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안채령 작가 (4)2021.12.29.
“총괄님이 가장 높고, 애사심도 남다르시잖아요. 정말 이건 기회예요. 신인 작가 경매가 사람들에게 더 확실한 인상을 남길 기회!”
마음을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김도균이 나를 보았다.
“혹시 안 작가 그림 샀어?”
“지금 제가 안 작가 띄워서 차액을 챙기려고 한다는 거예요?”
흥분하는 나를 보면서 김도균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아니면 말지, 왜 그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흥분을 안 하게 생겼어요? 솔직히 마음 같아선 안 작가 그림 싹 다 사서 사리사욕 챙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신인 작가 경매가 잘됐으면 좋겠어서 꾹 참고 있단 말이에요!”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 근데 공정성에 대한 부분이 말이 나오니 찜찜해서 그런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는 이제 모든 신인 작가와 갤러리가 원하는 꿈의 무대다.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 자리는 10개밖에 없다. 막상 선정된 작가들을 보면 자신의 작품, 혹은 갤러리 소속 작가보다 엄청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고, 그래서 공정성에 대한 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알죠.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잖아요.”
“말이나 못하면. 그렇게 확신이 들어?”
“네! 들어요.”
“자리를 걸 수 있을 만큼?”
‘자리’라는 말에 나는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리를 걸 수 있을 만큼이에요. 그러니까 한 번만 도와주세요.”
푹 한숨을 쉰 김도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지감이 너 믿으니까 해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심상치 않은 김도균의 표정에 나는 멈칫했다.
“무슨 조건이요?”
“뭐 그다지 큰 희생이 필요한 건 아니야.”
이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해, 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뭔데요?”
“9월, 12월 메이저 경매는 네가 진행하라고.”
“네? 서 팀장님하고 이야기 된 거예요?”
“아직 안 됐어.”
아하. 그렇구나. 그럼 2번 중 하나는 빠져나갈 수 있겠다. 경매사로 경험을 쌓는 것은 좋지만, 메이저 경매를 2번 다 진행하는 것은 어쩐지 부담스럽다.
“서 팀장님이 괜찮다고 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그래. 알았다.”
* 다음 날. 신인 작가 후원 경매 후보 30인을 정하는 회의가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한 후보를 두고 김도균이 단호하게 주장했다.
“가인 갤러리 안채령 작가가 취지에 가장 잘 맞아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서정선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한국화 작가라는 것이 저는 걸려요. 전통적인 한국화도 아니어서, 고미술을 좋아하던 컬렉터들도 반감이 있을 거구요.”
“그건 여태까지 이런 작품이 다뤄진 적이 없기에 갖는 섣부른 편견 아닙니까? 안 작가의 그림은 신선하고 친근해요.”
낮은 한숨을 쉬며 서정선이 반박했다.
“이런 이야기는 저도 하고 싶지 않지만, 친근한 느낌을 주요 고객들은 천박하다고 여기는 것 아시잖아요.”
옥션에 오는 고객들은 대부분 여유자금이 있는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남들보다 자신의 신분이 높다는 것을 과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소비하는 경향도 있다. 그렇기에 친근하다는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 있는 하나의 요인이었다. 나서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이해관계자였기 때문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정선의 말을 김도균이 반박했다.
“그런 경향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의 구미에 맞는 그림들을 세팅하는 것은 중요하죠. 하지만 신인 작가 후원 경매의 본래의 목적과 균형성을 생각했을 때, 옥션에 나오기 어려운 작품들을 올리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캬아아. 역시 김도균. 논리를 참 잘도 뽑아냈다. 하지만 여기에 가만히 있을 서정선이 아니었다.
“그런 부분을 고려한다 쳐도, 걸리는 것이 있어요. 안채령, 우리 회사 작품 관리팀 김경환 사원과 결혼할 관계라면서요. 외부에서 봤을 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해요. 오해를 만들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나아요”
백 책임도 끄덕거리면서 공감했다.
“저도 이 부분에 공감합니다. 오해의 소지는 줄이는 것이 좋습니다. 자칫하면 여태까지 쌓아왔던 신인 작가 후원 경매의 이미지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어요.”
이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와 채령이만 떼어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경환도 탑 옥션에서 일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황한 나와 달리 김도균은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했다.
“오해의 소지 때문에 좋은 작가를 후보에서 제외한다, 이것이야말로 역차별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부에서 볼 때는 의심이 가는 상황이잖아요.”
현실적으로 의심이 간다. 외부에서 보는 공정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태까지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입을 뗐다.
“그럼 의심이 가지 않게 우리가 손이 가지 않는 방법으로 하면 어떨까요?”
“손이 가지 않는 방법?”
동그란 눈을 한 서정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현재까지 저희가 후보 중에서 작가를 최종 선택했다면, 이번에는 커뮤니티가 선정하게 하는 거죠.”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서 관심을 더 불러일으키자는 거지?”
“바로 그거예요. 대중이 정치보다 연예계 일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연예계에 대중의 영향력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 사는 연예계는 아무래도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정치계는 다르다. 투표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모르쇠로 일관한다. 문제 있는 이력을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정치계에서 굵직한 자리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여태까지 반대했던 서정선이 납득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VIP들이 더 열정적으로 참여할 거야.”
고개를 저으며 백 책임이 반대했다.
