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민효성 작가 (2)2022.02.02.
[……효성이……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기로 했어요.]
우리 갤러리를 빛낼 작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이유는 말해주기 어려운 거죠?”
[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럼 효성 씨 한번 만나게 해줄 수 있어요? 이대로 놓치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서 그래요.”
[효성이한테 한번 말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고마워요.”
통화를 마치고 나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결정한 것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애가 탔다. 정말 그림을 그리지 않는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은 상태라면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특이사항이 뜨지 않은 것을 보면 당장 가격이 상승하는 그런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그림이기에 나는 더욱 초조했다. * 한정식 집으로 들어온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예약된 룸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는 이런 곳에 오는 것이 낯설었는데, 이젠 익숙하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직원을 나는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이따 일행 올 건데, 신경 써서 안내해 주실래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오늘 이곳에 올 일행이 다름 아닌 민효성 작가이기에 하는 부탁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라, 약속을 잡는 게 정말 힘들었다. 부스를 지키던 학생의 말만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아서 결국 통화를 직접 했다. 30분의 넘는 설득 후에 가볍게 밥이나 먹자는 말로 겨우 설득했다. 그래서 조금의 거슬리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준비해온 봉투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고, 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직원은 손사래를 쳤다.
“팁은 괜찮습니다. 안내는 잘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신경 써 달라고 드리는 돈은 아니에요. 그동안 서빙 잘 해주시는 게 감사해서 인사드리는 거죠. 손이 민망하니까 좀 받아줄래요?”
내 가벼운 말투에 직원은 픽 웃으며 돈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나간 후 나는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2년 동안 한국에서 중요한 인사를 만나야 할 때면 항상 이곳으로 왔다. 그때는 뜨문뜨문 온 것이었지만 최근 갤러리를 준비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이곳에서 만났고, 저 직원의 덕을 많이 봤다. 단순히 음식을 나르는데 무슨 덕을 볼 게 있냐고 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식당에 갔을 때 직원이 친절하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과도한 관심을 내비치면 피곤하다. 이것이 맞추기 쉬울 것 같지만 개개인마다 성향이 다르고, 그것은 곧 적정선이 다르다는 말이기에 맞추기 어렵다. 예를 들어 직원의 적절한 수다를 즐거워하는 손님이 있는 반면, 한마디도 하지 말아 주길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저 직원은 손님을 참 잘 파악한다. 가벼운 대화를 좋아하는 손님인지,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하길 원하는지 말이다. 그 덕분에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불쾌감을 느꼈던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똑똑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효성 작가가 온 것이다. 나는 곧게 몸을 폈다. 문이 열리고 둔해 보이는 검은 안경을 쓴 20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민효성 작가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 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엉거주춤 손을 잡았다. 너드 느낌이 풀풀 난다. 이런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확실한 두각을 나타낸다. 만나 보니 더 확신이 든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네…….”
직원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음식이 세팅되기 기다리며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찾아오기 힘들지 않았어요?”
“괜찮았습니다.”
“어려웠을 텐데 나와 줘서 고마워요.”
“……가볍게 밥 먹는 자리라고 해서 나온 겁니다.”
선을 긋는 그의 행동에서 불편함이 묻어났다. 그때 똑똑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스 타이밍!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이렇게 맥을 끊어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직원이 들어와 음식을 세팅했다.
“맛있게 드세요.”
직원이 나가자 나는 민효성을 보고 말했다.
“편하게 들어요.”
“……네.”
편하게 들라고 해도 불편한 자리가 편해질 리는 없었다. 그는 쭈뼛거리면서 깨작깨작 음식을 먹었다. 그의 긴장이 조금은 풀어지길 바라서 일부러 대화를 하지 않고 나도 식사를 했다. 어느 정도를 먹자 그의 젓가락이 멈췄다. 긴장해서이기도 하지만 입도 짧은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트페어에서 작가님 작품 정말 인상적으로 봤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어서…….”
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어서인가요?”
움찔 놀란 민효성이 나를 빤히 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궁금해서 알아봤어요. 알고 보니 누나분이랑 제 여자친구 고등학교 선배시더라구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한국 미술계는 좁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니 민효성의 누나 민효정은 내가 홍콩에서 고미술 경매를 준비할 때 교토에서 골동품을 위탁해준 바로 그 소장가였다.
“누나는…… 제가 미술을 안 하길 바라는데요.”
누나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다.
“누나 친구분을 통해서 사정 들었어요. 친하게 지내는 형이 세원 갤러리 직원이었다죠?”
“……네. 전속 작가 계약을 갤러리에 잘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형이 갤러리 안에서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해서는 수고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헤드 디렉터와 다른 디렉터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술이나 음식을 사야 하는데, 일반 가게는 택도 없고, 재벌들이 가는 그런 곳을 가야 한다고 했다. 민효성은 미대를 졸업할 때까지 성취해낸 것이 없으면 더 이상 미술을 하지 않겠다고 누나와 약속한 상태여서, 전속 작가 계약이 간절했다. 그래서 알바를 하면서 여태까지 모은 돈 오백만 원을 형에게 건넸는데, 그 후 연락이 끊겼다. 불안한 마음에 세원 갤러리를 찾아갔지만 그만둔 지 오래라는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멍청이 같았죠. 메이저 갤러리에서 신인 작가를 계약할 리가 없는데……. 그것도 저를 원할 리는 더더욱 없는데. 제 욕심에 제가 넘어갔어요.”
