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민효성 작가 (1) (183/226)

183화 민효성 작가 (1)202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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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진 | 1,000,000,000원 | 민효성, 2020년대 | 없음. ] 내가 원하는 그림이 드디어 나타났다! 특이사항이 없음인 것을 보면, 지금 당장 가격이 폭등할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그림이다. 투자할 가치가 있는 그림!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경환이 또 앓는 소리를 했다.

16560305327861.jpg“봤으니까 됐지? 이제 좀 가자.”

16560305327866.jpg“좀 가만히 있어봐. 괜찮은 그림 봤으니까.”

16560305327861.jpg“으응? 이 그림이 괜찮다고?”

경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림을 뚫어져라 봤다. 민효성의 다른 그림을 보고 싶었지만 그 작품 하나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부스를 지키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16560305327866.jpg“저 그림을 그리신 작가분을 뵐 수 있을까요?”

여자가 난색을 표했다.

16560305327881.jpg“오늘 다른 일이 있어서 못 나왔어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16560305327866.jpg“사고 싶은데 어떤 분이 그렸는지 궁금해서요.”

16560305327881.jpg“아. 네. 효성이가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웃으며 이야기를 듣던 여자는 무심코 나를 빤하게 쳐다봤다. 표정이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빨리 그림을 사고 빠져야겠다.

16560305327866.jpg“그림 계산해 주시겠어요?”

16560305327881.jpg“네! 그럼요.”

겨우 정신을 차린 여자가 카드를 받고 계산을 하려는데 경환이 끼어들었다.

16560305327861.jpg“어? 못 알아보시네. 이 형, 유명한 경매사인데.”

16560305327866.jpg“야. 김경환. 입 안 다무냐?”

나의 협박에도 경환은 이곳에 데려온 복수를 할 요량인지 입을 멈추지 않았다.

16560305327861.jpg“얼마 전까지 뉴욕에서 활동했어요!”

16560305327881.jpg“아……! 한지감 경매사님 맞죠?”

여자는 유명 연예인이라도 본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옥션에서 시선을 즐기는 나였지만 아직도 이런 반응은 민망했다.

16560305327866.jpg“네. 맞아요.”

맞으니까 빨리 계산하고 나 좀 보내주지 않을래요? 나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여자는 계속 놀라워했다.

16560305327881.jpg“1년 전에 뉴욕 갔을 때 경매하시는 것 봤어요! 너무 멋져요!”

16560305327866.jpg“감사합니다.”

16560305327881.jpg“저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16560305327866.jpg“안 될 리가요.”

요즘은 어딜 가나 그렇게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스타 경매사가 된 이후로 이런 일이 부쩍 많아졌다. 예상치 못한 사진 요청에 나는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이젠 배우가 되라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진을 찍은 여자가 다른 할 말이 있는지 눈치를 본다.

16560305327881.jpg“저…… 사진 SNS에 올려도 될까요?”

그나마 예의 있는 사람이다. 사진 찍으면 당연히 올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찍는 입장에서는 올릴 생각으로 찍는 것이니 별 생각이 없지만, 찍히는 입장에서는 말없이 사진이 SNS에 올라왔을 때 당황스럽다. 앞에 나서는 직업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연예인도 정치인도 아닌지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겉으로는 이런 일이 정말 익숙한 사람처럼 해사한 미소로 말했다.

16560305327866.jpg“그럼요. 마음껏 올리세요.”

16560305327881.jpg“감사합니다!”

16560305327866.jpg“그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16560305327881.jpg“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

여자는 초콜릿을 받은 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여자에게 나는 명함을 내밀었다.

16560305327866.jpg“민효성 작가에게 제 명함 좀 전해줄래요? 전화 기다린다는 말도 꼭 해주구요.”

16560305327881.jpg“네! 그럼요!”

‘감 갤러리’ 로고가 박힌 명함을 받은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16560305327881.jpg“어머. 갤러리 여세요?”

16560305327866.jpg“네. 곧 열 예정이에요.”