“하지만 그만큼 일처리가 피곤해질 겁니다. 나중엔 후보 30인에도 관여하려고 들 거예요.”
틀린 말이 아니다. 영향력을 맛본 사람들은 더 큰 영향력을 갖기 원한다. 연예인의 SNS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구설수에 오르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 책임님 말씀 맞습니다. 후보 30인에 대해서도 관여하려는 움직임이 있겠죠.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채령 작가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마치 한 사람을 위해서 시스템을 바꾸는 것 같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김도균이 말했다.
“안채령 작가로 인해 말이 나온 건 적절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공정성에 대한 부분은 지속적으로 말이 나오니, 대응책을 논의해야 할 사항이에요.”
“…….”
맞는 말이기에 백 책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김도균은 상황을 정리했다.
“어떤 의견들이 있는지 알겠어요. 지금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이 회의가 아닌 대표님과의 상의를 통해서 결정하겠습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그렇게 결정했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자리로 돌아온 나는 백 책임을 지켜보다 슬쩍 다가갔다.
“백 책임님, 저랑 커피 한잔 어떠세요?”
“……그래. 가자.”
백 책임은 어색해 하면서도 받아들였고, 나는 리틀포레스트로 갔다. 그곳에 간 백 책임이 눈이 커졌다.
“여기 카페가 있었어?”
“모르셨죠? 제 아지트예요.”
음료를 가지고 나와 백 책임은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커피 내가 산다니까.”
“제가 사고 싶어서 그래요. 아까 책임님 말대로 적절치 못했던 것 같아서요.”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해.”
나는 담백하게 말했다.
“안채령 작가 저도 잘 아는 동생이고, 친분을 떠나서 작가로 좋아해요. 팀장님은 친근한 게 문제라고 보셨지만 저는 그 부분이 좋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꼭 뽑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담당자는 그런 마음을 접고 공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요. 선배님 덕분에 떠올랐어요.”
채령을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에만 치우치다 보니 지켜야 할 중심을 잠시 잊었고, 백 책임이 그것 떠올리게 했다. 예민한 성격이지만 백 책임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다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좋은 작품 보면 꼭 위탁받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해해. 내가 아깐 좀 예민했어. 갑자기 방식을 그렇게 바꾸면 여태까지 회의한 게 없었던 일이 되니까 감정적이었어.”
“아니에요. 그런 부분 보이시면 계속 말씀해 주세요.”
“알았어.”
그제야 백 책임은 싱긋 웃어 보였다. * 김도균을 보며 황덕현은 찻잔을 가리켰다.
“일단 차 마시면서 숨 좀 돌리자.”
“숨 돌릴 새가 어딨어. 신인 작가 후원 경매가 한 달도 안 남았어. 그 후에는 홍콩 지점 첫 경매가 있고.”
“나도 알아.”
그걸 모르겠냐는 표정으로 황덕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참. 9월 경매는 누가 하기로 했어?”
“한지감이 할 거야. 12월 경매도.”
“서 팀장하고 이야기된 거야?”
“이야기 안 됐지만, 같은 서 팀장도 같은 마음일걸.”
“한 책임은?”
“지감이도. 그건 곧 정해서 말해 줄 테니까 어떻게 할지나 빨리 말해.”
김도균이 재촉하는데도 황덕현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차를 우아하게 마셨다.
“아. 형!”
“귀 안 막혔어! 임마! 생각하는 중이라고. 더 많은 영향력을 원할 것이란 말은 맞아. 하지만 그래서 안 하기엔, 한 책임이 아이디어가 무척 마음에 든단 말이지.”
“두 손에 떡을 들고 하나도 안 내려놓고 싶구만. 하여간 욕심은.”
황덕현은 뻔뻔하게 응수했다.
“그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내가 이 자리까지 왔겠냐? 탑 옥션이 이렇게 컸겠어?”
“그거야 그렇지.”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신 황덕현이 물었다.
“네 의견은 어떤데?”
“나는 한지감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역시 한지감 바라기답네.”
“소름끼치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인상 쓴 김도균을 보고 황덕현은 한 걸음 물러섰다.
“좀 의외라 그러지. 너 공정성에 민감한 편이잖아.”
“여전히 민감해. 그래서 커뮤니티 투표를 하자는 거고. 안채령 작가 때문에 아이디어가 나와서 안 좋게 보이는 건 알지만, 언젠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어.”
조금 전 회의에서 한지감이 커뮤니티 투표 아이디어를 말했을 때, 김도균은 무릎을 탁 치면서 찜찜했던 부분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황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실 난 안채령 작가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건 걸리지 않아. 모양새가 좋진 않지만, 원래 생각지 못한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나오곤 하는 거니까. 하지만 더한 영향력을 원할 거라는 사실이 찜찜한 거지.”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삐끗거릴 수도 있으니까?”
“맞아.”
신인 작가 후원 경매는 탑 옥션이 처음 시도한 경매였고, 업계 1위라는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지금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회사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위험성을 안는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이다.
“스카이 옥션에서 신인 작가 후원 경매랑 비슷한 형식의 경매를 기획하는 눈치야. 아직 소문이 퍼지진 않았지만. 지금 이대로는 안 돼. 더 발전된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라 회의 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 부분이 걸렸다. 입을 꾹 다문 채 황덕현은 고민에 빠졌고, 김도균은 대답이 나오길 기대했다. 긴 정적을 깨고 황덕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