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안채령 작가 (2)2021.12.25.
“……마음 써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안채령 작가는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자신의 전속 작가를 내보내고 싶지 않은 경우는 없기에 당황스러웠다. 애써 담담하게 나는 이유를 물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안채령 작가는 작은 아트페어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갈 예정입니다. 이미 다음 주에 열릴 그레이스 아트페어에 신청도 해놓은 상태이구요.”
그레이스 아트페어?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 보니 분명 작은 규모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가 작은 아트 페어에 밀리다니……. 당황스런 감정을 뒤로한 채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트 페어에 참가한다고 해도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내놓을 작품을 있을 텐데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서는 시장에서 먹힐 작품을 내놓아야 하지 않습니까. 안채령 작가가 50점 넘게 그리긴 했지만, 그중에 시장에서 먹힐 작품은 10점 내외입니다.”
숨을 고르고 이수현은 말을 이어갔다.
“아트 페어에서 그 작품들이 팔릴 확률이 높기 때문에 참여가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고개까지 조아리는 것을 보니 이수현은 신인 작가 후원 경매를 안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이러시면 말씀드린 제가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 상황이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워 멍했다. * 내 이야기를 들은 다영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남친 망신당한 이야기 들으니까 좋냐?”
“누가 좋대요? 그냥 좀 웃겨서 그렇지.”
“뭐가 그렇게 웃긴데?”
고개를 살짝 비튼 다영이 생각을 정리했다.
“음……. 말하자면, 인기 많아서 사람이 당연히 상대방도 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고백했다가 뻥 차인 그런 느낌이라서요.”
“굳이 그렇게 뻥 차인 걸 강조해야겠냐?”
“말하자면 그렇다고요.”
홀짝 아이스 초코를 마시고 다영이 말을 이어갔다.
“작은 갤러리들은 신인 작가 후원 경매 나오고 싶어서 안달인데, 특이하네요.”
“그러니까. 신청하는 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확률도 높죠. 신인 작가 후원 경매 경쟁률이 워낙 세잖아요. 그런 부분 이야기 좀 자세히 나눠보지 그랬어요.”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오는 바람에 멍해졌어.”
음료를 마시면서 나는 말을 이어갔다.
“어쨌거나 이수현 작가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거기에 따라야겠지.”
“전혀 따르고 싶은 얼굴이 아닌데?”
“아니야. 진짜 마음 접었거든?”
“알았어요. 믿어줄게요. 일정도 바쁜데 잘됐다고 생각해요. 다음 주에 메이저 경매잖아요.”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10월 중순에는 신인 작가 후원 경매 있지…….”
“10월 말에는 홍콩 경매도 있으니까 바짝 긴장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채령의 그림에 대한 미련을 쉬이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 이수지가 회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 회장이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혼하고 싶어요.”
“잘해 보고 있는 것 아니었어?”
“노력했는데…… 안 됐어요.”
목소리가 흔들려 가다듬고 이수지는 말을 이어갔다.
“정략결혼이고, 정 힘들면 이혼해도 상관없다고 하셨잖아요.”
“정 힘들면이지.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네 언니에 이어 너까지 둘 다 이혼녀가 되는 건 모양새가 안 좋아.”
“그럼 애초에 결혼시키지 마셨어야죠.”
“지금 나를 가르치러 드는 거냐?”
이 회장의 눈초리가 매서워지자 그녀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약속하셨잖아요. 삼원과 그룹 차원에서 주고받을 건 끝났어요. 저희 결혼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도 없구요.”
“흐음…….”
그는 눈알을 굴리며 어떤 것이 더 이익이 될지, 이미지 손실은 어떤 식으로 감수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사람들 시선 때문이라면, 연예인들 가십 터트려서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 그만이에요.”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기본이 억 단위인 재벌가의 이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게 쉽게 돌려질 관심이 아니야.”
“하지만 불륜이라면 다르죠.”
‘불륜’이라는 단어에 이 회장이 반응했다.
“불륜?”
“네. JP엔터 대표가 배우 지연희와 바람피우고 있어요.”
“대표라면 인지도 면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그만한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
“JP엔터 대표는 아니에요. 워낙 관심받는 것을 좋아해서 방송 출현도 많이 하고, 인플루언서이기도 하거든요.”
씨익 이 회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중의 인지도가 있는 대표라, 이거냐?”
“네. 요즘 JP엔터에서 미술관에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천박한 이미지를 고쳐 보려는 모양이구나.”
“네. 거기에 대한 적절한 경고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대도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재벌도 아닌 사람이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상당히 고까운 일이었다. 흡족한 미소가 이 회장의 얼굴에 스쳤다.
“괜찮은 계획이다. 추진해라.”
“네. 아버지.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이수지는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 회장이 말했다.
“여기 왔던 골동상이 지금은 옥션 회사에서 일한다지?”
“네. 탑 옥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지감 급의 인간을 이 회장은 잘 언급하지 않기에, 이수지는 내심 놀랐다.
“아직도 연락이 닿아?”
“제 담당 스페셜리스트가 한 책임입니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이 회장이 말했다.
“계속 곁에 두면서 필요할 때 이용해. 지방대 나온 골동상이 옥션에 들어가서 그렇게 자리잡은 것 보면 보통이 아니야.”
골동품 가게와 옥션은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였다. 교류하는 일이 많았지만 골동품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 중 옥션의 스페셜리스트로 일하는 전례는 없었다.
“한 책임이 좀 특출한 편이긴 하죠. 그런데 아버지. 최기석에게 선물은 이미 보내신 건가요?”
내년에 있을 대선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인데, 이 회장이 아무 말이 없어 불안하던 차였다.
“글쎄. 최기석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걸어볼까 하는데.”
“최기석이 아니라면…….”
