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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새로운 꿈 (2) (180/226)

180화 새로운 꿈 (2)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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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한 표정으로 남 회장은 나를 반겨주었다.

16560304247023.jpg“이게 얼마만이에요, 한 책임!”

16560304247027.jpg“작년에 박도윤 작가 개인전에서 뵈었으니까 1년쯤 되었네요.”

16560304247023.jpg“그렇게 됐네요.”

서도윤 작가는 신인 작가 후원 경매로 인지도를 쌓아 시장에서 알아주는 작가가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남 회장은 박도윤 작가 개인전에 나를 초대한 것이다. 테이블에는 고급스런 커피와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남 회장이 좋아하는 제라늄 화분을 내밀었다. 그녀는 꽃 키우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560304247027.jpg“대표님이 꽃 키우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 샀어요.”

화분을 본 남 회장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16560304247023.jpg“어머! 너무 예뻐라!”

여태까지 봤던 표정 중에 제일 밝은 표정인 것 같다. 뇌물이 잘 먹힌 것 같아 흡족해하는데, 남 회장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스친다.

16560304247023.jpg“이런 것 받아도 되나?”

16560304247027.jpg“만 원도 안 되는 가격인데요. 이 커피랑 쿠키가 그 화분보다 더 비쌀걸요.”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은 사람의 경계심을 낮춘다. 거기에다 ‘이미 그만큼은 당신이 나한테 주었어요.’라는 태도는 마음에 거리낌마저 없애준다.

16560304247023.jpg“너무 고마워요. 잘 키울게요.”

16560304247027.jpg“네. 가끔씩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세요.”

그녀는 비서를 불러 화분을 가져가게 하고는 기분 좋게 커피를 마셨다.

16560304247023.jpg“한국에는 언제 들어왔어요?”

16560304247027.jpg“어제 들어왔습니다.”

혼나기 바빴던 어제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일을 그만두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영을 만나고 혼나고 나서, 아버지를 뵙고 또 혼났다. 다영처럼 아버지도 반포기 상태에서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흔쾌한 허락은 아니었지만 나도 지속적으로 설득한 것이 아니기에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16560304247023.jpg“아주 들어온 거죠?”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놀랐지만 애써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16560304247027.jpg“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요. 역시 대표님은 못 당하겠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16560304247023.jpg“이렇게 저를 만나러 오는 걸 보면 그런 게 아닌가 싶었죠.”

16560304247027.jpg“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갤러리를 열고 싶습니다.”

16560304247023.jpg“…….”

예상했던 대로 남 회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에 물러설 거였으면 여기게 오지도 않았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몇 번이라도 이곳에 다시 올 결심이 되어있다. 일단 오늘의 목표는 갤러리를 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560304247027.jpg“갤러리를 여는 것을 옥션의 연장선상이나 제 유명세를 생각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우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남 회장이 말했다.

16560304247023.jpg“갤러리를 하고 싶다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고, 대다수가 내 도움을 받았죠. 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내가 느낀 게 뭔줄 알아요? 사람의 진심은 현재는 알 수 없다는 거예요.”

16560304247027.jpg“아무리 강렬한 감정이라도 지속되지 않는 것을 ‘진심’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요.”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사람들이 나중에 변명처럼 하는 말이 있다. 만날 때는 진심이었다고. 스치는 바람 같은 감정에 ‘진심’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16560304247023.jpg“맞아요. 한 경매사가 갤러리를 만든다는 것이 진심인지 나는 알 수 없어요. 아니 어쩌면 한 경매사조차 알 수 없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내가 갤러리를 정말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남 회장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16560304247023.jpg“난 한 경매사를 도와주고 싶어요. 예전에 말했죠? 남에게 베푼 만큼 나한테 돌아온다고. 당사자에게 받진 않아도 돌고 돌아서 오더라구요. 또 한 경매사는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람이니까 믿음도 가구요.”

16560304247027.jpg“감사합니다.”

16560304247023.jpg“하지만…….”

긍정적으로 끝을 맺나 싶었는데 ‘하지만’이 들어가면서 달라졌다. 역시 한국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남 회장이 말을 이었다.

16560304247023.jpg“다른 갤러리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에요.”

