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안채령 작가 (3)2021.12.27.
“한국화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느낌이 바로 오진 않네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어서 말해 주세요. 입이 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수현과 나는 진 회장에게 집중했다.
“신선하고 재밌어요.”
그 말을 들은 이수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저는 그림으로 거짓말 안 합니다. 솔직히 한 책임이 오자고 해서 약간 부담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진 회장은 지그시 그림을 바라봤다. 갤러리를 천천히 돌아본 후 갤러리를 떠나는 진 회장을 배웅했다.
“정말 데려다 드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도, 집 하나 못 찾아갈까.”
“저 때문에 나오신 거니까 죄송해서 그렇죠.”
진 회장이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이수현 작가, 아니지 이수광 대표랑 할 말 있잖아. 아니야?”
“역시 진 회장님은 못 따라겠어요.”
“또 아부야. 아부.”
나는 싱긋 웃고 말했다.
“혼자 돌아가게 하는 대신에 다음번에 식사 대접할게요. 제 여자친구도 소개하구요.”
“언제 이야기하나 했다.”
“또 이 비서님이 말씀하셨죠?”
“그래. 한참 전에 말했다. 비밀이라면서, 너한테는 절대 내색하지 말라 하더라. 비밀은 무슨, 업계 사람들 다 알고 있어. 다 티 나는데 처음부터 공개연애하지.”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많이 부끄러웠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까 서로 부담스러워서요.”
“네가 연애만 하고 싶은 건 아니고?”
“아니에요.”
그때 빵빵 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예약한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택시 왔네요.”
나는 택시 문을 열었고, 자연스레 진 회장은 시트에 안착했다.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문을 닫자 택시는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배웅을 마치고 다시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고, 이수현이 헤벌쭉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배웅은 잘 하셨습니까?”
“네.”
“이거 저도 배웅을 같이 했어야 하는 것 아닌지…….”
“진 회장님은 저보다도 마음이 젊은 분이라 그런 것 부담스러워하세요.”
그런 진 회장의 성격이 신기한지 이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옷뿐만 아니라 마음도 젊은 분이네요.”
“그렇죠.”
나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이 안 작가 그림에 조금 더 확신을 가지셨으면 해서 가진 자리입니다. 제가 안 작가에게서 본 가능성을 진 회장님도 본다면 설명이 될 것 같아서요.”
“확실히 그 가능성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빨리 안 작가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사실이 그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하게 만들었다.
“안 작가가 그 가능성을 신인 작가 경매에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대표님만 결정하신다면 말이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이른 것 아닐까요……?”
보름달처럼 환하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고, 그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기대했다가 되지 않는다면…….”
“안 작가가 상처 받을까 봐 걱정이 되시는 거군요.”
그는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무명 시절이 길었던 저에게도 기회로 보이던 것들이 있었죠. 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절망감은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안 작가에게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게 하고 싶습니다.”
“그럼 신인 작가가 결정될 때까지 안 작가에게 비밀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비밀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떨어져도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고민하던 이수현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꼭 안 작가가 신인 작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 좀 써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수지와 김승재 사이에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류를 다 확인한 김승재의 변호사가 그를 보고 말했다.
“확인 끝났습니다.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이수지가 김승재를 보고 차갑게 말했다.
“빨리 해. 그래야 이 짜증나는 시간이 빨리 끝나지.”
“잠깐 자리 좀 비켜주죠.”
김승재의 말에 그의 변호사는 일어섰지만, 이수지의 변호사는 주춤거렸다. 그러자 김승재의 말투가 험악해졌다.
“비켜달라는 말, 안 들려요?”
그 말에 이수지의 변호사도 몸을 일으켜 나갔다. 같잖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이수지가 말했다.
“끝나는 날까지 꼭 이렇게 진상을 부려야겠어?”
“내가 원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니까.”
“누가 보면 내가 바람피운 줄 알겠다?”
“아니야?”
미간이 구겨지면서 이수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싶어? 미안한데 나는 증거가 흘러넘쳐.”
“증거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뭘 말하는 건데?”
한지감의 존재를 말하고 싶었지만 김승재는 자존심상 그 이름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 그를 이수지는 비웃었다.
“증거도 없으면서 나한테 이딴 이야기하지 마.”
“이수지. 하나만 기억해. 이혼하면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 다칠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김승재가 말하는 소중한 사람은 한지감이었다.
“네가 다치게 하면 내가 그냥 그렇게 둘 것 같아? 나 대(大)현성 그룹 이수지야.”
“……그래. 지금 네가 한 말 기억해. 나는 기회를 줬어.”
이를 악문 김승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혼 합의 서류를 가져와 사인했다.
* 로펌에서 나오자마자 김승재는 흥신소로 갔다. 그를 본 직원이 깍듯이 그를 맞으면서도 왜 온 것인지 의아해했다. 부르기만 했지, 이곳으로 김승재가 직접 발걸음을 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마실 거라도…….”
“됐어요. 그냥 앉아요.”
“아. 네…….”
직원이 엉거주춤 소파에 앉았지만 김승재는 열 받은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그런 것 없어요.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김승재가 가방에서 한지감이 찍힌 사진을 꺼냈다.