“그래 맞다. 조성오다.”
조성오는 화이트 백화점 권미애 사장의 전남편이다.
“이혼한 상태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없지 않아요?”
“부인은 적당한 인물로 붙이면 되지.”
“그렇네요.”
지난번에 최기석에게 줄 서는데 실패한 입장에서, 그는 다른 사람을 새로운 대항마로 선택할 작정이었다.
“줄이 없으면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있는 힘, 그것이 현재 현성이 가진 힘이었다. * 퇴근하고 나는 채령의 작업실을 찾았고, 채령이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지감 오빠! 그 날은 잘 들어가셨어요?”
“응. 택시 타고 잘 들어갔지.”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물 있으면 줄래?”
잠시 후. 채령이 물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주변에 들를 일이 있으셨나 봐요?”
“아니. 확인할 게 있어서 왔어.”
“확인할 거요?”
동그랗게 눈을 떴던 채령이 이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혹시 신인 작가 후원 경매 때문에 오신 거예요?”
“응. 거절의 의사는 잘 알겠지만, 그게 경쟁률 때문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작가님과 직접 뵙고 말씀드릴 수도 있지만, 내가 말하면 부담스러워하실 수도 있어서 여기로 온 거야.”
이수현은 내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기에, 내 도움을 거절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할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표님이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빠가 신인 작가 후원 경매 신청하는 게 어떻냐고 하셨는데 아트페어 때문에 거절하셨다구요.”
“들었구나. 신인 작가 경매 경쟁률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해서 말이야.”
천천히 채령이 입술을 떼면서 말했다.
“경쟁률도 경쟁률이고, 대표님은 제 작품이 대중들의 호응을 받을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신청하는 것 자체가 도박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도박?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야?”
곧 가격이 폭등할 것이란 것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극단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씁쓸한 미소가 채령의 입가에 맺혔다.
“그게 현실이긴 하죠.”
“흐음……. 그렇구나. 넌 정말 신인 작가 후원 경매 안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있죠. 그런데 경쟁률도 세고, 대표님이 하시는 말씀 들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기대했다가 잘되면 더 쓰라릴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대표님 믿고 천천히 가 보려구요.”
“그렇구나.”
사실 부탁하고 싶은 사람은 나였지만, 채령이 저렇게 완고하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채령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는 작업실에서 나왔다.
“이번 기회를 잡는 건 무리일까?”
아트 페어에 나가도 채령의 그림의 가격은 폭등할 것이기에 수저를 얹으려는 것인데, 상대방은 떨어질 것을 염려해 신청 자체를 하지 않으려 한다.
“차라리 뜬다는 걸 알아서 제안을 고를 수 있다면 내가 괜찮은 제안을 할 텐데 말이야.”
안경이 알려준 정보이기에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문득 어떤 요인 때문에 채령의 그림이 폭등하는지 궁금해졌다. 이수현 같은 경우는 신인작가후원 경매와 맞물려 마약의 유혹을 참아냈다는 것이 그림의 가격 폭등을 가져왔다. 두 가지 다 그림 값이 폭등한다는 것을 알고 내가 활용한 것이기에, 그것이 원래 요인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떤 요인이 채령을 그림을 비싸지게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에도 비슷한 식으로 이걸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싱긋 웃은 나는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다음 날. 나는 반차까지 내 진 회장의 아파트 앞으로 향했다. 잠시 후, 버건디색 정장을 차려입은 진 회장이 아파트 현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회장 아닌지가 언제인데 자꾸 회장님이야?”
“저한테는 회장님이라서 그렇죠. 작품 보는 눈썰미가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부탁 들어준다고 아부가 술술이네.”
못마땅한 척하고 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감사해서 그렇죠.”
“이것 하나만 기억해. 보고서 별로면 별로라고 말할 거야.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그렇게 나는 진 회장과 함께 차를 타고 가인 갤러리로 향했다. 채령의 그림 가격을 폭등하게 하는 요인을 생각하다 진 회장을 떠올렸다. 파산 이후에 그는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림에 대한 안목으로 자산가 지인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현재는 예전만큼의 부는 아니더라도 경제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활동들은 미술 투자자로서 그의 입지를 더욱 다져주었다. 그래서인지 무명작가라도 진 회장의 지목을 받은 작가는 작품의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다. 그가 신은 아니기에 전부가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가파르게 오르다가 다시 빠르게 거품이 빠진 경우도 있다. 오늘 내가 활용하려는 부분은 작품과 작가에 대한 그의 안목이다. 만약 진 회장이 긍정적으로 채령의 작품을 평가한다면, 이수현이 자신을 가지고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신청할 확률이 높아질 거라 기대한다. 이것이 본래 가격이 오르게 하는 요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내가 세팅한 이 상황에서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바로 진 회장의 평가였다. 누가 부탁한다고 해서 자신의 눈에 들지 않는 작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진 회장이 신기하게 훑어보았다.
“여기가 네 건물이라고?”
“네.”
“이런 건물을 가진 녀석이 회사에서 일하면 반칙 아니냐? 이 건물 하나만도 아니라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가인 갤러리가 내가 소유한 건물 안에 있기에 어차피 알게 될 것 같아 얘기한 건데, 다른 건물에 대해서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런 건 가만히 있어도 다 알게 되어 있어.”
그때 건물 안에서 이수현이 나와 우리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가인 갤러리 대표 이수광입니다.”
“진영대입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 회장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수현의 안내를 받으면서 가인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과 달리 이제 한쪽에는 채령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진 회장은 어렵지 않게 채령이 그린 그림을 찾아냈다.
“이것이 안채령 작가가 그린 그림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여러 명을 쓰러트렸을 것 같은 근육질의 남자가 링에 걸터앉아 뜨개질을 하는 그림을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던 진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