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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안경의 주인 (2) (187/226)

187화 안경의 주인 (2)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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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불빛이 느껴져 정신이 들었다. 깜깜한 곳에서 누군가가 손전등으로 나를 비쳤다. 여긴 어디지? 눈이 너무 부셔서 손으로 가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의자에 온몸이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4년 전 강정휘가 김태하를 시켜 벌인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번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은 그녀가 아닐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강정휘를 제외하면, 나에게 이 정도의 악의를 품은 사람은 김승재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안경의 존재를 알아차린 걸일까? 고개를 돌리고 눈을 찌푸리는데, 한쪽에서 키득거리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손전등이 꺼지고 천장의 조명이 켜지면서 김승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16560306637343.jpg“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

빙글빙글 웃는 표정이 자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표정이다. 나는 애써 덤덤하게 답했다.

16560306637349.jpg“그러게요. 이런 불법적인 일을 벌일 정도로 질이 나쁜 인간인 줄은 몰랐네요.”

‘질이 나쁘다’란 말에 김승재가 위협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명백히 자신이 우위를 차지했다고 여겼는데 내가 자세를 낮추지 않는 것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16560306637343.jpg“그런 객기를 부릴 때가 아닐 텐데? 나는 지금 너를 죽일 수도 있어.”

16560306637349.jpg“죽일 거였으면 내가 지금 살아있지도 않겠죠. 원하는 게 있으니까 살려둔 거잖아요.”

정곡을 찔린 김승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태연한 척 그를 응시했지만, 그가 안경의 존재를 알아차렸을까 봐 초조했다. 그때 눈이 뒤집힌 김승재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주먹으로 나의 얼굴을 연달아 가격했다. 더 때리려는 것을,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말려서 겨우 멈췄다. 위장사고를 일으킨, 검은 모자를 쓴 남자였다. 욱신거리는 고통보다 김승재의 상태가 나는 충격이다. 분노조절장애를 얻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망가졌을 줄은 몰랐다. 품에서 꺼낸 약을 먹고 분노를 가라앉힌 그가 남자를 보고 말했다.

16560306637343.jpg“나가 있어.”

남자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또 나를 때릴까 봐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으르렁거리며 김승재가 말했다.

16560306637343.jpg“안 때릴 테니까 나가 있으라고!”

16560306637373.jpg“네.”

남자가 나가고 김승재가 탁한 눈으로 나를 봤다.

16560306637343.jpg“그딴 객기 부릴 테면 얼마든지 부려봐. 나는 안경만 손에 넣으면 그만이야.”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안경의 존재를 들켰구나. 언젠가 이럴 날이 올 줄 알았다. 정신만 차린다면 지난번처럼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희망의 끈을 잡으며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16560306637349.jpg“무슨 안경을 말하는 거죠?”

16560306637343.jpg“서동효가 썼던 안경 말이야. 지금 너한테 있잖아.”

16560306637349.jpg“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요.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안경을 써본 일이 없어서.”

그 말에 히죽 김승재가 웃었다.

16560306637343.jpg“쓰면 보이지 않는 안경이라는 거 나도 알아. 지금 네가 쓰고 있다는 것도.”

16560306637349.jpg“나는…….”

입을 다물라는 듯 김승재가 손을 올렸다.

16560306637343.jpg“네가 이렇게 뻔뻔한 놈인 줄 알고 준비했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가 태블릿을 내 앞에 내밀었다. 화면을 보고 나는 그만 굳어버렸다. 두 개로 분할된 화면에는 각각 다영과 아버지가 잠들어있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나왔다. 화면 한쪽에 보이는 시계를 보니, 지금 보이는 영상은 녹화된 화면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영과 아버지의 집에 침입해 있는 것이다.

16560306637349.jpg“이런 미친 자식, 당장 그만두지 못해!”

당장 김승재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지만, 의자에 묶여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16560306637343.jpg“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무슨 짓을 할지 말지는 너에게 달렸어.”

나는 이를 악물고 김승재를 봤고, 김승재는 그런 나를 비웃었다.

16560306637343.jpg“그렇게 날 봐도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면 그대로 있든가.”

