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홍콩 경매 (1)2022.01.08.
장희정이 걱정스럽게 서정선의 책상을 보며 물었다.
“팀장님……. 아직도 연락 안 돼요?”
“네……. 다시 전화해 볼게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서정선이 연락 없이 아침에 출근하지 않았다. 전화를 계속 거는데도 받지 않아 불안했다. 다시 전화를 거려는데 김도균이 팀으로 다가와 전원 일어섰다.
“서 팀장, 갑자기 맹장이 터져서 수술 들어갔다고 합니다. 방금 전에 남편분께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연락이 되지 않았구나……. 침울한 팀원들을 보면서 김도균이 말했다.
“수술 잘 받으면 된다니까 기도해주세요.”
“네.”
“……네.”
“예.”
건조하게 말했지만 굳은 표정을 보니 김도균도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고 나를 비롯한 팀원들도 자리에 앉았다. 장희정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맹장이라니…….”
그런 장희정을 백 책임이 다독였다.
“수술 잘 받으면 된다잖아. 괜찮을 거야.”
9월 경매, 신인 작가 경매 등 일이 너무 많은 탓 아니었을까? 거기에 신인 작가 경매의 방식을 바꾼 것이 한몫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 다음 날. 팀원들과 함께 서정선의 병문안을 갔다. 환자복을 입고 맨얼굴인 서정선은 회사에서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오지 말라니까 뭣하러 왔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정선은 팀원의 방문을 반겼다. 평소와 달리 장희정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보고 싶어서 왔죠.”
“어머. 희정 씨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그럼요.”
희미한 미소로 팀원들을 보던 서정선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아……. 홍콩 가고 싶었는데 몸이 이래서 가질 못하겠네. 오늘 바로 가야 하는 것 아니야?”
“네. 맞아요.”
홍콩으로 가기 전에 서정선의 얼굴을 보려 잠시 들른 것이다.
“홍콩에 지어진 우리 회사 사옥 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가시고, 이번 경매는 저희들에게 맡겨주세요.”
우두커니 서있던 백 책임이 눈치를 보다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정선은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래도 아쉽네. 우리 회사 홍콩 지점 첫 경매, 그것도 한 책임이 기획한 무려 고미술품 경매인데 볼 수가 없어서.”
“다음번에 보시면 되죠. 시리즈로 할 예정이거든요!”
나는 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마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그게 티가 났는지 그런 나를 서정선은 놀려댔다.
“다음번에 보면 된다는 사람 얼굴이 왜 이렇게 그늘져 있어? 도울 손 하나 없어져서 짜증났나 본데?”
“그럴 리가요. 죄송해서 그러죠.”
“한 책임이 뭐가 죄송해?”
“저 때문에 무리하셨잖아요…….”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난번에 내가 아이디어 있으면 빨리 빨리 말하라고 한 걸 지금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야? 한 책임, 보기와는 달리 뒤끝이 기네?”
“내년에 했으면 됐는데, 제가 너무 무리하게 일을 진행했어요.”
“회사일이 다 그렇지. 그리고 시기적으로 적절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에 두지 마.”
“…….”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서정선은 부러 가볍게 말했다.
“괜한 죄책감 갖지 말고 내 몫까지 열심히 일해주면 돼. 계속 마음에 두면 한 책임을 뒤끝 긴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알았지?”
“네……. 빨리 나으세요.”
“걱정 마. 내가 체력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야. 금방 회복돼.”
싱긋 웃는 서정선을 나는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 비행기 안에서 나는 크리스토퍼 버지의 영상을 보면서 그의 영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김 책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오오. 잘 따라하는데? 홍콩 경매 한 책임이 해도 되겠어!”
“따라하니까 되는 거죠. 그냥은 못해요.”
그런 것 있지 않는가. 영어 자막이 있으면 괜히 내가 알아듣는 것 같은 느낌?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따라하면 영상 속 크리스토퍼 버지처럼 영어로 경매를 진행할 수 있는 기분이 들지만, 영상이 없으면 말이 잘 나오지도 않았다.
“이거 팀장님이 주신 거지?”
“네.”
“나도 전에 받았는데, 한 10분 보고 안 봤거든. 보는 게 도움이 돼?”
“네. 저는 많이 도움이 돼요. 특히 제스처나 목소리 톤 같은 것이 공부가 많이 되더라구요.”
“역시 최고속 승진자는 다르구만.”
눈을 가느다랗게 뜬 김 책임이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혹시 외국으로 이직하려는 거 아니야?”
“하하. 누가 절 받아주겠어요?”
외국으로 이직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웃음이 났다. 웃는 나를 보고도 김 책임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어어? 이거 받아주면 갈 기세인데? 소더비, 크리스티 담당자들하고 연락한다더니 건너가는 거 아니야?”
“제가 고미술 경매 준비하면서 느낀 게 있는데요. 저는 정말 한국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외국은 받아준대도 못갈 것 같아요.”
“에이. 아닌데.”
“정말이에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더라니까요.”
김 책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박했다.
“그거야 단시간에 여러 국가를 돌아다녔으니까 그렇지. 한곳에 정착했으면 달랐을걸?”
“아니라니까요. 제가 그렇게 적응력이 좋은 편이 아니에요.”
“왜 좋은 편이 아니야. 골동상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된 거 봐봐. 적응력 갑이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백 책임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인이 아니라잖아. 그만 좀 괴롭혀.”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죠.”
“가능성이든 뭐든 그만해. 조용히 좀 가자.”
날카로운 백 책임의 반응에 김 책임은 꼬리를 내렸다.