남 회장이 10개 정도 있는 갤러리의 수장격이라 해도, 다른 갤러리의 허락 없이 나를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16560304247027.jpg“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16560304247023.jpg“…… 갤러리 얼’이라고 알죠?”

16560304247027.jpg“네. 현대 한국화를 놓지 않고 있는, 몇 안 되는 갤러리 아닙니까.”

한국화의 시장이 많이 죽은 상태이기에, 놓지 않은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천천히 남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60304247023.jpg“맞아요. ‘갤러리 얼’에서 김세안 화가와의 전속 계약을 원하고 있어요. 그 일을 한 경매사가 해준다면 다른 갤러리들도 한 경매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16560304247027.jpg“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김세안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다. * 다음 날. 나는 탑 옥션 근처에서 김도균과 커피를 마시며 걸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16560304330647.jpg“어떻게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그만두냐?”

16560304247027.jpg“헌신짝 버리듯이 그만둔 거 아니에요. 그저 그런 마음으로 경매대에 설 수는 없잖아요. 그거야말로 정말 실례죠.”

16560304330647.jpg“그거야 그렇지만…… 서 팀장 쇼크 받았어.”

그만둘 때 가장 서운해했던 사람이 서정선이었지만, 뉴욕에서 내가 이룬 성과를 보고 가장 기뻐한 사람도 서정선이었다.

16560304247027.jpg“찾아뵙고 말씀드려야겠네요.”

16560304330647.jpg“좀 충격 가라앉으면 봐.”

16560304247027.jpg“네. 그럴게요.”

충격 받았을 서정선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16560304330647.jpg“갤러리 만들고 싶다고 했다면서?”

16560304247027.jpg“네. 그래서 형 찾아왔어요.”

음흉한 미소를 짓는 나를 보면서 김도균은 흠칫했다.

16560304330647.jpg“뭐야. 사람 불안하게…….”

16560304247027.jpg“김세안 화가님 어디 계세요?”

‘갤러리 얼’ 담당자와 통화하니 김세안이 어디 있는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다 했다. 예전에 연락처가 남아있기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번호는 바뀐 상태였다. 하긴, 원래 그 번호를 쓴다고 해도 받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김세안은 평소 전화를 꺼두다가 본인이 필요할 때만 전화를 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연락이 올 때는 예외적으로 핸드폰을 켜두기도 했지만 말이다. ‘김세안’이란 단어에 김도균의 표정이 굳었다.

16560304330647.jpg“‘갤러리 얼’이지?”

16560304247027.jpg“네. 어디 계시는지 연락 자체가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16560304330647.jpg“하아. 정말 끈질기네. 왜 아버지를 그냥 안 놔두는 거야? 이제 나이도 드셨고, 지난번에 쓰러지신 이후에 건강이 좋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김도균이 저렇게 정색하는 것 보면 확실히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다. 나 살자고 건강도 안 좋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16560304247027.jpg“죄송해요. 그런 상황인 줄 몰랐어요.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걱정스런 내 반응에 김도균은 살짝 누그러졌다.

16560304330647.jpg“그림만 안 그리면 건강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런데 자꾸 그림을 그리시려고 하니까 탈이지…….”

16560304247027.jpg“화가님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시는군요.”

16560304330647.jpg“평생 그렇게 사셨으니까.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스스로가 존재가치가 없다고 여기시는 분이야. 겨우 건강이 먼저라고 진정시켜 놨는데, 이런 제안이 들어오면 아버지는 또 흔들리실 거야.”

아들인 김도균의 입장에서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16560304247027.jpg“그렇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16560304330647.jpg“아니야. 몰라서 그런 건데 뭐. 거절하는데도 계속 연락이 오니까 나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졌어. 설명하면 되는 일인데……. 미안하다.”

16560304247027.jpg“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하죠.”

갤러리 그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강행할 수는 없었다.

16560304247027.jpg“오늘 들으신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저도 깨끗이 잊어버릴 테니까. 대신 다음에 작가님 건강 괜찮아지시면 식사 한번 해요.”

16560304330647.jpg“그래. 알았어.”

그제야 김도균은 싱긋 웃었지만 곧 미안한 감정이 드는 듯 했다.

16560304330647.jpg“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려면 너도 뭔가 보여줘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

16560304247027.jpg“괜찮아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죠.”

