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오픈 리셉셥(2)2022.02.23.
“꼭 잘돼야 할 텐데요. 조선웅 작가는 브랜드가 약해서.”
자기가 뭔가 브랜드가 약하다 뭐다 입을 놀리는 거야. 이러면 안 되는데, 욱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아. 진짜 확 엎어? 아니지. 여기서 발끈하면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 되기 십상이다. 이럴 땐 우아하게 엿을 먹여야지.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브랜드가 약한 게 브랜드만 있는 것보단 낫죠. 컨텐츠가 없으면 브랜드도 없는 게 되잖아요.”
누가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이 백하진 작가를 가르킨다는 것을 알아차린 정 회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참. 백하진 작가님은 잘 계시죠?”
내 말의 뜻을 잘 알기에 그녀는 알굴이 굳어졌지만 경련을 일으키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잘 있죠.”
“재계약하셨나요?”
“이제 해야죠.”
슬쩍 눈을 피하는 것이, 아직 재계약을 결정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지난 4년 동안에도 작품은 조선웅 혼자 다 만들었다. 정 회장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선뜻 계약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조선웅을 엄청 잡았다는 것을 신재범의 인맥을 통해 전해들었다. 그가 없이는 백하진의 작품은 나오지 않고, 백하진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걸 구현시킬 다른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좋은 자리에서 굳이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였다. 그래. 어쨌든 내가 뺏어간 입장이니 이쯤해서 물러서기로 하자.
“그럼 저는…….”
“너무 상도덕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조선웅 작가가 지금 누구 때문에 작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그럼 나도 솔직해지지 뭐.
“조선웅 작가 자신이죠.”
“뭐라구요?”
기가 차다는 듯 노려보는 정 회장을 보면서 나는 태연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 그편이 더 열이 받을 테니까.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잖아요. 그게 바로 작가가 하는 일이죠. 매일 룸살롱이나 가면서 이름만 걸어놓는 누구랑 다르게요.”
“지금 말 다 했어요?”
“아니요. 다 못했습니다. 조선웅 작가에게 기회를 주신 것은 저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임병규 대표랑 사이가 안 좋아서라고 하지만, 어쨌든 기회를 주신 건 맞으니까요.”
혹시나 정 회장이 치고 들어올까 나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죠. 언론매체에는 백하진 작가만 노출시키셨지 않습니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조 작가는 달변가도 아니고, 백 작가처럼 인지도도 없어서…….”
내가 너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싹둑, 그녀의 말을 잘랐다.
“선수끼리 왜 이러십니까. 언론에 조 작가님이 노출되고 하나의 브랜드를 갖게 되면 백 작가 뒤치다꺼리를 안 할 테니까, 그래서 그러신 거잖아요.”
작가로 이름을 올려주고 거기에 조수보다 많은 돈을 주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조선웅을 이용했던 임병규와 같은 짓을 한 것이다. 엄청난 모욕을 당한 듯 정 회장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렇게 나를 모욕하고 ‘감 갤러리’가 자리 잡길 바라요?”
“어느 정도여야 제가 그냥 넘어가죠.”
“가만…….”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이라니 너무 흐름이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무언가를 본 정 회장이 멈칫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백하진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저벅저벅 이쪽으로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언론 플레이에 특화된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한 경매사님, 아니 한 대표님. 갤러리 여신 것 정말 축하드립니다!”
“바쁘실까 봐 연락드릴 생각을 못했는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던 바쁘지 않든, 연락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사람이 큰일을 겪으면 좀 변할 줄 알았더니, 2년 동안 이름만 걸어놓은 채 매일 룸살롱 다니는 건 똑같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기 힘들다고 속으로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겉으로는 정말 반갑다는 듯 악수를 했다. 악수를 마친 백하진의 시선은 정 회장에게 옮겨갔다.
“대표님 여기 계셨네요? 연락이 잘 안돼서 걱정했어요.”
“일이 많아서요.”
정 회장은 곤란한 듯 백하진의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명확해졌다. 그동안 정 회장이 백하진의 연락을 씹었던 모양이다. 이곳에 정 회장이 왔다는 연락을 듣고 백하진은 급하게 온 거고. 하긴, 똥줄이 타겠지. 4년 전에 백하진은 기자회견으로 임병규를 폭로했다.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쨌든 백하진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된 임병규는 화가 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백하진이 맨날 룸살롱에 가고, 실제로 작품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조선웅이며 만든 사람도 조선웅이라는 것이 업계에 널리 알려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업계에 한한 것으로, 대중들은 모른다. 그러니 다른 메이저 갤러리에서도 이제 백하진은 조선웅이란 전제조건이 붙을 때 가치가 있다고 인식하게 됐다. 그런 상황이기에 백하진은 지금 정 회장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물론 작은 갤러리에 그가 가겠다고 하면 두 손 벌려 환영하겠지만, 그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이 상황이 우스워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는데 남정숙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 대표님.”
“네!”
“소개시켜드릴 분이 있는데.”
“네. 가겠습니다!”
그 말이 너무 반가워서 목소리가 크게 나갔다.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사도 안 하고 쌩하니 가고 싶었지만, 나는 ‘감 갤러리’의 주인인 만큼 예의를 지켰다.