김승재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16560306637349.jpg“잠깐……!”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다영에게 그동안 안경의 존재를 숨겨왔다. 안경의 존재를 아는 것이 다영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단지 내가 안경을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주변 사람들 모두를 위험하게 만든 것이다. 아버지와 다영을 위험에 처하게 둘 순 없다. 그토록 당연한 사실 앞에서도,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안경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힘겨웠다. 갤러리 오픈을 앞둔 지금, 안경은 나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안경 없이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편의점 알바를 했던, 별 볼 일 없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이 나를 짓누른다. 망설이는 나를 보면서 그는 사악하게 말했다.

16560306637343.jpg“미안하지만 빨리 결정해야 해. 내가 성질머리가 급한 편이라서.”

그는 보란 듯이 핸드폰을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더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 안경에서 얻을 만큼 얻었다. 보잘 것 없던 내가 세계적인 경매사가 되지 않았는가. 갤러리스트로서 성공은 못하더라도, 내 곁의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예고 없이 안경이 나에게 왔으니, 예고 없이 돌아가는 것이 맞다. 마른 침을 삼키고 나는 입을 열었다.

16560306637349.jpg“……손을 풀어줘.”

16560306637343.jpg“무슨 개수작이야.”

16560306637349.jpg“안경을 원한다며. 그러려면 두 손이 자유로워야 해.”

그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이 급해진 내가 소리쳤다.

16560306637349.jpg“손만 풀어주면 되잖아!”

혹시라도 아버지와 다영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조바심이 났다. 고민하던 그가 칼로 손만 풀어주고는 총구를 나에게 갔다댔다.

16560306637343.jpg“수작 부리면 바로 죽는 거야.”

16560306637349.jpg“…….”

김태하에게 납치될 때는 칼이었는데, 이번에는 총이구나. 이런데 등록된 총을 들고 나올 리 없으니 보나마나 밀수한 총이겠지. 총을 보니 더욱 두려워졌다. 총을 마주해서 두려운 게 아니라, 이런 걸 구할 정도로 김승재가 미쳐 있다는 게 더 두려웠다. 수작 부릴 생각은 없다. 다리가 묶여있어도 김승재를 밀치고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몸을 빼낼 수는 있겠지만, 소란스러워지면 밖에 있는 인원이 바로 들어올 것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다영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16560306637349.jpg“안경을 원한다면 당장 아버지와 다영의 집에 있는 사람들 철수시키세요.”

16560306637343.jpg“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당장 총을 쏠듯이 고쳐 쥐는데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16560306637349.jpg“이것 봐요.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내 사람을 풀어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죠? 안전이 보장받지도 못하는데 제가 왜 당신에게 안경을 줘야 합니까?”

약 덕분에 아직 이성이 살아있는지, 그는 멈칫하더니 이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16560306637343.jpg“정다영, 한병수 집에서 지금 철수해. 그래, 지금 당장!”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김승재가 나를 봤다.

16560306637343.jpg“이제 됐지?”

16560306637349.jpg“확실히 나온 게 맞는지 확인을 해야 하니, 나오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세요. 그 인원이 여기까지 오면 그때 안경 벗겠습니다.”

16560306637343.jpg“근데 이 자식이! 진짜 죽고 싶어?”

그가 총구를 머리에 박는데도 나는 굽히지 않았다. 묶여 있어도 안경은 나에게 있고, 김승재는 안경을 어떻게 벗기는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을 지금 최대한 얻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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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306637349.jpg“안경 원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 물건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별 볼 일 없었던 지방대 출신인 내가 이 정도로 성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지길 원하는 것 아닙니까?”

이를 악문 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16560306637343.jpg“내가 볼 수 있게, 여기 올 때까지 라이브로 찍어. 이유는 묻지 말고!”

  * 강정휘가 이를 악문 채 물었다.

16560306721706.jpg“한지감이 유토피아 호텔에 전시될 작품들을 따냈다고?”

16560306637373.jpg“네…….”

부하직원이 덜덜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16560306721706.jpg“그런 큰 건수가 있는데 너는 안 움직이고 뭐했어!”

16560306637373.jpg“아트 호텔이란 이야기는 없어서…….”

16560306721706.jpg“그딴 정보도 없는 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 월급 값도 못하는 버러지 같으니라고!”

16560306637373.jpg“죄……죄송합니다.”

16560306721706.jpg“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도망치듯 나가는 부하직원을 보면서 강정휘는 눈을 부라렸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비서를 호출해 소리쳤다.

16560306721706.jpg“얼음물, 빨리 가져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16560306637373.jpg“네……!”