16560305327881.jpg“저도 명함 한 장만…… 주실 수 있을까요?”

16560305327866.jpg“뭐 어려운 일이라구요.”

나는 명함을 한 장 더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16560305327866.jpg“시간 날 때 친구들이랑 와요. 오늘 설명 잘해주신 보답으로 맛있는 음식 대접할게요!”

16560305327881.jpg“감사합니다!”

16560305327866.jpg“참. 나도 번호 좀 줄 수 있어요?”

16560305327881.jpg“당연하죠.”

경환이 직접 포장을 하고 그림을 홀로 옮기느라 끙끙거릴 때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흩날리며 부스에서 나왔다. 차에 힘겹게 그림을 싣은 경환이 조수석에 타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나를 봤다.

16560305327866.jpg“왜 그렇게 봐?”

16560305327861.jpg“학생 번호는 왜 받아? 업무차라는 변명을 할 생각도 하지 마. 저 학생 그림은 보지도 않았잖아.”

경환은 내가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몰아갔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저 학생을 어떻게 하기라도 한다는 거냐! 욕을 하려다가 오늘 제공해준 노동의 대가를 생각해 간신히 참았다.

16560305327866.jpg“일 맞거든! 민효성 작가한테 연락 안 오면 비빌 구석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16560305327861.jpg“그냥 민효성 작가 번호 알려달라고 하지.”

16560305327866.jpg“요새 누가 개인 번호 막 알려주냐? 그것도 요즘 같은 험한 세상에. 내가 갤러리스트로 자리잡은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경환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16560305327861.jpg“정말 그래서야?”

16560305327866.jpg“그럼 내가 저 어린 학생을 따로 만나서 뉴스에 나올 부적절한 행동이라도 할까 봐?”

내가 눈을 부릅뜨자 경환은 딴청을 피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6560305327861.jpg“아니. 그런 열렬한 반응에 취하고 싶나 했지.”

16560305327866.jpg“열렬한 반응에 취할 거면 뉴욕에서 취했지, 왜 한국에 왔겠냐. 그리고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거기에 나 좋다는 여자들 많았거든? 네가 들으면 깜짝 놀랄 사람도 여럿 있어.”

16560305327861.jpg“에이. 뭐 깜짝 놀랄 사람까지야.”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입술을 얄밉게 달싹이는 것을 보니 열이 오른다.

16560305327866.jpg“셀레나 모레츠, 알지?”

16560305327861.jpg“알지. 작년에 세계적으로 히트친 ‘빛나는 암흑’이란 영화에 출현한 배우잖아! 청춘스타로 완전 유명한!”

생각만으로도 좋은지 경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16560305327866.jpg“그래. 그 사람이 나 만나고 싶어 했거든.”

어이없다는 듯 경환이 웃었다.

16560305327861.jpg“형. 뻥을 치려면 좀 현실성 있게 쳐. 그렇게 예쁘고, 유명하고, 연기 잘하는 사람이 왜 형한테 관심을 보여어.”

16560305327866.jpg“내 경매를 인상 깊게 봤댄다. 둘이서 저녁 먹고 싶다는 걸, 내가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16560305327861.jpg“형. 그냥 밥 먹지 그랬어. 밥 먹는 게 뭐 나쁜 건가?”

16560305327866.jpg“밥 먹는 거 자체는 문제가 없지.”

물론 저녁을 먹고 싶다고 한 것이 그저 팬심의 연장선상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유명한 배우가 단둘이서 밥을 먹자고 하면 이성적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괜한 김칫국을 먹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 김칫국이 현실과 다르다는 것은 만나 보면 확인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문제가 남았다.

16560305327866.jpg“그런데 다영이 입장에서 그 일 알게 되면 기분이 좋겠냐? 너도 생각해 봐. 채령이가 잘생긴 남자배우랑 단둘이 밥 먹는다고 하면, 좋겠어?”

‘잘생긴 남자 배우’라는 말이 나오자 경환이 단번에 정색하며 몸서리를 쳤다.

