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새로운 꿈 (1)2022.01.22.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한 번에 시야가 다 안 들어올 정도로 넓은 경매 현장, 그곳에서 천여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본다. 경매는 다 마쳤으니 이제 마무리할 때다. 보통 마무리 인사까지 듣기 위해서 남아있는 고객들은 적지만, 오늘의 경매사가 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끝까지 함께했다. 그들을 위해 감사를 전해야겠다. 여유로운 눈길로 경매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며 나는 영어로 말했다.
“오늘 경매에 끝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할 수 있어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은은한 미소로 인사를 하고 경매대에서 내려왔다. 인사를 받으며 경매 현장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히려는 버튼 누르는 소리가 나면서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경매팀에서 함께 일하는, 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메건이었다.
“또 최고가 경신이네.”
“좋은 그림 덕이야.”
경매 사상 최고가를 찍은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다. 4억 5030만 달러, 한화로 약 5000억 원에 낙찰되었다. 오늘 나는 경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쓴 것이다.
“오늘도 낙찰률 90% 넘었네. 좋겠어?”
“그저 그래.”
“재수없어.”
재수없다고 말하면서도 나를 향하는 메건의 눈동자는 끈적했다. 나는 핸드폰을 보면서 애써 그 눈길을 피했다. 뉴욕에서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도 안 돼서 나는 그녀의 고백을 받았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녀는 쿨하게 받아들였고, 곧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는 이런 눈길을 받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남자 친구랑 헤어질 때마다 이런다. 딱히 나에게 정말 마음이 있다기보다, 케이팝을 듣다 한국 드라마까지 섭렵하면서 한국 남자에 대한 이상한 로망이 생긴 모양이다. 현실의 한국 남자들은 전혀 저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무실이 있는 6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는 재빠르게 내렸다. 내 뒤에 바짝 붙은 메건이 부담스러웠지만 모른 척했다. 그때 다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다영아!”
[오빠. 최고가 경신. 축하해요!]
본능적으로 여자 친구와의 통화라는 것을 알아차린 메건은 입을 삐죽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끈적이는 눈빛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쾌재를 불렀다. 뉴욕으로 와서 다영과 자주 전화했고, 한 달에 한 번은 한국으로 들어가 데이트를 했다. 이곳에서 지낸지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다영과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며칠 만에 듣는 한국말이 반가워 괜히 툴툴거렸다.
“평소에는 연락도 잘 안 되다가 이럴 때만 연락하더라?”
[연락이 안 되다뇨. 퇴근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오빠랑 아이스 초코를 마셔준 사람이 누구더라?]
경매 당일에 다영과 초코 음료를 마신다는 징크스는 뉴욕에서도 변함없이 지켜졌다. 오늘 아침에 나는 다영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초코 음료를 마셨다.
[자꾸 이러면 다음번에는 영상통화 안 할 거예요!]
다영의 엄포에도 나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앞으로는 필요없어질 거 같은데?”
[……혹시 헤어지자는 소리예요?]
“그럴 리가.”
[그럼 뭔데요?]
웃음으로 무마하는데, 로버트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계속 피해 다니더니.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다시 전화할게.”
급하게 통화를 마치고 나는 로버트를 쫓아갔다.
“로버트! 로버트!”
분명히 내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방으로 쏙 들어가려는 것을 나는 문틈에 발을 끼워넣어 겨우 막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의자에 앉은 그가 힘없이 말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네. 이렇게 해야겠어요.”
3개월 전부터 나는 계속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으나 로버트는 다시 생각해 보라며 나를 설득했다.
“너는 지금 미술계 최고의 스타야! 네 경매를 하나의 공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저도 알아요.”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이제 전 세계 미술계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최고가 경신, 평균 90% 이상의 압도적인 낙찰률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를 동양인이라고 얕보고 싫어하던 사람들도 그 숫자 앞에서 눈빛이 달라졌다. 이런 부분을 회사는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나를 여러 TV쇼에 출연시키는 등 스타로 만들었다.
“너를 스타 경매사로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이 들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가버리겠다고?”
