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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홍콩 경매 (3) (175/226)

175화 홍콩 경매 (3)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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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매 30분 전. 회의실에서 나는 영어로 호가를 연습했다.

16560302160982.jpg“오만 홍콩 달러부터 천 달러씩 올라갑니다. 오만! 오만 천! 오만 이…….”

긴장한 탓인지 혀가 자꾸만 꼬여서 제대로 나오지가 않았다. 내 호흡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져야 하는 장희정도 난감해했다. 신경이 쓰여서 더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김 책임이 말했다.

16560302160986.jpg“잠깐 쉬었다가 하자.”

16560302160982.jpg“네…….”

김 책임이 장희정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갔고,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차라리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이 나았을까? 경매가 조금 익숙해지는 바람에, 이런 압박 상태에서는 극도로 긴장하는 내 성격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다영이 다가와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16560302160982.jpg“다영아……. 도망가고 싶다.”

16560302161001.jpg“그럼 도망가요. 같이 도망가 줄게요.”

다영의 눈이 한 치에 거짓도 없음을 말하고 있어 고마웠다.

16560302160982.jpg“고마워.”

16560302161001.jpg“뭐가 고마워요.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16560302160982.jpg“이렇게 옆에 있어주잖아. 잘할 수 있을까? 아니……. 무사히 할 수 있을까? 호가도 제대로 못하는데……. 멘트는 만들지도 못했어.”

다영이 자세를 낮춰 앉아있는 나와 눈을 맞췄다.

16560302161001.jpg“멘트는 잊어요. 그냥 로트 번호하고 이름만 말하고, 호가에만 집중해요.”

16560302160982.jpg“……알았어.”

16560302161001.jpg“만약에 잘 안 돼도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누가 와도 잘 안 될 상황이었어요.”

16560302160982.jpg“응……. 안 그럴게.”

다영은 말없이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 장희정과 김 책임을 지나 경매대에 섰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다. 대다수가 본사에서 본 고객들이었지만 새로운 얼굴들도 적지 않았다. 새로운 얼굴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고, 내가 처음 경매대에 섰을 때처럼 낯설게 나를 바라봤다. 낯선 걸 넘어서 ‘너 누군데 거기 서있니?’하는 표정이다. 백인도 홍콩 사람도 아닌 내가 경매대에 서있는 그림이 자연스러울 리 만무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겉으로는 차분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길 빌며 나는 영어로 말을 시작했다.

16560302160982.jpg“탑 옥션 홍콩 지점 오픈 경매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서울에서 저를 보신 분들이 있겠지만 제가 낯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탑 옥션에서 경매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장 고객석이 술렁였다. 외국 경매회사가 홍콩에 지점을 갖는 경우는 꽤 있지만, 경매사로 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술렁거리는 가운데도 계속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에서는 아트 21의 서가인과 린 사장도 있었다. 온다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위탁한 작품이 제대로 낙찰되는지 궁금해서 온 걸까? 아니면 니콜라스가 도망갔다는 것이 벌써 소문이 나서 구경을 하러 온 걸까? 나는 애써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16560302160982.jpg“이번 경매는 특별히 한국 고미술품으로 꾸려졌습니다. 홍콩에서 처음 하는 경매인 만큼 많은 분들에게 한국의 미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전해졌길 바라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스크린 위로 로트 1번이 떠올랐다. 아트21 린 사장에게 위탁받은 우봉의 괴석묵란도였다. ‘괴석묵란도’를 영어로 'Orchid on Oddly Shaped Rock'이라고 한다. 연습할 때 난초를 뜻하는 ‘Orchid'가 계속 발음이 꼬였다. 어려운 발음도 아닌데 왜 발음이 꼬이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발음을 최대한 신경 쓰면서 말했다.

16560302160982.jpg“로트 1번 우봉 조희룡의 ‘괴석묵란도’입니다.”

나쁘지 않게 발음이 나와 한고비를 넘겼지만 안도할 수가 없었다. 멘트, 호가 어떤 것 하나 방심할 수 없었다.

16560302160982.jpg“괴석과 묵란의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묵장의 영수’라는 평가가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오세창은 우봉에 대해 ‘묵장의 영수’ 즉, ‘먹을 다루는 세계의 우두머리’라는 평가를 했다.

16560302160982.jpg“시작가는 오만 홍콩 달러입니다. 천 달러씩 올라갑니다.”

