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새로운 꿈 (3)2022.01.26.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남정숙이 나를 바라봤다.
“김세안 화가님과는 이야기가 잘 되었나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안타깝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작가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어려우시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남정숙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김세안의 전속작가 계약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나를 그룹 안으로 데리고 올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김세안 작가님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른 갤러리들이 관심있을 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뭐죠?”
그녀는 물으면서도 기대를 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난 곧 저 얼굴에 다시 기대가 찰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곧 인천에 호텔이 생깁니다.”
“……200점 정도 그림이 필요하겠군요. 좋은 기회지만, 갤러리당 10점 정도의 그림을 파는 것이 최대치일 겁니다. 호텔 입장에서는 다양한 작가들을 보여주고 싶고, 또 호텔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작품들은 사들이기 어려울 테니까요.”
나도 처음엔 그정도로 생각했다.
“비슷하지만 그 규모가 조금 다릅니다.”
“규모가 다르다구요?”
“아트 호텔을 지향해서 10만 점 정도의 미술품을 구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정숙의 눈이 휘둥그래해졌다.
“10만 점이요?”
“네. 그래서 각 갤러리당 못해도 50점, 크게는 100점까지도 판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호텔 분위기와 맞는 작가들, 작품들이 선정되어야겠지만 말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기회 아닌가요?”
“괜찮다마다요. 아니 괜찮다는 말로 부족하죠. 한 번에 그 정도 그림을 팔 수 있는 기회는 드무니까요.”
“또, 호텔이 소장했다는 것은 작가의 이미지 관리에도 좋죠.”
남정숙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듯했다.
“어떻게 접촉할 생각이에요?”
“담당자분과 오늘 점심에 뵙기로 했습니다.”
“꼭 잘됐으면 좋겠네요.”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 이수지가 태블릿으로 강아지 사진을 훑어보다 말을 꺼냈다.
“나도 강아지나 키워 볼까?”
“강아지요?”
수행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강아지를 키우면 보나마나 그 뒤처리는 모두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지가 산책을 시킬 리도 없었고, 배변 처리를 할 리도 없었다.
“응. 정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하잖아.”
그녀의 표정에 외로움이 스쳤다. 이혼을 하고 나서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연애의 결과가 다 좋지 못했다. 같은 여자이기에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강아지보다는 새로운 분을 소개받으시는 게…….”
“지쳐서 그래. 조건이 맞으면 마음이 안 맞고, 마음이 맞으면 조건이 안 맞고.”
“결혼을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만나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수지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나 정도 급이면 그게 힘들다는 것 알잖아.”
“그거야 그렇죠…….”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한껏 빼입은 김승재가 들어오자 수행원의 눈이 커졌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그런데 관장님은 오늘 약속이 있으셔서…….”
“약속 있다는 말로 나를 피하는 것 보면, 아직도 나를 못 잊었나 봐?”
눈살을 찌푸린 김승재가 이수지를 도발했고, 그 도발에 이수지는 넘어갔다.
“그럴 리가. 시간 조정해 줘. 약속 10분만 미루자. 전남편이 친히 오셨는데 차 한잔 정도는 대접해야지.”
“네. 차 내오겠습니다.”
김승재는 자신의 공간인 듯 편하게 소파에 기대앉더니, 책상에 있는 이수지를 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서 앉지?”
“싫어하는 사람하고 마주 앉을 정도로 비위가 강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 말에 김승재는 움찔했다. 이수지의 수행원이 빠르게 차를 세팅하고 나갔다. 밖에 우람한 비서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언뜻 눈에 보였다.
“이제 목줄에 꽤 익숙해지셨나 봐?”
“목줄이 아니라 비서지. 너한테 수행원이 있는 것처럼.”
이수지가 코웃음을 쳤다.
“너랑 나는 다르지. 나는 내 일을 보조하기 위해 있는 거고, 너는 감시하기 위해 아버지가 붙인거잖아. 한지감한테 보기 좋게 당해서.”
‘한지감’이란 단어에 김승재의 얼굴이 험악해졌고, 이내 표정을 관리하며 반격했다.
“매번 ‘한지감’에게 이용당하는 너보다야 훨씬 낫지?”
“내가 한지감에게 이용당했다고?”
“그 자식이 ‘동성애자’인 척 코스프레한 거에 놀아났잖아.”
움찔했지만 이수지도지지 않고 말했다.
“놀아난 게 아니라 착오가 있었던 것뿐이야.”
“원래 사기 당한 사람들이 본인은 사기 당한 줄도 모르더라구.”
“사기 당한 것에 감사해야 할걸? 그렇지 않으면 너같은 거랑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니까.”
‘너같은 거’라는 말에 김승재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수행원이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관장님, 지금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서요.”
“그래. 알았어. 이야기는 이미 끝나서 말이야.”
그녀는 태연히 옷을 걸치고 가방을 든 다음 김승재를 보고 말했다.
“주인 없는 방에 있을 건 아니지?”
“그럴 리가. 한지감이 돌아왔으니 또 이용당하기 싫으면 긴장하란 말,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승재는 관장실에서 나갔고, 이수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없는 일정 미루느라 수고했어.”
“아닙니다. 이혼한 마당에 왜 이렇게 정기적으로 와서 들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덤덤하게 이수지가 말을 내뱉었다.
