
흐뭇한 미소를 지은 다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채령이 여기까지 정말 힘겹게 왔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방해꾼이 될 수는 없잖아요.”
“마음이 통했네.”
“근데 이수현 작가는, 대표로 부를 때는 이수광 대표라고 해야 하나?”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냥 이 작가라고 하자.”
“그래요.”
그러다 문득 전속 작가 계약을 앞두고도 생계를 위해 학원에서 일해야 하는 채령의 처지가 떠올랐다.
“채령이 말야. 전속 작가가 되고도 생계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씁쓸하네.”
“오빠. 아까 일 몇 개월이라도 그만 두라는 말은 정말 세상모르는 이야기예요.”
“나는 그냥 안쓰러워서…….”
내가 풀이 죽어 중얼거리자 다영은 부드럽게 말투를 바꾸었다.
“전속 작가 되고도 안 풀리는 작가들 얼마나 많은데요.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실상은 더 처참하다구요. 아는 선배 중에는 너무 안 풀려서 알콜의존증 환자가 된 경우도 있어요.”
힘겨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어갔다.
“채령이가 정말 똑똑하게 결정 잘한 거예요. 자리 잡을 때까지는 계속 일해야 해요.”
“예술하기 참 힘들다.”
“예술하면 춥고 배고프단 말이 정말 싫었는데, 이 업계 오니까 그 말이 절절하게 느껴져요. 빈익빈 부익부잖아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면서 다영은 힘없이 말했다.
“뜬다고 해도 이미 판매한 그림에 대해서는 작가에게 돈이 가지도 않구요.”
“맞아. 그런 것 보면 추급권이 필요한데.”
“그렇죠. 그런데 옥션에 일하다 보니 추급권이 시행이 되도 걱정이네요.”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네.”
추급권은 재판매 될 때마다 저작권자가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받는 제도다. 현행법상 처음 그림이 거래될 때만 작가에게 돈이 들어온다. 천정부지로 그림 값이 올라도 재판매될 때는 작가에게 1원 한 장 가지 않는다. 작품 값이 올라도 저작권자는 배고픈 현실 때문에 생긴 제도였지만, 이 제도가 시행되면 부담감을 느끼고 미술품 구매를 꺼리게 되면서 시장이 경직될 우려가 있다. 화가로 먹고 사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채령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그림이 높은 금액으로 팔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채령이 이번 신인 작가 경매에 나오면 어떨까?”
“가능하기만 하면 좋죠! 심사를 거쳐야겠지만, 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봐요.”
“그렇지?”
“이 작가님께 신청해 보라고 말씀드려요.”
“그래야겠다.”
일이 잘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 다음 날. 나는 이수현을 직접 만나러 가인 갤러리로 찾아갔다. 건물로 들어서자 나를 맞아준 사람은 이수현이 아닌 김태하였다.
“사장님!”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김태하를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이 대표님이 말씀하셔서 알았습니다.”
“웬 존댓말이에요. 그냥 편하게 말해요.”
“여긴 제 직장이니 그럴 수 없습니다.”
편하게 말을 하던 상대가 존댓말을 하니 영 적응이 안 되고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김태하의 성격상 태도를 바꿀 것 같지도 않아, 나를 바꾸기를 했다. 친근한 태도를 바꿔 격식을 차렸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저는 알아서 가면 되니 이만 가시죠.”
“가는 데까지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후에 퇴근하시고 편한 상태에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깍듯이 인사를 한 뒤에 김태하는 사라졌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왜 저러는 거야.”
빌딩 안으로 깊게 들어가고 나서야 가인 갤러리가 보였다. 나는 정문으로 통하는 큰 곳을 내어주려 했지만, 이수현이 부담스럽다면서 2층으로 가겠다고 했다. 절충안으로 안쪽에 있는 이곳을 빌리게 된 것이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본 이수현이 한달음에 다가왔다.
“오셨어요?”
“네."
아담하지만 포근하고 따듯한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도도한 느낌의 다른 갤러리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는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나를 데려가 차를 대접하며 말을 이어갔다.
“갑자기 뵙자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건물주로 온 것이 아니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탑 옥션 스페셜리스트로 오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경쾌한 답변에도 이수현은 의아해했다.
“제 그림은 메이저 경매에서 다루기 어려울 텐데요?”
“아니요. 바로 다룰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VIP들의 수요가 엄청났으니까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나의 눈치를 보는 그를 보면서 나는 가볍게 말했다.
“얼마 전 계약한 안채령 작가를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신청하셨으면 해서 왔습니다. 심사를 해봐야겠지만, 안 작가님의 그림이 현대적 한국화이기에 신선할 것 같아서요.”
“아…….”
당황스러운지 이수현의 입매가 굳게 다물어졌다. 좋아할 거라고 여겼기에 이런 그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마음 써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안채령 작가는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