나는 촉촉한 눈동자로 나에게 호소했다.
“덕분에 회사에서 돈 많이 버셨잖아요. 제가 경매 시작하고 나서 낙찰가 총액도 30% 이상 올랐잖아요.”
끙하며 로버트는 입을 닫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호소로도 먹히지 않자 그는 나를 간파하기로 했나 보다.
“소더비에서 연락받은 거야?”
한국과 달리 미국은 경매사가 경쟁회사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아니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또 그 소리! 뉴욕에서 인정받는 스타 경매사가 왜 서울로 돌아가! 말이 안 되잖아!”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씨익 웃는 나를 보며 로버트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머리를 흩트렸다.
* 나는 회사 후문에서 다영이 나오길 기다렸다. 점심을 먹을 때 다영은 항상 후문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12시가 조금 지나서 다영은 정연주와 함께 후문으로 나왔고, 나는 그런 다영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돌아본 다영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오빠! 왜 여기 있어요?”
“왜긴, 너 보고 싶어서 왔지.”
나는 준비해 놓은 장미 꽃다발을 다영에게 내밀었다.
“짜잔! 받아.”
동그래진 눈으로 다영은 꽃다발을 받으면서 미소 지었다. 예스! 먹혀 들어가고 있어!
“꽃 선물이라곤 도통 안 하던 사람이 웬일이에요?”
만면에 미소를 띤 다영을 보며 정연주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어머. 한 책임님 너무 달콤하다! 여자 친구 보겠다고 뉴욕에서 서울까지 오고!”
“선배님. 그냥 편하게 ‘지감 씨’라고 부르세요.”
넉살 좋게 말하는 나를 보며 정연주는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래요. 이제 한 책임님은 세계적인 스타 경매사인데!”
“이거 좀 쑥스럽네요.”
호의적인 정연주의 반응과 달리 다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봤다. 꽃이란 선물로 잠시 정신없게 환심을 산 줄 알았는데 역시 다영은 날카롭다. 나와 다영을 흐뭇한 눈길로 보던 정연주가 말했다.
“그럼 저는 지 팀장님하고 점심 같이 먹을게요.”
“책임님,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다영이 말렸지만 정연주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두 분하고 같이 있으면 너무 달콤해서 제가 밥을 잘 못 먹을 것 같아서 그래요. 갈게요.”
그렇게 정연주가 가고 나는 다영의 손을 잡았다.
“점심 먹으러 가자! 내가 좋은 데 예약해 놨어!”
“어디 가는데요?”
“따라오면 알아.”
나는 다영을 차에 태우고 10분 거리에 있는 분위기 좋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고급스런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자 다영의 눈에는 의심이 더 짙어졌다.
“솔직히 말해요.”
“뭘?”
“뭐 잘못했잖아요. 그죠?”
“잘못한 거 없는데?”
나는 최대한 평상심을 지키려 했지만, 날카로운 다영의 눈초리에 그만 눈을 피하고 말았다.
“눈 못 마주치는 것 봐. 잘못한 거 있잖아요.”
아…… 벌써 들키면 안 되는데……. 이를 악문 다영이 범인에게 마지막 자백의 기회를 주는 형사처럼 말했다.
“어서 말해요.”
이제 천 명 가까이 되는 눈길이 쏟아져도 끄떡없는 나인데, 다영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따로 없다.
“그게…… 나 회사 그만뒀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다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도대체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녀는 뭐라고 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내가 쭈글해진 상태로 눈치를 봐서인지, 다영은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하고 싶은 일이, 뭔데요?”
“……갤러리 만들고 싶어서.”
‘갤러리’라는 단어에 다영의 화가 폭발했다.
“오빠. 갤러리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우리나라 미술 내수시장 단단하지 않은 거, 오빠가 더 잘 알잖아요. 그런데 매년마다 강남에서 건물을 한 채씩 살 수 있는 연봉을 마다하고, 갤러리를 하겠다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말이나 돼요?”
숨도 차지 않는지 다영은 한 번을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나도 알아…….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 하지만 해보고 싶었단 말이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로버트가 사표를 받아주지 않아서 확정된 게 없었던 상황이었거든.”