현장 고객석을 보는데 아무도 패들을 들지 않았다. 첫 작품부터 유찰되는 건가, 등에 땀이 흐르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뒤쪽에서 104번 패들이 올라왔다. 패들의 주인은 제리 왕이었다. 그는 따스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없는 위로를 주었다. 패들을 든 것도 정말 우봉의 작품을 원해서라기보다 나를 응원하기 위한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그를 보며 외쳤다.

16560302160982.jpg“104번 고객님, 오만 홍콩 달러. 오만 천 달러 없으십니까?”

패들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내정가 오만 삼천 홍콩 달러까지는 갈 수 없는 걸까. 제리 왕이 도와준 의미도 없이 이렇게 유찰된다는 것이 씁쓸했다. 초조한 기분이 들 때 직원석에서 다영이 1번 패들을 올렸다. 이수지의 응찰이다.

16560302160982.jpg“1번 오만 천 달러.”

대표작인 홍매화면 모를까, 이수지는 우봉의 그림에 별로 관심이 없다. 또한 해외이기에 가격이 국내보다 비싼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수지가 응찰하는 것은 다영의 설득이 작용했으리라. 고맙다. 다영아. 그때 현장 고객석에서 76번 패들이 올라왔다.

16560302160982.jpg“76번 고객님 오만 이천 달러.”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그때 제리 왕이 패들을 다시 올랐다.

16560302160982.jpg“오만 삼천 달러!”

나는 재빠르게 76번 고객과 다영을 보았다. 76번 고객은 패들을 다시 들 생각이 없는 것이 보였고, 다영은 설득 중이었지만 어려운 것 같았다.

16560302160982.jpg“오만 사천 없으십니까?”

다영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나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낙찰봉을 두 번 두드리고 낙찰을 알렸다.

16560302160982.jpg“104번 고객님께 오만 삼천 홍콩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현장 고객석에서 예의상 박수를 치는데, 직원석에서는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나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고마웠다. 스크린에 로트 2번인 분청사기가 떠오르자 고마움은 잠시 뒤로한 채 다시 집중했다.

16560302160982.jpg“로트 2번은 분청사기입니다.”

긴장이 조금씩 풀리면서 멘트도 훨씬 자연스럽게 나왔다.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긴다. 동료들이 나를 한마음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직원뿐만 아니라 제리 왕, 이수지 같은 나의 고객까지도……. 비록 나는 경매대에 홀로 서있었지만 혼자가 아니다. 자신감이 붙으니 경매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절벽 끝에 매달린 이 상황을 즐기게 됐다. 어차피 매달린 것 실컷 놀기나 하자, 이런 마음이 됐다. 어쩌다 발음이 이상하게 나와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척 뻔뻔하게 넘겼다. 한 작품 한 작품 아슬아슬하게 내정가를 넘기고 낙찰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미술품인 반닫이까지 왔다.

16560302160982.jpg“로트 102번 반닫이입니다.”

이번 미술품만 낙찰되면 낙찰률 100%다. 낙찰률 70%도 결코 쉽게 나오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낙찰률 100%는 경매사로서 몇 번 마주하기 어려운 숫자였다. ‘정말 될까’라는 마음과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시끄러운 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편안한 척 표정을 만들었다.

16560302160982.jpg“소나무로 제작되었고, 장식에 ‘卍(만)’ 자가 새겨진 전라도 지역의 반닫이입니다. 팔만 달러부터 시작해 삼천 달러씩 올라갑니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현장 고객석의 13번 패들이 올라왔다.

16560302160982.jpg“13번 고객님 팔만 홍콩 달러!”

반닫이의 내정가는 십이만 홍콩달러이기에 경합이 벌어져야 도달할 수 있었다. 직원석에 있는 백 책임이 패들을 올렸다.

16560302160982.jpg“57번 팔만 삼천 홍콩달러!”

그 이후부터는 여러 곳에서 경쟁적으로 패들을 들어 가격이 빠르게 올라갔다.

16560302160982.jpg“구만 오천, 구만 팔천, 십만 달러!”

조금만 더 가면 된다……!

16560302160982.jpg“이제 오천 달러씩 올라갑니다.”

바로 13번 현장 고객이 패들을 들었다.

16560302160982.jpg“13번 고객님 십만 오천 달러!”

질 수 없다는 듯 백 책임이 57번 패들을 올렸다.

16560302160982.jpg“57번 십일만 달러!”

다시 13번 고객이 패들을 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고객을 보면서 손짓을 했다. 망설이던 고객이 홀린 듯이 패들을 들었다.

16560302160982.jpg“십일만 오천 달러!”