“누구라도 흔들렸을 이야기입니다. 그런 실수는 누구나 해요.”
“그래서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려구요. 누나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따라 그렸던 게 문제였어요. 멋진 그림을 그리는 누나도 지금 다른 일하면서 사는데…… 내가 뭐라고.”
그는 목이 메는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상처가 깊은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 그만둘 생각입니까?”
“네. 그만둘 생각이에요. 누나가 아는 분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어요. 차근차근 배우려구요.”
“캔버스가 아닌 책상 앞에서 살아갈 자신 있어요? 자신의 본성을 속이는 일일 텐데요.”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살아남는 데 걸리적거리는 본성이라면 버리면 돼요. 전속 작가 계약해도 먹고 살기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 살 수 방법이 있다면요?”
“그게 뭔데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는 내 말에 강력하게 끌리고 있었다.
“제가 작가님의 생활을 지원하겠습니다. 월에 300만 원씩, 어떠세요?”
파격적인 조건에 민효성은 혹했다.
“300만 원이요……?”
“네. 그 대신 그림을 팔 때는 5:5로 나누셔야 합니다.”
혼란스러워하던 그가 나를 보고 물었다.
“왜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저한테 하는 겁니까? 그 정도 조건이면 얼마든지 더 좋은 화가와 계약할 수 있을 텐데요.”
“그 사람들은 민효성 작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을 유일한 존재로 대한다는 것은 예술가의 자존심을 세워준다. 어느새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바로 받아들이기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가족들을 설득하고 싶은데, 시간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주일 드리면 되겠습니까?”
“네. 그 안에 반드시 답을 드리겠습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 ‘감 갤러리’는 한창 인테리어 공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휑했는데, 조명이 설치되니 제법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인테리어 회사 사장에게 물었다.
“기한내로 완성 가능한 거죠?”
“그럼요.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 건물 주인이시라구요?”
“네.”
“이렇게 젊은 분이 주인이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빨리 상속을 받으셨나 봅니다.”
36살에 강남에 건물을 갖고 있으니 좋은 부모를 만나 상속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6년 전만 하더라도 취업도 하지 못해 편의점 알바를 했다고 말하면 저 사람이 믿을까. 가게에 도둑이 들었고, 그로 인해 발견한 안경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침입했던 그 도둑은 현재 건물 관리인으로 일한다. 인생이란 정말 한 치를 알 수 없는 오묘한 게임이다. 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상속받지 않았어요. 운이 좋아서 생긴 건물이죠.”
“혹시 로또……?”
안경의 존재가 로또급이긴 하다. 아니 로또보다 더 강력한 물건이다. 웃음으로 무마하니 사장은 눈치 빠르게 넘어갔다.
“어쨌든 정말 부럽습니다. 나중에 인테리어 하실 일 있으면 꼭 저희 불러주세요.”
“잘만 해주신다면 다른 분들께 추천도 해드려야죠. 좋은 건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사장의 눈이 희망차게 반짝였다.
“그럼요! 당연히 잘해드려야요!”
“한 대표님.”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김태하가 서 있었다. 운동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몸 때문에 위험을 느낀 인테리어 사장이 뒷걸음질 쳤다.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실로 가시죠.”
“알겠습니다.”
말을 편하게 하라는데도, 김태하는 일하는 중일 때는 꼭 이렇게 존댓말을 썼다. 나는 인테리어 사장에게 가보겠다는 인사를 하고 김태하의 사무실로 가 차를 대접받았다.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봤다.
“다른 데 추천해 달라고 난리치면 어쩌시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하십니까?”
“잘하면이란 단서가 붙었잖아요.”
“다 잘했다고 착각하면서 사는 게 이 세상입니다.”
큰 형 같은 그의 걱정에 나는 픽 웃음이 났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형이 해결해주면 되겠던데요? 아까 그 사람 완전히 겁먹었잖아요.”
“농담이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이 세상에 물색없는 인간들이 많아 노파심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의 정색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진지한 태도를 취했다.
“알았어요. 형.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참. 요새 강정휘는 어때요? 아직도 김승재랑 만나요?”
“뉴욕으로 가신 후로 두 사람이 만나는 횟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요즘은 거의 안 만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갤러리에서는요. 김승재에게 비서가 붙어서 못 간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하지만 안경을 포기하진 않았겠죠.”
강정휘는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그럴 겁니다. 강정휘의 집요함,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김승재는 안경에 대해 모르는 것 같죠?”
“강정휘가 절대 말했을 리 없습니다. 모를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묘하게 찜찜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 오랫동안 품어온 궁금증을 꺼내 놓았다.
“애초에 강정휘는 어떻게 안경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걸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서동효의 뒤를 캐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요. 안경의 전주인도, 인범 아저씨도 안경에 대한 건 외부적으로 최대한 숨겼을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김승재와 강정휘를 계속 예의주시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네.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내일은 면접 있으시죠?”
“네. 기억하고 계시네요?”
“당연하죠.”
내일은 갤러리를 전체적으로 총괄할 헤드 디렉터를 뽑는 날이다.
“제가 갤러리 출신이 아니다 보니, 미대 출신 갤러리스트가 필요해요.”
“좋은 분이 오셨으면 좋겠네요.”
“그러길 바라야죠.”
심 회장 추천으로 오는 것이기에 쉬이 거절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 기대가 되는 한편 부담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