나의 말은 다영을 더 화나게 했다.
“사표를 내기 전에 저랑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나 봐요?”
“했지……. 했는데…….”
이렇게 나올까 봐 못했다는 말을 하면 더 화낼 것 같아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씩씩거리던 다영이 벌떡 일어서, 나도 따라 일어섰다.
“앉아요.”
다영의 말에 나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의자에 앉았다.
“화장실 다녀와서 다시 이야기하죠. 이대로면 계속 화만 낼 것 같아서 그래요.”
“응…….”
회사를 오래 다녀서인지 이제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도 아주 수준급이다. 10분쯤 뒤에 다영은 냉정함을 되찾고 돌아왔다.
“자. 이제 말해 봐요. 먼저, 갤러리 운영은 어떻게 할 거예요? 옥션하고 갤러리는 완전히 달라요. 그리고…….”
“옥션 출신을 좋아하지도 않지. 갤러리를 운영하려면 반드시 현재 운영중인 갤러리들과 끈끈한 관계가 되어야 하고.”
옥션과 아트 페어의 출현으로 갤러리 자체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다. 갤러리스트는 이해관계로 인해 옥션과 함께 가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뺏긴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속마음에는 못마땅함이 존재했다. 그런데 옥션 스페셜리스트이자 경매사가 갤러리를 연다? 100% 아니꼽게 본다. 자신의 일을 야금야금 가져가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 안방까지 차지하려는 몹쓸 인간으로 볼 터였다. 그럼 혼자 고고히 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할 터인데, 갤러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고객이 원하는 그림이 자신에게 없어도 건너 갤러리에는 있는 경우가 많다. 가족같은 관계가 되어야 다른 갤러리에서 조건 없이 그림을 빌려준다. 그렇기에,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길드처럼 5-10개의 갤러리가 하나의 그룹을 이룬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갤러리는 생존할 수 있다.
“거기에 대한 해결방안은요?”
“남정숙 회장님을 찾아갈 거야.”
“찾아가면 누가 두 손 벌려 환영해 준대요?”
“래리 가고시안이 레오 카스텔리에게 했듯이 숙이고 들어가야지.”
다영은 한숨을 쉬었다.
“오빠. 강정휘하고는 적대적이고, 임병규 대표하고는 아직도 사이 안 좋잖아요. 남정숙 회장이 오빠를 받아주는 거에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구요.”
일리 있는 지적이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야. 그런데도 하고 싶더라.”
“왜 그렇게 하고 싶은데요? 경매사의 삶에 만족하는 거 아니었어요?”
“좋았어. 사람들의 시선이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고.”
“그런데요?”
나는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경매 현장에서 내가 자만하고 있더라.”
안경에서 본 최고가 이상의 호가를 할 때는 긴장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 호가에 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을 아니 말이다. 안경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완급조절을 잘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점점 자만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경매대에 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스타 경매사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스페셜리스트로만 살아가는 것은 어려웠다. 나를 찾는 경매회사들은 경매사 한지감을 원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런 마음으로 서는 것이 싫어서 이제 다른 도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신인작가후원 경매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생각나더라.”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낸다는 것이 나를 즐겁게 만들었던 때,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피가 뜨거워졌다.
“그래서 갤러리를 열겠다고 생각했다?”
“응.”
다영이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오빠.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응?”
“이상하게 말 안 하는 부분이 있는 느낌이 들어서요.”
안경의 존재에 대해 숨기는 것을 다영이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모양이다. 나는 태연한 척 말했다.
“이런 마당에 내가 뭘 숨기겠어.”
“그건 그렇죠.”
턱을 괸 다영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이왕 하기로 한 것 잘해 봐요.”
“고마워.”
“내가 뜯어 말려도 어차피 할 거니까 허락하는 거예요. 남정숙 회장님과는 언제 뵙기로 했어요?”
“내일 뵙기로 했어!”
신나서 말하는 나를 보면서 다영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마.”
다영의 앞이라서 덤덤한 척 굴었지만 사실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남정숙 회장은 그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