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안경의 주인 (4)2022.02.14.
“안경이 대체 뭐예요?”
그녀가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안경의 존재를 어떻게 안 걸까? 나는 당황했지만 표정 관리를 하면서 시치미를 뗐다.
“무슨 안경?”
“그냥 넘어갈 생각 말아요. 그것 때문에 김승재가 납치한 거잖아요. 이게 오빠가 나한테 계속 숨겼던 거예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난 다영이 날카롭게 말했다. 안경에 대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김승재가 납치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오면 말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안경이 도대체 뭔데요?”
“……물건의 가격과 관련된 정보가 보이는 안경이야.”
다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오빠가 안경 쓴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안경을 쓰면 쓴 사람에게 흡수돼…….”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구요? 판타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나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믿기 어렵겠지. 나도 그랬어.”
“그래서 말 안 한 거예요? 믿기 어려워서?”
“아니. 못 믿을 일이라 해도 넌 내가 말했으면 믿어줬을 거야.”
“그럼 왜 말하지 않았는데요?”
“네가 알면 위험해질 것 같아서……. 그게 착각이라는 걸 이번에 깨달았어. 존재를 알아서 위험한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어서 위험한 거였더라구…….”
나는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다영이 다가와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스스로의 초라함 때문에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실망……했지?”
“뭐가요?”
“여태까지 이룬 모든 것들이 내가 아닌 안경 때문이잖아.”
“이렇게 나를 모르네.”
흔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다영을 보니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왜 울어?”
“속상해서요.”
“뭐가……?”
“마음 잘 숨기지도 못하는 사람이 비밀을 안고 끙끙거렸을 생각하니까 속이 너무 상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영은 나를 꼭 안아줬다.
“하나도 실망 안 했어요. 여태까지 이뤄낸 성과는 모두 오빠가 스스로 한 거예요. 안경이 아니라…….”
“아닌 것 같아. 안경이 없다고 하니까 너무 불안해.”
“있다 없으니까 불안한 게 당연하죠. 그런데 나는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제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거잖아요. 그 안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나는 오빠가 훨씬 중요해요.”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능력과 상관없이 다영은 나를 소중하게 여긴다. 알면서도 불안했다. 혹시라도 내가 실패하면 나를 믿는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내 능력과 상관없이 내 곁을 지켜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다. 비록 안경은 없지만 나에게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제 더 이상 잃은 것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나에게 있었다. * 악을 쓰며 김승재가 말했다.
“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 거야!”
그의 앞에는 보석, 옷, 시계,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고가의 물건들이 깔려 있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안 보이신다는 건지……?”
아침부터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고 안 보인다는 말만 되풀이하니, 비서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비서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안 보인다고!”
“…….”
더 말을 했다가는 김승재의 눈이 뒤집힐 것 같아서, 비서는 입을 다물고 속으로 신세한탄을 했다. 삼원재단에 합격했을 때는 좋아했는데 이런 거지같은 일을 맡을 줄이야. 김승재의 비서로 발령받았을 때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맨날 감시망을 피해 도망가고 버럭버럭 화를 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착란 증세까지 보인다. 짜증을 넘어서 이제 김승재의 존재가 두려웠다.
“왜 안 보이는 거냐고!
비서의 이런 생각 따위는 상관없는지, 김승재는 미친 사람처럼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봤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안경은 전문 지식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는데, 김승재는 그 어떤 전문지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명품 속에서 살았지만, 단지 겉으로만 즐길 뿐 명품의 가치를 파악할 만한 지식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김승재는 밖에 나가서 더 많은 것들을 봐야겠다는 쓸데없는 결심을 하고 지갑을 들었다. 그것이 외출의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비서가 김승재를 막아섰다.
“오늘은 외출하실 수 없습니다. 어제 무단외출하신 걸로 회장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지금 나가시면…….”
김승재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말했다.
“비켜……!”
그 눈빛에 겁을 먹은 비서는 자신도 모르게 비켰다. 김승재가 걸음을 멈추고 비서에게 말했다.
“따라오면 가만 안 둬. 알지?”
섬뜩한 기운에 비서는 그만 굳어버렸고, 김승재는 집을 나갔다. 그제야 비서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아…… 진짜!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어! 내가 사표 낸다. 내!”
* 차를 타고 다영을 회사로 데려다주는데, 그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이해가 돼요. 왜 오빠가 그렇게 이수현 작가한테 확신을 가졌는지 말이에요. 채령이 때도 그렇고.”
“처음에 강정휘 갤러리에서 그 연적이 가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안경 때문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상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나는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런 물건이 있을 줄? 직접 봐도 믿기 어려워.”
“그러니까요.”
“그런데…… 안경은 어떻게 안 거야? 내가 잠꼬대라도 했어?”
“김승재가 전화 와서, 안경을 써도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난리쳐서요.”
“아…….”
김승재, 네가 그러면 그렇지. 머리 나쁜 짓만 골라서 한다.
“폴더폰 왜 안 받냐고 화도 내던데요?”
“내가 그걸 왜 들고 있어. 자기 시다바리인 줄 아나.”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그래도 그러는 바람에 오빠가 솔직하게 털어놨잖아요.”
“그건 또 그렇네.”
“오빠. 전 오빠가 그 일 거절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그 일’은 대통령의 비자금 일을 말하는 것이다.
“알아. 위험하다는 거.”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한다면 많은 부가이익을 누릴 수가 있지만, 정권이 바뀌면 금세 표적이 될 터였다. 양날의 검이다.