16560304330647.jpg“참. 나한테 좋은 정보가 있긴 한데.”

김도균의 눈이 장난스러움이 가득 차자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16560304247027.jpg“그게 뭔데요?”

16560304330647.jpg“모든 갤러리가 탐낼 만한 정보지.”

16560304247027.jpg“뭔데요. 말씀해 주세요.”

고민하던 김도균이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16560304330647.jpg“내가 거절한 게 미안해서 알려준다. 인천에 호텔이 생겨.”

16560304247027.jpg“……아! 그럼 그림이 필요하겠군요.”

호텔에 가면 룸에나 복도에 그림이 걸려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로비에 가면 설치 미술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사실 유명 작가의 작품일 가능성이 꽤 높다. 이럴 경우 약 100점 내외의 그림이 필요로 한다. 비록 단발적인 수요이지만, 갤러리 입장에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큰 고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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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서를 따돌린 김승재가 싸구려 모텔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른 장소였다. 언제 청소를 했는지 쾨쾨한 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16560304415817.jpg“내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해……!”

분노가 끓어오르자 그는 약을 먹고 애써 자신을 잠재웠다. 비서가 붙고 집안으로부터 경제적 원조가 제한된 이후, 그는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 되었다. 평소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지감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한껏 신경이 예민해졌다.

16560304415817.jpg“버러지같은 놈이 갤러리를 연다고?”

그가 갤러리를 열고 싶어 한다는 말이 미술계에 빠르게 퍼져 갔다. 갤러리스트들은 스타 경매사이자 스페셜리스트의 갤러리 침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그가 어떤 갤러리를 만들지 기대어린 시선을 보냈다. 세계적인 경매사가 돌연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데 모아진 관심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한지감이라면 치를 떠는 김승재는 그것마저 못마땅했다. 겨우 진정이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문을 열어주었다. 방으로 들어온 이는 여자가 아닌 흥신소 직원이었다.

16560304415817.jpg“빨리 빨리 좀 다닐 수 없어요?”

날카로운 김승재의 반응에 흥신소 직원은 움츠러들었다.

16560304415831.jpg“차가 막혀서……. 죄송합니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힌 김승재가 말했다.

16560304415817.jpg“서인범은 찾아냈어요?”

16560304415831.jpg“그게…… 어디로 숨었는지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찾아낸다고 해도…… 뭔가 정보를 제공할 것 같진 않습니다. 한지감의 아버지와 서인범의 관계가 각별한 듯 보여서…….”

16560304415817.jpg“그래서요?”

반쯤 돌아간 김승재의 눈을 보고 직원은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오금이 저리는 느낌이 들어, 당장이라도 이 방을 떠나고 싶었다. 그 공포를 뒤로 하고 직원은 상황을 모면하려 빠르게 읊어댔다.

16560304415831.jpg“서인범의 집에서 오래 일했던 가정부 할머니를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560304415817.jpg“빨리 찾아내야 할 거예요. 2년 동안 제자리를 빙빙 돌았던 걸 생각하면.”

곱씹는 듯한 말투에 직원은 겁을 먹었지만, 꺼내야 하는 말이 있었다. 2년 전 김승재의 경제적 원조가 끊기고 나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흥신소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조사하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흥신소에 많은 돈을 지불했기에 언젠가 돈이 들어올 거라 기대하며 뜨문뜨문 조사를 지속해 왔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도 힘들어졌다.

16560304415831.jpg“저 근데…… 돈은 언제 마련이 되시는지…….”

16560304415817.jpg“돈은 금방 마련이 될 거라고 했잖아. 먼저 그 가정부부터 찾아와……!”

김승재가 멱살을 잡고 직원을 위협했고, 희번덕거리는 김승재의 눈이 직원을 질리게 했다.

16560304415831.jpg“아……알겠습니다.”

그러자 김승재는 멱살을 놓아주었다.

16560304415831.jpg“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16560304415817.jpg“똑바로 해. 알았지?”

16560304415831.jpg“네.”

그렇게 직원은 황급히 쾨쾨한 냄새가 나는 방을 떠났다.

16560304415817.jpg“한지감. 한국에 돌아온 걸 후회하게 해주지.”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는 사실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김승재를 지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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