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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화 싹 자르기 (191/226)

191화 싹 자르기2022.02.19.

16560307885136.jpg“공짜로 준대도 싫어.”

역시 진 회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들이대면 도망가는 법,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60307885142.jpg“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억지로 해달라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니까.”

16560307885136.jpg“알긴 아네.”

16560307885142.jpg“전속작가님들 그림 사주시면 감사의 의미로 드리려고 전명자 화가님의 ‘나비와 여인’ 시리즈도 구매했는데…… 그냥 다른 분께 팔아야겠네요.”

‘전명자’라는 단어에 심하게 동요한 진 회장은 사무실을 나가려던 나를 붙잡았다.

16560307885136.jpg“정말 ‘나비와 여인’ 시리즈를 줄 거야?”

16560307885142.jpg“네.”

16560307885136.jpg“정확하게 넘버가 어떻게 되는데?”

16560307885142.jpg“Ⅵ요. 2년 전에 제가 19억에 낙찰시킨 바로 그 작품 말이에요.”

시리즈 중에서도 수작으로 뽑히는 작품이었기에 진 회장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16560307885136.jpg“정말 주려고 했어?”

16560307885142.jpg“제가 거짓말하겠어요? 지금 수장고에 있는데 보러 가실래요?”

그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지하 수장고로 그를 데려갔다. ‘나비와 여인’ 시리즈를 본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16560307885136.jpg“이게 어떻게 여기 있어?”

16560307885142.jpg“제가 샀으니까 여기 있죠. 권 사장님이 사고 싶다는 걸 빼놓은 건데…….”

진 회장이 덥석 내 어깨를 잡았다.

16560307885136.jpg“나…… 나한테 팔아. 아니. 두 작가 작품하고 교환하자!”

16560307885142.jpg“두 작가 작품 가격 합해도 이 그림 한 점보다 훨씬 못 미치는 거 아시죠? 교환은 좀 아니지 않을까요?”

이 작품은 최고가 19억인 작품이다. 반면 조선웅은 개인적인 브랜드를 갖지 못한 상태라 재료값이 많이 드는 작품인데도 2억 아래고, 민효성 작가 역시 5백만 원이면 많이 받는 수준이다.

16560307885136.jpg“꼭 그림을 사라 이거야?”

16560307885142.jpg“전시회 그림, 제가 적정가로 구매해서 마이너스인 거 아시죠?”

16560307885136.jpg“다른 사람에게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걸 자네 기 살려주려고 그 정도 선에서 팔아준 거야!”

16560307885142.jpg“알죠. 그래서 저도 이 그림을 권 사장님한테 안 팔았잖아요.”

살살 그를 구슬리며 말을 이어갔다.

16560307885142.jpg“저도 제 작가님들 기 살려주고 싶어서 그래요. 명색이 소속 갤러리 첫 전시인데, 자신의 작품이 없으면 좀 그럴 것 아니에요.”

16560307885136.jpg“알았다. 알았어! 사면 될 거 아니야!”

16560307885142.jpg“그러실 줄 알았어요.”

16560307885136.jpg“여우같은 녀석!”

노여워하는 진 회장을 보면서도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16560307885142.jpg“이렇게 손해 보면서 파는 여우도 있어요?”

16560307885136.jpg“말이나 못 하면!”

씩씩거리던 진 회장이 그림을 보더니 다시 헤벌쭉해졌다. 겉보기에는 내가 손해 보는 장사였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신인 작가라면 유명 컬렉터의 소장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홍보가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른 컬렉터에게 작품을 권할 때 쓰윽 전시 도록을 내밀면서 진 회장도 소장했던 작품이라는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릴 수 있다. * 다음 날. 새벽에 핸드폰이 울려 확인했더니 강 회장의 비서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최기석이 건물을 받을 건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과정인 듯하다. 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16560307885142.jpg“네. 비서실장님.”

16560307931596.jpg[건물, 받으시겠다고 했습니다. 판매 후에 대금을 재단에 기부해주시는 형식을 취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변호사가 설명드릴 겁니다.]

16560307885142.jpg“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비서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16560307931596.jpg[솔직히 이번에 실망스러웠습니다. 회장님께서 한 선생님 편의를 몇 번이나 봐주셨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지는 몰랐습니다.]

16560307885142.jpg“죄송합니다. 저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16560307931596.jpg[앞으로 제가 다시 연락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뚝 끊어졌다. 6년간의 인연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씁쓸함이 밀려왔다. 오늘 처리해야 하는 일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16560307885142.jpg“오랜만에 도자기나 쓸러 갈까?”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아버지의 가게로 했다. 도자기를 솔로 쓸어주니 무거운 감정이 먼지와 함께 날아가 버린다.