“결정은 오빠가 하겠지만, 이제 겨우 위험에서 벗어났는데 또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경제적으로 풍족하잖아요.”
“알지. 그런데 보란 듯이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 안경이 아니라 내 힘으로. 그래서 안 좋은 길인 걸 알면서도 유혹을 떨치기가 힘드네.”
다영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회사 가서 안 피곤하겠어?”
“이 정도는 피곤 축에도 못 들죠.”
나 때문에 다영은 반차를 냈다고 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쉬면 좋은데…….”
“곧 12월이잖아요. 메이저 경매 준비해야죠.”
“한창 바쁠 시기지.”
탑 옥션 앞에 차를 대자 다영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바로 갤러리로 갈 거예요?”
“이러고 갤러리 가기가 좀 그래서, 당분간은 피하려고. 온 김에 형이나 만나고 갈까?”
“그래요. 총괄님한테 연락 한번 해봐요.”
“알았어.”
싱긋 웃은 다영이 차에서 내렸다. 정말 웃음이 난다기보다, 웃음으로 나에게 힘을 주고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나도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다영이 회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도 한참을 그렇게 보다 핸드폰을 들었다.
“형. 저 회사 근처인데 차 한잔 해요.”
* 김도균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납치를 당했다고?”
“네.”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핫초코를 마셨다. 리틀 포레스트의 익숙한 핫초코 맛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가 나를 걱정스런 눈으로 봤다.
“그걸 무슨 오늘 밥 먹은 이야기처럼 해? 아직 충격에서 못 헤어난 거 아니야?”
“헤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앞에 있는 거죠.”
“혹시 모르니까 상담 꼭 받아. 나중에 트라우마 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알겠어요.”
그가 조심스레 나를 살피며 물었다.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설마 바쁘신 분을 그것 때문에 불러냈겠어요.”
“그러면?”
나는 강 회장에게 받은 제안을 말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안한 길을 택하고 싶어요.”
“……유혹적인 제안인 건 확실하지. 권력자가 빽이 되어 준다는데…….”
“형이라면 단칼에 거절했겠죠?”
“글쎄. 그런 유혹적인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나도 흔들렸을 것 같다…….”
답답한지 김도균이 얕은 한숨을 뱉어내, 나는 부러 가볍게 말했다.
“왜 한숨까지 쉬세요. 그냥 딱 안 된다고 말해 주세요.”
김도균이 그렇게 말하면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여기 온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을까?”
“형은 있죠.”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도균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친하게 지내던 후배의 동생을 봤어.”
“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갑작스럽게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의아했지만, 이유가 있을 터였다. 차분하게 김도균이 설명했다.
“그 동생하고 일하는 사람을 알지. 임병규 대표의 변호사거든. 차선우 변호사.”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
“있을 거야. 백하진, 조선웅 작가한테 임병규가 소송 걸었을 때 차선우 변호사가 맡았거든. 패소했지만.”
“아아. 기억나요.”
조선웅을 응원하기 위해 재판에 갔다가 본 기억이 있다. 차 변호사가 나를 상당히 아니꼬운 눈길로 바라봤다. 내가 조선웅을 도와줬다고 생각해서인지 적대적이었다.
“차 변호사의 형이 친한 후배이신 거예요?”
“응. 차선재라고, 정확히는 친한 후배‘였’지.”
“사이가 틀어지셨나 봐요.”
“맞아. 나중에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가 없었어.”
어두운 김도균의 표정 때문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죽었거든.”
움찔 놀란 나와 달리 김도균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작품으로 장난질 치다 원한을 사서 칼 맞았어.”
이런 죽음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본 것이어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각별한…… 사이셨나 봐요?”
“각별했지. 같이 갤러리에 다녔거든. 덕현이 형하고 셋이 삼총사였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선재가 돈에 굉장히 집착했어. 작품의 가치를 속여서 소장자에게 그림을 사는 것도 서슴지 않았지. 나는 그런 선재가 불안했는데, 덕현이 형은 갤러리스트라면 으레 겪는 과정이라면서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
“그런데 그러지 않았군요.”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는 위작을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그림을 가져와서 진짜인 것처럼 팔기까지 했어. 제발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길래 연을 끊었지. 그리고 얼마 후에 그렇게 죽었어.”
“…….”
김도균이 왜 그토록 돈을 쫓는 사람을 불신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 그 일은 깊은 흉터로 남았을 것이다. 상처가 나아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흉터로.
“사람들은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고 입을 모으는데, 나는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 같았어. 내가 선재를 조금 더 일찍 말렸더라면, 더 열심히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더라면 안 죽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착한 사람들은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문제를 돌린다. 김도균이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힘드셨겠네요…….”
“힘들었지. 한국에는 도저히 못 있겠어서, 그래서 도망치듯 런던으로 간 거야.”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너는 죽어도 하지 마라, 그런 교훈적인 협박을 하려고 너한테 이 이야기를 한 건 아니야. 그냥, 그 일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선택을 하든 잊지 않을게요.”
* 토요일 아침 일찍 나는 강 회장을 찾았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던 가요?”
“아니요. 아직 지나지 않았습니다. 회장님께 제 결정을 빨리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지만 다영의 화장술 덕분에 커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겉보기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빨리 찾아왔다는 점을 긍정의 신호로 읽은 강 회장은 기대감을 품었다.
“좋은 소식을 가져왔겠죠?”
“네. 좋은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