16560305327861.jpg“정말 싫어.”

16560305327866.jpg“나도 다영이가 그런다면 싫을 것 같아서 거절한 거야. 됐냐?”

16560305327861.jpg“응. 됐어. 오오. 형. 좀 멋지네.”

16560305327866.jpg“너한테 멋지다는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니구요.”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를 출발시켰다.

16560305327861.jpg“형. 솔직히 말해봐. ‘셀레나 모레츠’ 말고 누가 또 있었어?”

16560305327866.jpg“말 안 해줄 거다.”

16560305327861.jpg“쳇. 형이 관심 있을 만한 이야기 해주려고 했는데.”

16560305327866.jpg“내가 관심 있을 만한 이야기를 네가 알고 있을 리가 없지. 됐다.”

약이 오른 경환이 팔짱을 꼈다.

16560305327861.jpg“다영 씨 이야기인데도 관심이 없어?”

16560305327866.jpg“다영이에 대해서는 너보다 내가 훨씬 잘 알거든?”

16560305327861.jpg“아아. 그럼 다영 씨가 회사 후배 이신중 씨에게 고백받은 것도 알겠네에?”

끼익- 차가 도로변에 멈춰 섰다.

16560305327866.jpg“뭐? 다영이가 고백을 받았다고?”

16560305327861.jpg“응. 어머니가 교수시고, 아버지가 장관 출신인 빵빵한 집안이더라구. 한국대 미대 출신인데 강민수처럼 성격이 이상하지도 않아. 좋은 집안에서 잘 자라서 그런지 그늘이 없이 밝고 과감해.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다영 씨보다 4살 어려.”

좋은 학벌, 가족, 과감한 성격, 어린 나이……. 내가 없는 걸 다 갖고 있는 놈일세. 짜증이 나는 것을 애써 참으며 코웃음을 쳤다.

16560305327866.jpg“4살 어리면 서른한 살이네. 만으로는 서른도 안 된 거잖아. 그런 핏덩이를 다영이가 남자로 느낄 리가 없지.”

16560305327861.jpg“이렇게 여자를 몰라요. 요새는 여자들도 어린 남자 좋아해.”

16560305327866.jpg“우리 다영이는 아니거든!”

나는 씩씩거리면서 다시 운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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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저녁. 다영은 초밥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16560305495978.jpg“저녁 아직이죠?”

16560305327866.jpg“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16560305495978.jpg“우리가 연락해야만 만날 수 있는 사이에요오? 섭섭해지려고 하네에.”

평소와 달리 애교스런 태도. 아무래도 경환에게 오늘 일어날 일은 전해들은 모양이다.

16560305327866.jpg“경환이가 말했지?”

16560305495978.jpg“네. 했어요.”

16560305327866.jpg“왜 말 안 했어?”

16560305495978.jpg“굳이 말할 필요 없으니까 안 했죠. 오빠도 그 빨간 머리 여자 말 안 했잖아요.”

빨간 머리 여자는 메건을 뜻하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16560305327866.jpg“어……어떻게 알았어?”

16560305495978.jpg“끈적거리는 눈빛이 화면을 뚫고 나오던데요. 그래서 그 여자 화면에 잡힐 때마다 정말 짜증 났다구요.”

경매 장면만으로 그걸 알아차렸다니, 여자들의 직감은 역시 무섭다.

16560305327866.jpg“일부러 얘기 안 한 건 아니고…….”

16560305495978.jpg“알아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잖아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말라구요.”

싱긋 웃는 다영의 얼굴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식사를 마친 다영이 벽에 기대어 놓은 민효성의 그림을 발견했다.

16560305495978.jpg“이 그림이 오늘 아트페어에서 산 거예요?”

16560305327866.jpg“응.”

16560305495978.jpg“얼마 주고 샀어요?”

16560305327866.jpg“삼백만 원.”