한 번만…… 한 번만 더! 간절하게 57번을 보는데 백 책임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현장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16560302160982.jpg“십이만 달러 없으십니까?”

현장 고객석에서 패들을 드는 이는 없었다. 다시 직원석을 보는데 백 책임이 번쩍 57번 패들을 들었다. 앗싸! 넘겼다!

16560302160982.jpg“57번 십이만 달러!”

13번 고객을 보면서 말했다.

16560302160982.jpg“십이만 오천 달러 없으십니까?”

고객은 낮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응찰 의사가 없었다.

16560302160982.jpg“57번 고객님께 십이만 홍콩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로트 102번까지 전부 낙찰됐다. 낙찰률 100%다.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격해진 감정을 누르며 나는 멘트를 했다.

16560302160982.jpg“이것으로 홍콩지점 1회 경매가 끝났습니다. 끝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현장석 고객들과 구경꾼들뿐만 아니라 직원석에서도 박수를 쳤다. 김도균이 직원석에서 일어서자 다영을 시작으로 다른 직원들도 일어섰다. 직원들에게 기립 박수를 받는 경매를 하게 되다니 뭔가 얼떨떨하다. 그때 울먹이는 다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나도 덩달아 울컥했다. 간신히 감정을 다스리고 인사를 한 뒤 경매대를 내려왔다. 해냈다. 내가……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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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떡 일어선 김승재가 매섭게 니콜라스를 노려봤다.

16560302273124.jpg“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경매가 무사히 이루어졌다니! 그것도 낙찰률 100%, 이게 말이나 됩니까?”

자신의 자리가 이토록 쉽게 채워졌다는 것이 니콜라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는 애써 티내지 않았다.

16560302160986.jpg“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16560302273124.jpg“운이 좋았다구요? 당신이 불성실하게 구니까 저 인간들이 눈치채고 미리 준비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한지감 따위가 어떻게 저 일을 해냈겠어요!”

이를 악문 니콜라스가 화를 눌렀다.

16560302160986.jpg“불성실하게 군 적 없습니다.”

16560302273124.jpg“불성실하게 군 적 없다구요? 호흡 맞추는 것도 거절하고, 오늘 오전에 휴가까지 쓰지 않았습니까!”

화를 참지 못하고 니콜라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16560302160986.jpg“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16560302273124.jpg“뭐라구요?”

16560302160986.jpg“애초에 당신하고 약속된 건, 탑옥션 홍콩 지점에 다니다가 경매 당일에 그만두는 것이었고, 난 그대로 했어요!”

16560302273124.jpg“눈치채지 못하게 했어야죠!”

버럭 니콜라스가 소리쳤다.

16560302160986.jpg“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 격과 맞지도 않는 버러지 같은 곳에 가서 하루하루 내 시간을 축냈어요. 당신 때문에! 그러니 약속한 돈이나 내놔요!”

김승재의 눈이 싸늘해졌다.

16560302273124.jpg“아니. 너는 계약대로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너한테 줄 돈 따위는 없어!”

16560302160986.jpg“나는 당신 때문에 경매사로서 남은 인생을 버렸어! 당장 돈 내놔!”

니콜라스를 멱살을 잡고 김승재를 위협하자 김승재는 벨을 눌렀다. 대기하고 있었던 경호원 두 명이 들어와 니콜라스를 떼어내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천천히 김승재가 니콜라스에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봤다.

16560302273124.jpg“돈 먹고 경매에서 장난질 친 거 회사에 들켰을 때, 이미 네 경매사 인생은 끝났어. 내가 돈 칠해서 사람들 입을 겨우 막은 거 기억 안 나?”

김승재가 눈을 희번덕거리는 것을 보고 니콜라스는 겁을 먹고 마른 침을 삼켰다.

16560302160986.jpg“기억……합니다.”

16560302273124.jpg“이용가치가 있어서 대해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네.”

16560302160986.jpg“제…… 제가 잠깐 미쳤습니다. 용서해주세요.”

16560302273124.jpg“은혜를 베풀었을 때 잘했어야지.”

경호원을 보고 김승재가 말했다.

16560302273124.jpg“제대로 걷지 못하게 패줘.”

16560302301667.jpg“네.”

16560302160986.jpg“잘못했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니콜라스가 빌었지만 김승재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경호원 두 명은 니콜라스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몸 곳곳에 피가 터지는 그 모습을 김승재는 더없이 흥미롭게 봤다.

16560302273124.jpg“곧 한지감이 저런 꼴이 될 거야.”

그것이 오늘이 아니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김승재는 믿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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