16560307885142.jpg“기분 안 좋을 땐 역시 이게 직방이지.”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16560307885142.jpg“오셨어요?”

16560307951152.jpg“오면 온다고 말이나 하지 그랬어. 놀랐다.”

16560307885142.jpg“죄송해요.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여기 오고 싶더라구요. 곧 갤러리 오픈해서 그런가?”

싱거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아버지는 눈을 흘겼다.

16560307951152.jpg“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냐?”

16560307885142.jpg“여기가 제 시작이잖아요. 또 다른 시작을 하니까 생각이 날 수도 있죠.”

관리 대장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자꾸 나를 힐끗거렸다.

16560307885142.jpg“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16560307951152.jpg“할 말은 무슨…….”

16560307885142.jpg“안경 때문에 그러시죠?”

‘안경’을 벗었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말씀드렸다. 위험한 상황이 있었다는 말 대신, 이 물건이 가져올 위험한 상황들이 무섭다고 했다. 가만히 듣던 아버지는 나지막이 ‘잘했다.’ 한마디를 하셨다.

16560307951152.jpg“……아니다.”

16560307885142.jpg“맞잖아요.”

16560307951152.jpg“여기 온 것 보면 불안한 것 아니냐?”

이곳에 와서 도자기를 솔로 쓸 때면 내 마음이 불안한 상태였기에, 아버지는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16560307885142.jpg“네. 불안해요. 안경 없이 잘 해낼 수 있을지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16560307951152.jpg“그럼 왜 왔어?”

16560307885142.jpg“오늘 강 회장님과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거든요. 도움 많이 받았던 분이라 기분이 좀 그래서요. 그뿐 아니라, 이따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해서 마음의 안정을 취하려고 왔죠.”

가볍게 말하는데도 아버지 얼굴의 그늘은 지워지지 않았다.

16560307951152.jpg“……들어보니 첫 전시에 돈을 많이 썼다고 하던데, 괜찮은 거냐?”

16560307885142.jpg“다영이가 또 전화했구나. 그렇죠?”

16560307951152.jpg“그랬다.”

뉴욕에서 한국으로 잠깐 들어왔을 때 다영을 아버지에게 소개했다. 다영이 혼자 있는 아버지가 걱정된다면서 먼저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였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아버지가 몰라도 되는 내용까지도 전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6560307885142.jpg“하여간 정다영…….”

16560307951152.jpg“다영이한테 뭐라 하지 마라. 얼마나 걱정이 되면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겠냐.”

16560307885142.jpg“아버지, 제가 아들이거든요? 왜 남의 딸 편을 들고 그러세요.”

16560307951152.jpg“남의 딸이 더 살가워 그런다.”

그건 사실이라 나는 멈칫했다.

16560307885142.jpg“아버지도 은근히 팩트 폭행 심해요.”

시간을 보니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16560307885142.jpg“아버지. 저 가 볼게요.”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16560307951152.jpg“난 네가 그깟 안경 없어도 잘할 거라 믿는다. 그러니까 기 죽지 마라.”

16560307885142.jpg“저 기 안 죽어요. 누구 아들인데요.”

싱긋 웃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는 마음을 놓으신 것 같았다. 덕분에 기분 좋게 차에 올라 출발할 수 있었다.

16560307885142.jpg“이제 강정휘를 만나러 가 볼까?”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는 강정휘였다. 아직 나를 찾아오진 않았지만, ‘감 갤러리’ 오픈 리셉션에 와서 호시탐탐 안경을 노릴 것이다. 물론 초대장을 가진 사람들만 들어오도록 하는 방법이 있지만, 강정휘는 갤러리스트 선배라 입구에서 강짜를 부리면 안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16560307885142.jpg“미리 싹을 잘라야지.”

강정휘를 마주하는 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오늘 그동안의 시달림을 갚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슬쩍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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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0308037589.jpg“이러시면 안 됩니다.”

강정휘의 비서가 온몸으로 막는 걸 뚫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강정휘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 빈정거렸다.

16560308037593.jpg“유명한 한지감 경매사가 여기 웬일이실까?”

16560307885142.jpg“대표님을 뵙고 싶어서 이렇게 왔죠.”

16560308037593.jpg“어쩌나? 내가 아무나 만나주는 사람은 아닌데.”

16560307885142.jpg“안경에 관한 일이라면 관심이 있을 줄 알았는데요?”

멈칫한 강정휘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말했다.

16560308037593.jpg“나가.”

비서가 나에게 말했다.

16560308037589.jpg“나가세요. 이러시면 보안직원 부르는 수밖에 없어요.”