소리를 질러 힘이 빠진 그녀가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예전 같으면 더 난리를 쳤을 테지만, 최근에 기력이 쇠해져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빠지고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정휘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16560306721706.jpg“들어와.”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 비서가 얼음물을 내려놓자 그녀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진정이 되면서 이성을 찾았다.

16560306721706.jpg“남정숙 대표가 한지감을 받아줬다는 거지?”

16560306637373.jpg“네. 그랬다고 합니다.”

비서는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16560306721706.jpg“한지감이 하는 갤러리, 오픈 리셉션이 언제지?”

16560306637373.jpg“12월 초에 열린다고 합니다.”

16560306721706.jpg“내가 가야겠네.”

16560306637373.jpg“가……가시려구요?”

당황한 비서를 강정휘는 매섭게 노려봤다.

16560306721706.jpg“왜, 나는 가면 안 되나? 문 앞에 ‘강정휘 출입금지’라고 되어 있는 것도 아니잖아.”

16560306637373.jpg“그……그렇죠. 그냥 전 대표님이 워낙 한지감을 싫어하시니까……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16560306721706.jpg“짜증나도 어쩔 수 없지.”

승승장구하는 한지감의 면상을 보는 건 짜증났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 있어 뭐라도 시도할 방법이 2년 동안 막혀있던 차에, 차라리 이게 더 잘된 거란 생각도 들었다.

16560306721706.jpg“그나저나, 요즘 김승재가 왜 조용하지?”

16560306637373.jpg“알아……볼까요?”

2년 전 한지감에게 당해서 집안으로부터 경제적 원조가 제한됐고, 감시자 역할을 하는 비서까지 달리면서 행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김승재 입장에서는 한지감이 죽여도 시원찮을 것이다. 그런데 한지감이 한국에 들어왔는데도 아직 조용하다는 것이 이상했다

16560306721706.jpg“그래, 한번 알아봐.”

16560306637373.jpg“네!”

비서가 나가고 방에 혼자 남은 그녀는 빨리 안경을 찾아올 궁리를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미 시도해볼 만한 방법은 다 시도해봤고, 한지감이라고 그냥 있지는 않을 터였다. 나이도 나이였기에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16560306721706.jpg“이제 그만둬야 할까.”

그녀는 서랍 깊숙이 찔러 놓았던 사진을 꺼냈다. 다른 집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전쟁통에 부모님을 잃었고, 이모뿐이었지만 여자 혼자 몸으로 그녀를 기르긴 힘들었다. 그러다 전쟁에서 딸을 잃은 부부가 그녀를 딸로 들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모는 망설였지만, 더 나은 삶을 원했던 그녀는 가겠다고 했다. 부부는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이 아닌 죽은 딸의 이름을, 아니 호적을 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김정분에서 강정휘가 되었고, 이모는 식모살이를 하면서 먹고살았다.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강정휘의 집안이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6년 전, 수소문 끝에 이모를 만나러 요양병원에 갔다.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반가웠지만, 치매가 걸린 이모의 머릿속에 강정휘의 존재는 지워져있었다. 그때 이모는 서인범의 이름을 부르며 안경을 조심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미쳐서 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사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서동효의 엄청난 성공은 안경의 존재가 있다고 강정휘에게 믿음을 주었다. 서동효가 죽은 상황에서 안경은 서인범이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서인범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았고, 그가 자취를 감추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한병수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서인범이 안경을 쓰지 않았다면 그걸 맡아두고 있는 사람은 한병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반 가정집이 아닌 골동상에 안경을 숨기면 그저 옛날 물건으로 여기면서 넘길 거라는 노림수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김태하를 명품 골동상으로 보내서 어떻게든 안경을 찾아오라고 했다.

16560306721706.jpg“그때는 몰랐지. 그 덜떨어진 인간이 은혜도 모르고 한지감에게 붙을 거라는 사실을.”

노여운 감정이 올라오면서, 사그라들었던 전투욕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16560306721706.jpg“힘들게 왔는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지.”

10년이 더 걸린다고 해도, 살아있는 한은 계속 안경을 쫓을 것이다. * 나는 영상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고, 그는 고까워하면서도 태블릿 영상을 보여줬다. 두 사람의 집에서 나와 차에 타는 것이 보이자 나는 얕은 숨을 뱉었다. 시간이 흘러 그 인원들이 눈앞에 나타나 카메라 화면에 내가 찍히자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눈을 부릅뜬 김승재가 매섭게 말했다.

16560306637343.jpg“이제 내놓을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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