“그럼 오붓하게 대화 나누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고개를 돌리는데 정 회장이 확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많이 노려봐라. 나는 간다.
*
“하하하.”
숨죽여서 웃는 나를 남정숙이 나무라듯 봤다.
“좀 더 참지 그랬어요. 리아 갤러리, 메이저 갤러리예요. 분명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 텐데.”
“알죠. 그래서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 찌르시더라구요. 그런데 이야기가 다 들렸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거의 다 들었을걸요?”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부담스럽지 않게 남정숙이 조언했다.
“조선웅 작가 빼앗겨서 정 회장이 왔다고 아까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렸어요.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사람들 안 듣는 척 다 들어요.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요.”
“네.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저 불러내신 거예요?”
“그건 아니구요. 진짜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요.”
고개를 저으며 남정숙이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엔 60대 초반의 남자가 서있었다. 턱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그는 브라운 계열의 정장으로 중후한 매력을 뽐냈다. 그가 누군지 나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맞죠?”
“그래요. 맞아요. 눈 크게 뜨지 말고 최대한 차분하게 행동해요. 과한 리액션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이라.”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고 차분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에게 다가간 남정숙이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했다.
“최 관장님.”
그가 고개를 돌려 남정숙과 나를 봤고, 차분하게 나는 인사했다.
“최성렬 관장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 갤러리’ 한지감입니다.”
미술관에 그림을 파는 것은 갤러리스트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미술관에 작가의 작품이 소장되고 아니고에 따라 작가의 가치, 작품의 가격이 달라진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그림이 소장되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무표정한 최 관장의 얼굴 때문에 나는 긴장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아무래도 국립 미술관에 소속된 사람들은 갤러리스트를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레오 카스텔리가 살아있었을 때 그의 고향의 미술관에서는 그를 명예관장으로 임명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당시 관장이 ‘상인은 신전에 들어올 수 없다.’며 반대했다 미술관과 갤러리의 기능이 다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만, 갤러리스트로서 씁쓸한 것은 사실이다. 그때 최 관장이 나를 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영광일 것까지야. 최성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건실한 젊은이라고 남 회장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남 회장님이 좋게 봐주신 거죠.”
남정숙에게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자신의 중요한 인맥을 공유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아직도 미술계는 계약서보다 관계가 더 힘을 발휘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소개를 시켜주는 것은 보증을 서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남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남정숙이 자리를 떠나고 최성렬이 말했다.
“남 회장이 오늘 꼭 와달라고 할 때는 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어요.”
“이해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자리에 있으니 얼마나 많은 청탁이 들어오겠는가. 내가 그라도 고민이 되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왜 왔는지 알아요?”
“자선 행사여서 아닌가요?”
’자선‘이란 말은 좋은 일 때문에 참석한다는 훌륭한 명분이 되어준다. 첫 전시를 자선행사로 연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훌륭한 명분이긴 하지만, 그게 내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어요.”
그 이유가 궁금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가 관장님의 마음을 움직인 건지 궁금하네요.”
“한지감 대표가 궁금했습니다.”
“제가요?”
왜 내가 궁금했을까? 내가 유명한 경매사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는 말했다.
“유명한 경매사라서 그런 것도 맞아요. 실은 한지감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었습니다.”
“혹시 제가 탑 옥션에 있을 때 들으셨나요?”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긴 좀 그렇지만, 그때도 워낙 유명해서 미술계에서 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요. 골동상일 때부터 들었습니다.”
“골동상일 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명국이 내 대학 후배예요.”
“아…….”
박명국은 채령에게 위조 일을 시킨, 아주 질 나쁜 교수다.
“친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같은 미술계라서 얼굴 보고 살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새파란 녀석이 자기를 협박했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더라구요.”
“……그랬군요.”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라 민망하다.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고 그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뭐라는 게 아니에요. 잘못은 박명국이 했잖아요. 솔직히 질이 나쁜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다 아는 사이니까 얼굴을 붉히기 어렵다는 이유로, 내 일 아니라는 핑계로 그동안은 그냥 넘어갔어요.”
“…….”
나는 잠잠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어떤 젊은 사람이 나서서 그 일을 해결했다고 하니까 대견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더군요. 알고 보니 유명한 골동상이어서 더 놀랐구요. 그 뒤로도 이야기가 계속 들려오더라구요. 탑 옥션에 가고, 뉴욕에 가서 세계적인 경매사가 되고, 이번엔 갤러리를 연다길래 궁금해서 왔어요.”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내 행보가 업계에서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 말은 누군가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는 말도 되었다. 이거, 앞으로 이런 부분을 활용해 볼 수 있겠는데. 머리를 굴리는 나를 보고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지켜봤다는 게 기분 나쁜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관장님 같은 분이 저를 관심있게 봐주셨다는 게 신기해서요. 한편으로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네요.”
넉살을 떨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건실한데 유머까지 있군요. 사람을 대할 때 중요한 덕목이죠.”
“감사합니다.”
이제 물밑 작업에 들어가야겠다. 조선웅과 민효성의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구매할 리는 없지만, 훗날을 위해 작업을 해놓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