16560307885142.jpg“나 보고 나가라는 게 아닐 텐데요.”

16560308037589.jpg“네……?”

비서를 보고 강정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16560308037593.jpg“나가라는 말 안 들려!”

16560308037589.jpg“네…….”

그제야 비서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걸 알고 서둘러 나갔다.

16560308037593.jpg“안경이 뭐 어쨌는데?”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강정휘를 스윽 피하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16560307885142.jpg“천천히 앉아서 이야기하자구요.”

느긋한 태도에 강정휘는 약 올라 하면서도 소파에 앉았다.

16560308037593.jpg“빨리 말해봐.”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동안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었다.

16560307885142.jpg“안경 때문에 저희 ‘감 갤러리’ 오픈 리셉션에 찾아주실 것 같아서 이렇게 왔어요.”

16560308037593.jpg“알았으니까 빨리 말해 보라구!”

16560307885142.jpg“성질 급한 건 여전하시네요.”

평소와 다르게 느릿느릿 말하자 강정휘가 나를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16560308037593.jpg“야!”

나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16560307885142.jpg“발품 팔아서 친절하게 원하는 정보를 말해주러 온 사람에 대한 대표님의 태도가 기껏 이 정도인가요? 이러면 진짜 말해주고 싶지 않은데.”

그 말에 강정휘는 자세를 낮추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16560308037593.jpg“……미안, 내가 흥분했어.”

16560307885142.jpg“사과가 가볍네요. 그동안 내가 당한 일들이 적지 않은데. 괜히 온 건가?”

내가 일어서려 하자 강정휘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16560308037593.jpg“내……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16560307885142.jpg“뭐를 그렇게 잘못하셨는데요?”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형식뿐인 사과라도 받고 싶었다. 강정휘 때문에 6년 동안 시달리지 않았는가. 순간 노여워하는 눈빛이 스쳤지만 그녀는 이내 훌륭한 연기력을 발휘했다.

16560308037593.jpg“안경 차지하겠다고 6년 동안 한 경매사를 계속 괴롭혔잖아. 내가 그러면 안 됐는데,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안경을 원하지 않을 터였다. 원맨쇼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16560307885142.jpg“그런데 저는 이제 경매사가 아니라 갤러리스트인데, 대표님과 같은.”

훌륭한 연기력으로도 커버할 수 없었던 분노가 그녀의 눈에 스쳤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16560308037593.jpg“그래. 갤러리스트지. 미안해. 내가 말이 헛나왔어. 이제 한 대표네.”

역시 강정휘다. 저 연기력을 볼 때마다, 배우를 했으면 참 잘했을 텐데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6560308037593.jpg“이제…… 말해줄 수 있어?”

16560307885142.jpg“그럼요. 말씀드려야죠. 안경, 이제 저한테 없어요.”

벌떡 일어선 강정휘가 소리 질렀다.

16560308037593.jpg“그럼 누구한테 있는데?”

16560307885142.jpg“김승재가 가져갔어요.”

16560308037593.jpg“그걸 왜 김승재한테 줘! 재벌로 태어난 거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놈인데!”

그 말에 나는 간신히 참았던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16560307885142.jpg“하하하! 하하하!”

16560308037593.jpg“지금 감히 웃어?”

16560307885142.jpg“아.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안 웃을 수가 있어야죠.”

타락할 대로 타락한 강정휘의 눈에도, 김승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6560307885142.jpg“덕분에 잘 웃었으니 쓸 만한 정보 하나 말해 드릴까요?”

16560308037593.jpg“……뭔데?”

16560307885142.jpg“김승재가 안경을 쓰긴 했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예요. 방금 말씀하신 대로, 다이아몬드 수저 쥐고 태어난 거 빼고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강정휘의 눈에 욕망이 가득차서 넘실대더니 이내 나를 의심했다.

16560308037593.jpg“그런 걸 왜 말해주는 거야?”

16560307885142.jpg“이제 지켜보는 입장이라 재밌을 것 같아서요. 대표님이 안경을 빼앗을지, 아니면 거래를 할지 궁금하거든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재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짜릿할지 기대가 된다.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강정휘가 나를 막아세웠다.

16560308037593.jpg“안경 어떻게 벗는지 알려줘.”

16560307885142.jpg“에이. 그 정도는 직접 알아내셔야죠. 그 정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잖아요?”

그 말을 남기고 나는 대표실에서 나왔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감 갤러리’ 오픈 리셉션이 기다려졌다. 안경이 없는 나의 새 역사가 불안하긴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지 않던가.

16560307885142.jpg“보란 듯이 기회로 만들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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