다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16560305495978.jpg“대학생 그림을 삼백만 원 주고 샀다구요? 무슨 상이라도 받은 작가예요?”

16560305327866.jpg“아니.”

16560305495978.jpg“그런데 왜 삼백만 원이나 주고 샀어요?”

16560305327866.jpg“걱정하지 마. 100배 이상 이윤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잔소리를 더 하려다가 다영은 입을 다물더니 뚫어져라 작품을 봤다. 다영이 민효성의 가능성을 본 건가 싶어 나는 괜히 신이 났다.

16560305327866.jpg“괜찮지?”

16560305495978.jpg“괜찮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림체가 익숙해서요. 작가 이름이 뭐예요?”

16560305327866.jpg“민효성!”

미술계는 좁으니 다영이 알 수도 있었다.

16560305495978.jpg“민효성? 들어본 것 같은데…….”

그러다 다영은 중요한 생각이 난 듯 식탁을 탁 쳤다.

16560305495978.jpg“참! 고객들은 만나고 있어요?”

16560305327866.jpg“그럼. 오늘 권미애 사장님이랑 신현숙 대표님도 뵙고 인사드렸지. 이수지 관장님도 곧 뵙기로 했어.”

16560305495978.jpg“잘 하고 있네요. 갤러리는 인맥이 중요하잖아요. 오픈 전시에 올 사람들은 물색해 놨어요?”

16560305327866.jpg“응. 자선 행사라고 하니까 거의 다 와주시겠다고 하더라구. 이제 유명인들을 섭외해봐야지.”

좋은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와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자선행사는 좋은 기삿거리이기에 언론 노출이 잘 되고, 본 목적대로 좋은 일에 돈을 쓸 수도 있으니 일석삼조다.

16560305495978.jpg“진 회장님이 부담스러워하진 않으셨어요?”

16560305327866.jpg“부담스러워하진 않으셨지. 내가 적정가로 사드리겠다고 했거든.”

16560305495978.jpg“지출이 너무 큰 것 아니에요?”

16560305327866.jpg“갤러리하는데 이 정도 지출은 감수해야지.”

지출이 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갤러리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그 지출의 필요성을 알고 있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60305495978.jpg“참. 강 회장님한테는 언제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

16560305327866.jpg“나도 인사드리러 가고 싶은데, 일정 잡기가 힘드네. 요새 바쁘신 거 알잖아.”

16560305495978.jpg“알죠. 요새 도강 그룹이 날개를 얻었더라구요.”

현성이 밀었던 조성오는 재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뒤늦게 현성은 최기석에게 다시 줄을 대려했지만 실패했다. 당선된 최기석은 선거자금을 아끼지 않은 도강 그룹을 팍팍 밀어주었다. 덕분에 현재 도강 그룹은 날개를 단 호랑이가 되면서 현성 그룹이 앞서 나가던 스마트폰 분야까지도 잡아먹고 있었다.

16560305327866.jpg“비서실장님께 말씀은 드렸으니까 곧 연락이 올 거야. 그 전에 저 그림을 그린 작가랑 먼저 봤으면 좋겠다.”

나의 시선이 그림에 닿았다. 빨리 연락이 오길 바라면서 핸드폰을 봤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 일주일이 흘렀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자, 나는 부스를 지키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60305327866.jpg“안녕하세요. 감 갤러리 한지감입니다.”

16560305327881.jpg[아!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16560305327866.jpg“제 명함이 민효성 작가님께 전달이 되었는지 궁금해서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16560305327881.jpg[그게…… 전달을 하려고 했는데요. 효성이가 받지 않겠다고 해서 못 줬어요.]

말하기 망설이는 듯한 태도, 불안정한 목소리.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

16560305327866.jpg“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주실 수 있어요?”

16560305327881.jpg[자세한 건 제가 이야기하기가 좀 그런데…….]

16560305327866.jpg“그럼 대략적으로라도요. 부탁드려요.”

16560305327881.jpg[……효성이……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기로 했어요.]

우리 갤러리를 빛낼 작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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