“네. 그만하겠습니다.”
하지만 백 책임이 고개를 돌리자 입모양으로 나한테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나는 웃음으로 무마하고 다시 영상을 봤다. 해외에 정착해서 일하는 모습이라, 멋진 모습이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은 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럴 일도 없을 텐데 이런 걱정은 뭐하러 하지?”
스스로 웃기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 근현대미술팀을 비롯해 고미술품 작품관리팀까지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 작품관리팀이 따로 있었지만, 이번 경매는 한국 고미술품 경매이기도 하거니와 첫 경매이기 때문에 손이 부족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프리뷰를 열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전시를 하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프리뷰 전시를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앉아있는데, 양 팀장이 키 큰 남자와 함께 들어오더니 김도균에게로 다가갔다. 이야기가 오간 뒤에 양 팀장이 사람들을 보면서 영어로 말했다. 홍콩 지점에는 대다수가 홍콩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본사분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프리뷰 준비를 끝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짝짝짝, 힘없는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그 소리가 끝나자 김도균이 이번에는 바통을 받고 영어로 말했다.
“일주일 후 경매를 이끌어 주실 분을 모셨습니다.”
김도균이 남자를 보자 그가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분명 말은 잘 부탁한다고 하는데 태도는 전혀 그래 보이지가 않았다. 올백 스타일의 머리부터 과하게 광택이 나는 피부, 파티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정장. 보기만 해도 느끼한 것이 족제비를 떠올리게 했다. 까닥 목례를 하자 사람들은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옆에 있던 다영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느낌이 별로이지 않아요?”
“응. 진짜 별로야.”
“아노 도미니에 있었다는데 느낌이 영……. 여기 직원들도 안 좋아하는 눈치인데.”
아노 도미니는 소더비와 크리스티 그 다음으로 손꼽히는 경매회사였다. 거기에서 꽤 알아주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들은 이야기라도 있어?”
“봐봐요.”
홍콩 지점 직원들이 하나같이 니콜라스를 외면한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네. 오. 정다영 눈치 빨라.”
으쓱 다영이 어깨를 올렸고, 그런 다영이 귀여워서 나는 웃었다. * 저녁에는 간단한 회식이 열렸다. 테이블은 본사, 홍콩 지점, 그리고 팀장 이상급으로 나누어졌다. 모두 참석했지만 니콜라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 책임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니콜라스인지 뭔지 안 왔어?”
“네. 안 온 모양이에요.”
눈치를 살피던 장희정이 답했다.
“일주일 동안 같이 잘해보자고 모이는 자리인데, 주축인 경매사가 안 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컨디션 조절 때문에 그러겠죠.”
나는 백 책임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음료수를 따라주었다.
“컨디션 조절은 무슨. 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밥 먹는 자리인데!”
내일 바로 프리뷰가 시작하기에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태라, 오늘 회식은 식사만 하고 술은 마시지 않는 걸로 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이 싫어 나는 애교스럽게 말했다.
“마시고 마음 푸세요.”
음료수를 마신 백 책임은 화를 삭이면서 물었다.
“호흡은 언제 맞춰보기로 했어?”
김 책임과 장희정은 이번 경매에 보조 경매사로 설 예정이다. 경매가 영어로 진행되기에 경매사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좋았지만, 보조 경매사는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크린에 그림과 가격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본사와 같은 것이었고, 응찰을 확인하는 것도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장희정이 망설이는데 짜증난 김 책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당일 날 맞춰 보쟤요. 그것도 귀찮아죽겠다는 듯이 말하더라구요. 어이가 없어서 정말.”
충격적이다. 뉴욕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 모르겠지만, 보조 경매사와 호흡은 경매에 있어서 정말 중요했다. 같이 경매 현장의 흐름을 읽어야지 무사히 경매를 마칠 수가 있었다. 백 책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미친 자식 아니야?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 건 맞아?”
“호흡을 맞춰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뉴욕이란 큰 무대에서 활동하시던 분이라 우리 회사 경매는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에요.”
김 책임의 마음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다. 하긴 나 같아도 빈정 상했을 것 같다. 우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건너 테이블에 있던 양 팀장이 눈치를 보면서 왔다.
“니콜라스가 심했죠.”
백 책임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도와주러 온 상황인데 도움을 받는 사람이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팀장님께 사과 받으려고 이러는 것 아닙니다.”
“제가 책임자로서 니콜라스을 잘 융화되게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양 팀장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자 백 책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아무래도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여기 오다 보니 규모가 작기도 하고, 첫 경매가 자신이 잘 모르는 고미술품 경매다 보니까 당황한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잘 다독여서 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망상이었다. * 탑 옥션의 회식이 이루어지는 그 시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니콜라스는 누군가와 마주해있었다.
“계속 연락만 주셔서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은 바로 김승재였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김승재가 하드 케이스 서류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열어보시죠.”
가방을 가득 채운 돈다발을 본 니콜라스의 눈이 희번덕였다. 그런 그를 속으로 비웃으며 김승재가 말했다.
“그거면 위약금과 손해배상은 충분히 지불할 수 있을 거예요.”
니콜라스의 표정이 싸해졌다.
“제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경매 당일 그만뒀을 때 이야기죠.”
불만스럽게 니콜라스가 대꾸했다.
“왜 하필 경매 당일이어야 합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래야 경매를 제대로 망칠 수 있지 않습니까.”
김승재가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경매 당일에 경매사인 니콜라스를 그만두게 해 탑 옥션 홍콩 지점의 오픈 경매를 망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한지감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 것임을 그에게 알릴 생각이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상상하니 짜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