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기회 (3)2022.01.19.
회장실에서 나오자 수행원이 나를 중역 회의실로 데려갔다. 매일 작은 크기의 회의실만 보다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대기업 회의실을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신기한 것도 잠시, 길어진 대기 시간에 짜증이 올라올 때쯤 김 회장의 비서가 나타나 서류를 내밀었다. 김승재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함구하겠다는 비밀 유지 각서였다. 그 대신 1억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이 덧붙여져 있었다. 소소한 금액에 웃음이 났다.
“전 돈이 필요해서 여길 온 게 아닙니다.”
“김 이사님에게 타격을 주고 싶었다면 언론사로 가면 됐을 텐데요.”
나를 보는 비서의 눈초리엔 의심스러움이 가득했다. 불쾌함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김 이사님에게 타격을 주고 싶은 거지, 삼원그룹에 타격을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정말 그래서 저한테 연락하신 거예요?”
김태하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것은 바로 김 회장 비서의 연락처였다. 어떻게 김승재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까 고민했다. 김승재는 이미 후계구도에서 밀려있었고, 재단 이사직을 맡고 있지만 딱히 애정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금수저를 쥐여 준 김 회장을 흔들기로 했다.
“네. 제가 바라는 건 아주 간단해요. 김 이사님이 제발 저한테 관심을 꺼줬으면 좋겠어서요.”
“이사님에 대한 경제적 원조가 당분간 멈출 겁니다. 그리고 담당 수행원도 붙일 예정이니,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 이사님이 저를 다시 건드리지 않는다면 이 문제가 세상에 나올 일은 없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다시 볼일 없었으면 합니다.”
나가려는데 비서가 말했다.
“너무 당당하네요.”
“제가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죠?”
“애초에 이 관장님과의 관계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내 정말, 기가 막혀서. 나는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관장님과 전 스페셜리스트와 고객과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사귀었던 적도 없구요. 제가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여자 문제로 이 관장님 속을 썩였던 건 제가 아니라 김 이사님이죠.”
나를 떠보듯 비서가 말했다.
“이사님의 여자 문제를 나눌 정도면 이 관장님과 가까웠다는 것 아닌가요?”
“직접 들은 적 없습니다. 자존심 강한 이 관장님이 설마 그런 이야기를 직접 했겠습니까? 김 이사님에 대해 조사하다가 알게 된 겁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김 이사님이 지방대 출신이 미술계에서 설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삼원그룹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똑바로 처리해주세요. 지켜보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해야 할 말을 모두 했기에 속이 시원했다. 오늘 밤에는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김 회장의 앞에 선 비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한지감과 이수지 관장이 사적인 관계를 가진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맞아?”
의문 가득한 김 회장의 눈초리에도 비서는 흔들림이 없었다.
“결혼 전에 한지감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이미 직접적으로 관장님과 연락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혹시나 해서 계속 지켜봤지만, 두 사람이 밀회를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잘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역시나 아버지는 아들 편이다.
“혹시나 해서 한지감을 떠봤지만 별건 없었습니다.”
비밀유지각서에 사인을 받으려고 한지감을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축적한 부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삼원그룹의 정보력이 약하진 않았다. 이수지와의 관계를 물을 때 반응을 보려는 의도가 강했다. 김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저 녀석은 왜 저러냐 말이야! 이혼까지 하고서!”
“한지감은 자신이 지방대 출신인데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것을 이사님이 고까워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푹 한숨을 쉰 김 회장이 손을 훼훼 저었다.
“이유가 뭐든, 수행원 붙여서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한지감 그놈, 강 회장과도 연줄이 있는 놈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자존심 상하지만 도강그룹에 비해 삼원그룹은 영향력이 작았다. 한지감은 강 회장뿐만 아니라 다른 재벌가하고도 연이 깊다. 그런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처리하기가 영 껄끄러워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김도균이 긴장한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결정은…… 했어?”
“네. 했어요.”
나는 숨을 고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크리스티로 가고 싶습니다.”
예상한 듯 김도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스페셜리스트라면 가고 싶은 곳이지. 거기에다 뉴욕이면 두말할 것도 없지.”
“네. 사실 신인작가 후원 경매 때문에 한국에 남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잡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더라구요.”
그는 희미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탑 옥션 총괄으로서는 아쉽지만, 개인적으로는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 런던에 있을 때도 뉴욕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 자주 했거든.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축하인지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고마웠다.
“크리스티 담당자에게는 연락한 거야?”
“아직이요. 말씀드리고 연락하려구요.”
“거기선 네가 최대한 빨리 오길 바랄 거야. 그래도 이번 달 말까지는 있었으면 좋겠다.”
“당연히 그래야죠.”
외국에서 일하는 것 자체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세계 최고라고 하는 곳에서 한 번쯤은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웃되어서 가는 녀석이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워?”
“벌써부터 긴장되는 느낌이어서요. 영어도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잖아요.”
“영어로 경매 진행까지 한 녀석이 웬 투정이야.”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몰려서 한 거죠.”
“몰려서 해낼 수 있으면 그냥도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미술계에서 쓰는 단어는 정해져 있어. 공부할 때야 어렵지만, 웬만큼 알고 나면 괜찮아. 공부하면 돼. 자료 줄게.”
“떠나는 주제에 신세지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그런 나를 보면서 김도균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생각만 많아서. 그게 무슨 신세야. 내가 널 의심한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 그게 언제적 일인데요. 지금은 저 믿어주시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힘들 때 연락해. 거기 적응하기 쉽지 않을 거야. 텃세 심하고, 인종차별도 있어.”
“저도 그게 좀 걱정돼요.”