“김승재랑 이혼 괜히 했다고 생각하지? 어차피 정략인데 적당히 맞춰주면서 딴짓했으면 되지 않았냐고 생각하잖아?”
바로 부정했어야 하지만, 정곡을 찔린 수행원은 그러지 못했다.
“……아……아닙니다.”
“부정할 것 없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이런 이야기에 난리를 쳤을 이수지인데 어째서 수더분하게 반응하는 건지, 수행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보며 수행원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저는 김 이사님이 조금의 진심이 있으셨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오늘처럼 이렇게 찾아오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조금의 진심은 있었어도 바람은 계속 피웠을 거야. 김 회장 봐. 말로는 아내 없이 못 산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바람피우잖아. 그 집안에서 아내는 그냥 자신의 옆자리를 지키는 존재야.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한 부속품이지. 나는 부속품이 되고 싶진 않았어.”
“…….”
이수지가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 내비쳤던 적이 없었기에, 수행원은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정략결혼에서 사랑을 바란 건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의 존중을 바랐어. 그런데 김승재는 그러지 않았지. 그래서야.”
한지감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자신을 부속품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렇다고 배경으로도 여기지 않았다. 문득 한지감이 돌아왔다는 김승재의 말이 생각나 물었다.
“정말 한지감 들어왔어?”
“네. 뉴욕에서 삶을 정리하고 갤러리를 준비하는 듯합니다.”
“또 한바탕 시끄러워지겠구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수지는 한지감이 어떤 일을 벌일지 기대가 됐다. * 40대 후반의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호텔 유토피아의 담당자라는 것을 나는 단박에 알아보고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한지감입니다.”
“유토피아 호텔 이지형 과장입니다. 한 경매사님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는 나를 보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어갔다.
“뉴욕에 계신 줄 알았는데 한국에 있으시단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리하고 들어왔어요.”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뉴욕에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한데 예의상 묻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왜 갑자기 한국에 왔는지 궁금하시죠?”
“네.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갑자기 결정한 건 아니에요. 한국에 들어와서 갤러리를 하고 싶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이제 왜 그런 기획안을 보내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네.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네요.”
“쉽지 않죠. 기획안을 잘 훑어봤습니다. 김도균 총괄님에게서 저희 호텔 이야기를 들으셨다구요?”
김도균이 런던에 있을 때 이지형은 그곳에서 예술 경영을 배우고 있었고, 런던 박물관에 자주 들러 그림을 감상하다가 우연히 김도균과 알게 되었다.
“네. 놓치고 싶지 않은 좋은 기회라, 바쁘실 줄 알면서도 기획안을 드렸습니다.”
“가격 협상을 맡아주신다면 제안해주신 내용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좋아할 만도 했지만 무언가 조건이 붙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십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내년 초에 있을 호텔 오프닝 파티 때 해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선경매를 하실 생각입니까?”
“네. 맞습니다. 저희 호텔은 고급스런 느낌을 극대화시킨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 주민들 입장에서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죠.”
자선경매를 통해서 얻은 수익을 지역에 기부하고 취약 계층을 지원하거나 문화시설을 만들면 이런 거부감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런 거부감을 자선경매를 통해서 없앨 생각이시군요?”
“네. 자선 경매를 진행할 때 탑 옥션의 서정선 경매사님과 스카이 옥션에 신대한 경매사님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그때 세계적인 작가들도 올 예정이다 보니 한 경매사님이 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갤러리를 운영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왔는데, 그런 큰 행사에 경매사로 서는 것이 어떻게 보일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갤러리를 시작하는 입장이니 경매사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일이 꺼려지는 것도 무리도 아니죠. 하지만 세계적인 작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하면 잃을 것이 더 많은 자리다. 하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조심스레 나를 보던 이지형이 한 발짝 물러섰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나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획안에 있는 부분을 다 실행해줄 수 있습니까?”
“그럼요. 가능합니다. 페이는 넉넉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자선 경매인데 그럴 수는 없죠. 저한테 주실 페이까지 기부해주세요.”
이지형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정말 그래도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저한테도 좋은 기회여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의 말을 듣고 그는 한결 표정이 편해졌다.
“그렇게 느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갤러리 이름을 뭘로 하실 작정입니까?”
“제 이름을 따서 ‘감 갤러리’로 할 생각입니다.”
“좋은 이름이네요. 전속 작가는 있으십니까?”
“이제 만들러 가야죠.”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이지형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웅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았다.
“한 경매사님!”
“잘 지내셨습니까? 작가님.”
“덕분에 잘 지냈죠.”
백하진 작가와 리아 갤러리스에 작업을 한 후 그는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백하진의 언론플레이가 워낙 좋아 독자적인 브랜드를 갖진 못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말을 이어갔다.
“갤러리를 만드신다구요?”
“네. 이름도 정해졌습니다. ‘감 갤러리’입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답했다.
“좋은 이름이네요. 잘될 것 같습니다.”
“정말 잘될 것 같아요?”
“네. 저 거짓말 안 합니다.”
“그럼 저랑 같이하시지 않겠습니까?”
“네? 저를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네. 곧 계약이 끝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백하진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요. 백하진 작가를 제외하고 조 작가님하고만 따로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저하고만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