“탑 옥션 직원, 한지감이에요.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줘요.”
“모든 것이요?”
“네. 태어나서 지금까지 싹 다.”
“알겠습니다.”
이제 이야기가 끝난 것인가 하고 김승재를 보는데, 아무래도 할 말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하나 더.”
“네. 말씀하세요.”
“‘강정휘 갤러리’의 강정휘 대표에 대해 조사해 주세요.”
한지감을 왜 조사하려는지는 대략적으로 감이 잡혔다. 김승재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왜 앙심을 품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몰래 한지감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깊은 조사를 할 필요도 없이 한지감과 이수지가 사귀는 관계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같은 편인 강정휘를 조사하려는 것인지 직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님이 원하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집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쓸데없는 정보를 가져와 시간 낭비를 하기 때문이다. 김승재의 눈치를 보면서 직원은 조심스레 물었다.
“정확히 강정휘 대표의 어떤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지감과의 연관성에 대해서요.”
“연관성이요?”
“네. 강정휘가 왜 그렇게 한지감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알고 싶어요.”
이익에 움직이는 강정휘가 한지감을 왜 그토록 무너트리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인이 말하는 공익적인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지나가는 개라도 알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막연하게 한지감이 강정휘의 자존심을 짓밟아서라고 여긴다. 하지만 강정휘는 재벌들과 다르다. 자존심이 다쳤다고 한들 돈만 쥐여 주면 꼬리를 흔드는 인간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존심이 상해도, 돈이 되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긴 시간 동안 한지감을 무너트리기 위해 그렇게 고군분투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더 이상한 것은 적대적인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않은 한지감이다. 그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이 이상한 관계 속에 무언가 비밀이 있다고.
“비용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움직이면 될까요?”
“비용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요. 얼마가 들어도 댈 테니까. 대신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세요.”
“네!”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으로 해결되지 않을 건 없었다. * 가인 갤러리에서 나와 리틀 포레스트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영이 들어섰고, 나는 준비해 둔 핫초코를 내밀었다.
“자. 미리 시켜 놨어.”
“고마워요. 오빠.”
홀짝 핫초코를 마신 다영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쳤다.
“참. 가인 갤러리에서 채령이 신청했다면서요?”
“응. 오늘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채령이한테 신인 작가에 대한 것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왜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는 다영에게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작가 후원 경매인데 작가가 모르는 신청이라니 좀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이수현 작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알았어요. 말 안 할게요.”
“고마워.”
눈을 가느다랗게 뜬 다영이 떠보듯이 물었다.
“그런데 이수현 작가한테 한 약속은 어떻게 지킬 생각이에요? 오빠가 직접적으로 나서기가 어렵잖아요.”
어쨌든 가인 갤러리는 내 건물에 있었고, 나는 채령과도 친분이 있다. 사적인 관계 때문에 내가 채령을 신인 작가에 세우려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지. 안 그래도 그래서 생각해 둔 게 있어. 잘 될진 모르겠지만.”
“그게 뭔데요?”
나는 대답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김도균의 앞에 섰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실에서 뵐 수 있을까요?”
“그래요.”
의아해하면서도 김도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신인 작가 후원 경매 때문에요.”
“후보 30인 추리는 건 내일이잖아.”
“네. 그렇죠. 그래서예요. 안채령 작가를 밀어주셨으면 해서요.”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김도균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가인 갤러리는 제 건물에 입점해 있고, 안 작가는 저와 친분이 깊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나를 보면서 김도균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사적인 감정 때문에 안 작가를 민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한지감이 이렇게 나오는 거면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이럴수록 회의를 통해서 정정당당하게 결정을 해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야.”
“제가 대놓고 안 작가를 밀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부탁드리잖아요.”
좋은 말로 다독였는데도 물러서지 않는 나를 김도균은 어이없다는 듯이 봤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안 작가 그림, 이번에 반드시 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안경으로 봤다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간신히 삼켰다.
“이수현 작가도 다 반대했지만 결국 잘됐잖아요.”
“그건 ‘대마초’라는 변수가 들어갔기 때문이잖아.”
“제 촉 좋은 거 아시잖아요. 이번에도 딱 그런 느낌이 든다 말이에요. 그런데 안 작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 자리가 우리 경매였으면 좋겠어서 이러는 거예요.”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내 말이 먹혀 들어가는 것 같아 더 밀어붙였다.
“이수현 작가 잘된 거 아무 보상이 없어도, 적어도 업무에서 저를 다시 한번 믿어주실 수는 있는 거잖아요. 진 회장님도 안 작가 뜰 거라고 하셨어요.”
“진 회장님이?”
“네!”
흔들린다는 사실에 짜증난 김도균이 머리를 흩트렸다.
“아. 정말…… 왜 나한테 이래?”
“그럼 누구한테 그래요.”
“서 팀장 있잖아.”
“총괄님이 경매팀 총책임자이시고, 애사심도 남다르시잖아요. 정말 이건 기회예요. 신인 작가 경매가 사람들에게 더 확실한 인상을 남길 기회!”
마음을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김도균이 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