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홍콩 경매 (2)2022.01.10.
이번 홍콩 경매 도록을 천천히 살펴보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김 책임이 경악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 피곤해?”
“피곤하긴 한데, 내일 고객들에게 더 잘 설명하고 싶어서 그러죠.”
“한국어 도록도 아니고 영어 도록을 매일 보니까 그렇지. 어차피 대다수가 한국인 고객들이잖아.”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지금 보는 것은 한국어 도록이 아닌 외국인을 위해 준비된 영어 도록이었다. 생각해보면 매일 밤 영어 도록을 밤늦게까지 보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 만도 하다. 그의 말대로 대다수는 본사 탑 옥션을 방문하는 한국인 고객들이었고, 소수의 외국인 고객들은 홍콩 지점에 있는 경매팀이 맡기 때문에 내가 굳이 영어 도록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경매팀 직원으로 프리뷰 현장에 있으면서 고객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떳떳지 못한 기분이 들어, 나는 도무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한 책임은 내일 경매도 안 서잖아.”
내일이 바로 홍콩 지점 오픈 경매일이었다. 곧 끝나 버릴 프리뷰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이 김 책임은 도무지 이해 안 되는 모양이다.
“제가 기획한 경매니까 더 애착이 가서요. 외국인 고객들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첫 프리뷰 치고 외국인 고객 많이 오지 않았어? 확실히 한국 고미술품을 보여주는 자리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더 많은 외국인 고객들이 왔잖아. 홍콩 유명 일간지에도 실리고.”
홍콩 유명 일간지에 탑 옥션 홍콩 지점의 오픈을 알리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양 팀장님이 기자들하고 친분이 두터워서 가능했죠.”
“무슨 소리야. 친분 때문이라면 그렇게 큰 기사를 낼 수가 없어요. 기사 거리가 되니까 가능한 거지. 홍콩 한복판에서 한국 고미술품 경매가 열린다, 좀 특이하잖아. 궁금하기도 하고.”
“기획 자체는 다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죠.”
“생각은 했지만 실현은 엄두도 못 냈지. 해외에 있는 한국 고미술품을 위탁받는 게 어디 쉽냐고.”
이렇게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하는 것을 보니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달콤한 말을 너무 들었더니 어지러운데요?”
“어지러우라고 한 거야.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이제 좀 자자고! 예민한 백 책임님 피해서 널 선택했는데! 이건 매일 밤 공부하고! 차라리 백 책임님하고 방 쓰는 것이 낫겠어!”
“죄송해요. 내일 보조 경매사로 서셔야 하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불 끌게요.”
나는 먼저 도록과 핸드폰을 들고 스위치 앞에 섰다.
“나가서 공부하게?”
“산책할 겸 조금만 더 읽고 자려구요.”
“지독한 녀석……. 그래. 그래라. 난 자야겠다!”
“네. 푹 쉬세요.”
나는 불을 끄고 룸에서 나와 호텔 앞에 있는 산책로 벤치에 앉아 도록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0번 넘게 읽었는데도 단어들이 어려워서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잘 안 들어오냐.”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죠.”
고개를 드니 다영이 언제 왔는지 앞에 서 있었다.
“다영아!”
반가움에 벌떡 일어서는데, 다영이 어깨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왜 그래?”
“허? 왜 그래에?”
한쪽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가는 것을 보니 뭔가 단단히 화가 났다. 이럴 때는 꼬리를 내리고 곰살맞게 굴어야 한다.
“내가 뭐 잘못했어어?”
“홍콩 와서 나한테 연락한 적 있어요, 없어요?”
“계속 붙어 있었잖아.”
“그건 일이잖아요! 어떻게 따로 보잔 말이 한마디 없어요? 일에 빠져서 내 존재는 잊어버렸죠?”
입이 쭈욱 나온 것을 보니 많이 서운한 모양이다.
“일 때문에 계속 붙어있으니까 따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지…….”
“그렇게 말하면, 한국에서도 회사에서 보니까 따로 볼 필요 없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거기까지 생각 못했어. 홍콩 지점 경매가 잘됐으면 좋겠어서 너무 빠져있기도 했고……. 미안해. 잘못했어.”
팔짱을 낀 채 다영이 새침하게 말했다.
“됐어요. 나도 경매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오빠 생각 하나도 안 났어요.”
“서운해서 하는 말이라는 거 아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서운하다.”
그 말에 다영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이제 내가 왜 서운한지 알겠어요?”
“응. 알겠어. 정말 잘못했어. 화 풀어. 응?”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넘어가주는 거예요. 나도 일 욕심은 뒤지지 않으니까.”
빗장이 풀린 다영을 나는 꼭 안아주었다.
“다음에 네가 일 욕심에 나 서운하게 해도 참고 넘어갈게.”
픽 웃으며 다영이 말했다.
“유용하게 쓸 수 있겠네요.”
서운한 감정을 털어내고 우리는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다영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내일 경매 잘되겠죠?”
“니콜라스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지?”
“네. 몰랐는데 내일 오전에 쉰다면서요.”
볼수록 가관이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그의 행태를 다영은 분개했다.
“아니, 경매 당일 오전에 반차를 내는 경매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보통 없지.”
“경매 정말 힘들게 준비했는데 경매사가 준비를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아서 불안해요. 오전 시간 날리면 시간 얼마 없잖아요. 점심 먹으면 1시부터 겨우 연습하잖아요. 4시부터 경매 시작인데, 무슨 생각인지…….”
“그렇지. 장희정 선배는 어때?”
“장 선배도 막 표현하지는 않는데 불안해하는 눈치더라구요. 김 책임님은 어떠세요?”