무리가 있으면 텃세도 있기 마련이지만, 인종차별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내가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동양인이기 때문이었어.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지만, 잘 안 돼도 너무 힘들어하지 마. 너에게는 돌아올 곳이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울컥했지만 나는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 찻잔을 내려놓은 황덕현이 푹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됐네. 못 잡을 것 같긴 했는데…….”
그런 황덕현을 보면서 김도균은 픽 웃었다.
“뭘 또 그렇게 시무룩해?”
“이제 막 탑 옥션이 얼굴이 됐는데 떠난다니까 그렇지.”
“경매사 아니어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잖아.”
“너무 정곡을 찌르네.”
탑 옥션의 대표인 황덕현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것이 당연했다. 스페셜리스트로, 또 경매사로 한지감의 입지는 특출했다. 아쉬운 미소를 띠며 김도균은 말을 이어갔다.
“지감이가 특출하긴 하지. 미술품의 가치를 보는 눈도 정확하고, 기획 경매도 잘하고. 무엇보다 고객들에게 신뢰를 받지.”
“그러니까.”
“하지만 그런 한지감을 알아본 사람이 누구야?”
씨익, 황덕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지.”
“맞아. 형이야. 그리고 나도 있어. 타격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 메워 가면 돼.”
“그래. 네 말이 맞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황덕현은 김도균을 보며 물었다.
“11월 말까지 일한다고?”
“응. 빨리 오라고 하는 걸, 예의가 아니라고 늦췄나 봐.”
“참. 서 팀장은 괜찮아?”
‘서 팀장’이란 단어에 김도균의 얼굴에 구름이 꼈다.
“아니. 안 괜찮아. 맹장 터졌을 때도 표정이 그렇게 어둡진 않았는데…….”
“한 책임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니까…….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덕현은 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 경환과 채령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다영과 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다영아. 배고프지 않아?”
“…….”
대답이 없어 보니 다영의 눈시울이 붉었다.
“왜 그래?”
“그냥, 채령이가 결혼한다니까 기분이 묘해서요.”
“누가 보면 채령이 절친인 줄 알겠다.”
욱한 다영이 눈에 힘을 주고 버럭했다.
“저희 친하거든요!”
뉴욕으로 가기로 결정 난 이후 다영은 예민했다. 여태까지는 이해하면서 참아왔지만, 내가 통보를 한 것도 아니고 함께 상의해서 결정한 건데 너무하다 싶다.
“요새 너무 예민한 거 알아?”
“내가 뭘요…….”
“나 뉴욕으로 가지 말까?”
시무룩하게 다영이 말했다.
“오빠가 안 갔으면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불안해서 그래요. 우리 알고 지낸 뒤로 이렇게 떨어져 본 적 없잖아요. 근데 채령이는 결혼하니까 마음이 복잡했어요. 미안해요.”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이해해. 그런 마음이 들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알겠어요.”
그제야 다영은 싱긋 웃었다. 식당에 도착하자 경매팀 식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를 발견한 정연주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한 책임님, 다영 씨, 여기로 오세요!”
덕분에 우리는 손쉽게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뜨듯한 국물인 갈비탕은 추운 날씨에 제격이었고, 모두 맛있다며 입을 모았지만 나는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서정선이기 때문이었다. 뉴욕에 간다는 걸 말한 이후, 서정선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디고 다영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라도 말해 봐요.’
‘알았어.’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했다.
“팀장님, 갈비탕이 참 깔끔하네요.”
평소의 서정선이라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회사 근처 갈비탕 맛집이랑 비슷하다는 TMI까지 말했을 터였지만, 딱 한마디가 돌아왔다.
“그러네.”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서정선은 입을 닫았다. 덕분에 나는 갈비탕을 반도 먹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경매팀 사람들이 각각 흩어졌다.
“월요일에 봬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나도 다영과 가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쳐서 돌아보니 서정선이었다. 서정선을 보고 다영은 재빨리 말했다.
“아 참. 화장실 들르는 걸 까먹었네요. 다녀올게요.”
“응.”
다영이 자리를 피해주자 그제야 서정선은 입을 열었다.
“한 책임. 미안해. 아까 내가 너무 심했어…….”
“아니에요. 팀장님이 얼마나 저한테 신경을 많이 써주셨는데요. 이해해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많이 서운해. 겨우 경매사 후배가 생겼다고 생각했거든…….”
“알아요. 죄송해요.”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책임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자기에게 더 좋은 길을 선택한 건데.”
“그래도요.”
“한 책임이 잘할 거라고 믿어. 응원할게.”
양손으로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진심이 전해져, 그동안의 서운한 감정마저 사르르 녹았다. * 인천공항. 비행 수속을 마친 나를 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봤다.
“아버지. 왜 그렇게 걱정을 하세요.”
“뉴욕이 너무 멀지 않냐. 인종차별도 심하다 그러고…….”
“잘 피할 거고, 못 견디겠으면 돌아올 거예요.”
마음이 놓이지 않지만 괜찮다는 것을 믿으려는 듯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왜 여자 친구는 보이지가 않아?”
“제가 오지 말라고 했어요. 12월 경매 준비해야 해서 정신이 없기도 하고, 다영이 얼굴 보면 발이 안 떨어질 것 같아서요.”
“내 얼굴 보고는 발이 떨어지고?”
아이 같은 투정에 나는 웃음이 났다.
“그래서 나오지 마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아들 얼굴을 어떻게 안 보냐.”
“저 한 달에 한 번은 들어올 거예요. 전화 자주 드릴게요.”
“그래. 이제 가 봐라.”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떨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되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었다. 세계의 최고라는 곳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