나는 한숨을 삼키고서 대답했다.
“김 책임님도 더 이상 내색은 안 하지만 호흡을 당일에 맞추려니까 불안해하는 것 같아.”
홍콩 지점에서 여는 첫 경매이기에 모두 불안감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오빠는 괜찮아요?”
“아니. 괜찮은 척하고 있어. 잘 못할 수는 있지만 최악은 아니길 바라면서.”
“저도요. 그런데 한편으로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구는 걸 보면, 실력에 자신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디 그 실력을 내일 홍콩 경매에서 마음껏 뽐내줬으면 좋겠다. 그럼 더 싸가지 없이 굴어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안 그런데요. 여기서 더 하면 엎어버릴 것 같아요.”
금방이라도 엎어버릴 것 같은 똘기 충만한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런 나를 보면서 다영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물었다.
“난 진지한데 도대체 왜 웃어요?”
“진지해서 웃긴 거야.”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에요.”
다영과 투닥거리면서 불안한 기분은 싹 날아갔다. 우리가 예상을 뛰어넘는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다음 날. 고객에게 프리뷰 전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양 팀장이 김도균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말을 들은 김도균의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무슨 일이지? 고객에게 집중해야 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때 정연주가 나에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총괄님이 회의실에서 보자고 하세요. 고객님은 제가 맡을게요.”
“네.”
무언가 일어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고객에게는 웃으며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설명은 제가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나는 고객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프리뷰 전시장을 빠져나와 회의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김도균, 양 팀장, 그리고 보조 경매사인 김 책임과 장희정이 있었다. 모두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힘겹게 김도균이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가 방금 메일로 사직서를 보냈습니다.”
“……설마. 오늘 경매사로 서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겠죠?”
사직서를 낸다고 보통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더욱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면 끝날 때까지는 같이하는 것이 예의다. 아니면 인수인계라도 제대로 해주든가. 목이 메는지 김도균이 마른 침을 삼켰다.
“맞아요. 경매사로 서지 않겠답니다. 올 수가 없대요.”
“이 무슨…….”
육두문자가 나올 상황인데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경매사가 경매 당일에 사직서를 내고, 경매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되먹지 않은 경우는 들어본 일이 없다. 반쯤 넋이 나간 양 팀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후에 와야 하는데 오지를 않아서…… 그래서 전화를 걸었는데도 받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메일을 확인하니 난데없이 사직서가 도착해 있었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김도균이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누구를 올릴지가 중요합니다. 경매까지 2시간 30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의 말이 맞다. 일단 경매사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장희정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 당장 경매사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오픈 첫 경매니만큼 차라리 늦추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호하게 김도균이 고개를 저었다.
“첫 경매니까 더 안 됩니다. 방문한 고객들을 그냥 돌아가게 할 수는 없어요. 양 팀장, 경매팀 직원 중에서 경매사로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스페셜리스트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있지만 경매사를 한 사람은 없습니다……. 경매사는 따로 고용했고, 보조 경매사는 본사에서 지원해주시기로 해서 뽑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임에도 김도균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당장 올 수 있는 경매사는 없습니까?”
“제가 친분이 있는 경매사는 재직 중인 경매사뿐이라…….”
경매사는 그 회사의 얼굴이기에 다른 회사에 재직 중인 경매사를 빌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운 좋게 퇴사한 경매사를 찾는다 해도, 이런 상황을 응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럴 때 서정선이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영어로 경매를 진행한 적은 없다지만 스타 경매사들의 영상을 보고 공부한 만큼 서정선은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혹 빌려올 수 있다고 해도 경매 내용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는 실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매사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와 연주자의 특성, 곡의 흐름까지 다 머리에 있어야 한다. 급하게 데려온 경매사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현재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걸 감수하면서까지 경매사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실수를 감수하더라도 데려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인맥을 활용해서 경매사를 수소문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대신 경매 시작 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요.”
김도균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힘들게 준비한 경매를 이런 식으로 망쳐야 한다는 것이 속이 아린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렇게…….”
무언가 떠오른 듯 김도균이 멈칫했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방법이요?”
양 팀장의 물음에 그는 바로 답하지 않고 나를 봤다. 왜 나를 보지?
“한 책임이 하는 겁니다.”
네……? 저요? 너무 당황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말했다.
“저는 영어를 그 정도로 잘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나는 한 책임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영상 보면서 따라했잖아.”
김 책임의 증언(?)까지 이어지자 나는 더욱더 코너에 몰렸다.
“따라는 할 수 있지만…… 혼자서 하면 제대로 말이 나온 적이 없어요.”
“그건 연습하면 돼요.”
당사자도 아니건만 김도균은 단언했다.
“2시간밖에 안 남아있는데요……?”
“호가 연습을 하긴 충분한 시간입니다. 거기에다 한 책임은 이번 경매를 기획하고, 준비했죠. 경매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어요.”
말하면서 김도균은 점점 확신에 차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기가 확신에 차는 건데……? 여기에 김 책임의 증언이 다시 한번 이어졌다.
“영어 도록 계속 읽어서 표현도 익숙해졌잖아.”
아……. 김 책임! 정말 이러기야? 영어로 경매를 진행한 적은 둘째치고, 준비한 적도 없는 사람에게 경매대에 올라가라고? 나를 지그시 보던 김도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덥석 대답하기 어렵다는 거 이해합니다. 한 책임의 소심한 성격에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겠죠.”
여기서 소심한 건 왜 나오는데!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김도균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경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와서 망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선택하세요.”
정말 화가 나지만 김도균의 말이 맞다. 다른 사람이 이 경매를 망치는 것은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