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오픈 리셉션 (3)2022.02.26.
최 관장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담백하게 물었다.
“오늘 전시 어떠셨어요?”
“아주 흥미로웠어요.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진 회장님의 눈은 정말이지 감탄할 수밖에 없더군요.”
“그렇죠.”
슬쩍 그런 진 회장이 조선웅과 민효성의 작품을 구매했다는 것을 강조해야지. 그러려는데 최 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4년 전인가요? 탑 옥션에서 진 회장님 컬렉션할 때도 갔었어요.”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오셨군요. 몰랐어요.”
“아참. 그때 한 대표도 탑 옥션에 있었죠?”
“네. 있었죠.”
내가 진 회장을 설득해 위탁했다고 하면 너무 자랑 같을까? 과한 걸 싫어하는 분이라길래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진 회장의 목소리가 스윽 끼어들었다.
“그때 날 설득한 게 한 대표였죠.”
진 회장의 등장에 최 관장이 반색했다.
“진 회장님!”
“최 관장님,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오셨는데 인사도 안 하시고, 이 늙은이 서운합니다.”
“인사드리려고 아까부터 기다렸는데 너무 바쁘셔서 드릴 수가 있어야죠. 이렇게 뵐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진 회장님을 설득한 분이 정말 한 대표님이세요?”
부끄러운 미소를 짓는 나를 대신해 진 회장이 말했다.
“네. 한 대표 맞아요. 그때 사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는데 한 대표가 나를 설득했죠.”
그가 한 번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이야기라,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기는 최 관장도 마찬가지였다.
“한 대표가 큰일했네요. 진 회장님도 마음 정말 잘 바꾸셨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멋진 전시도 하지 않습니까.”
“경제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이기환 작가 작품은 한 점도 못 샀어요.”
최 관장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비싼 작품은 사기 어렵죠. 하지만 전 이번 전시가 탑 옥션에서 했던 경매보다 인상적이었어요. 회장님의 취향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느낌이었달까요?”
흐뭇하게 미소 짓는데 최 관장이 정곡을 찔렀다.
“그런 면에서 조선웅 작가, 민효성 작가 작품은 조금 의외였어요.”
침을 잘못 삼켜 사레 걸릴 뻔한 걸 애써 잘 넘겼다. 눈 한번 정확하다. 그래도 나름 다른 컬렉션과 느낌을 맞춘다고 맞췄는데, 예리한 최 관장의 눈에는 겉도는 게 보였나 보다. 웃음으로 그냥 무마하려는데 진 회장이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전명자 작품 준다고 해서 억지로 구입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느끼셨군요!”
막아야겠다.
“그게…….”
하지만 진 회장은 나를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 좋아하는 작품의 취향은 아닙니다. 전 설치 작품도 그렇고 순수성을 간직한 그림을 부담스럽게 여기기도 하죠. 사실 작품보다는 작가에 매료돼서 사게 됐어요.”
“작가요?”
호기심어린 최 관장의 반응을 보며 진 회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네. 조선웅 작가는 예전에 우연히 만났고, 민효성 작가는 아직 보진 못했지만 한 대표를 통해 예술에 관한 순수한 열정을 들었습니다. 사기를 당해서 미술을 그만두려 했지만 그럼에도 저버릴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진 회장은 민효성의 진심이 자신을 울렸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현재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정말 기념비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시작에 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구입했습니다.”
포장 한번 기가 막히다. 속으로 감탄하는데, 심각하게 듣던 최 관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그렇네요. 전 두 분 다 ‘감 갤러리’ 전속 작가라 컬렉션에 무리하게 끼워넣은 것은 아닌지 의문이었는데, 제가 부끄럽습니다.”
다시 한번 정곡을 찔린 나는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동안 쌓아왔던 내공을 발휘해 금방 표정 관리에 성공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그래서 두 작가님 작품을 빼려고도 생각했는데, 진 회장님께서 꼭 넣고 싶다고 하셔서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최 관장은 나와 진 회장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만남이네요.”
그때 시계를 본 최 관장이 놀라서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네.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한 대표님도 뵙고, 또 좋은 작가 두 분도 알게 돼서 기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그가 갤러리 정문을 향해 가는 모습을 나와 진 회장은 함께 바라봤다. 진 회장이 한껏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내 덕에 점수 딴 줄이나 알아.”
“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갤러리스트인 내가 전속 작가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 작품을 소유한 컬렉터의 말이 훨씬 더 신용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 내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
“이게 목적이셨군요?”
“그래! 이수지에게 조선웅 작가 작품 팔렸다며!”
조선웅과 민효성의 작품을 사고 싶지 않아 이 기회를 활용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에게 두 작가를 선보였으니 나에겐 남는 장사였다.
“알겠어요. 없던 일로 할게요.”
“휴우…….”
안도하는 진 회장을 보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사기 싫으셨어요?”
“취향도 취향이지만, 민효성 작가 작품은 물라도 조선웅 작가 작품은 너무 비싸단 말이야.”
경제적인 면에서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면 말씀을 하시죠.”
“그게 가장 먼저 팔릴 줄 누가 알았어?”
궁시렁거리는 그를 보면서 웃음이 났다. *
“빨리 일어나요!”
다영이 나를 흔들어 깨웠지만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제 리셉션을 정리하느라 새벽 3시가 넘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10분만…… 아니 5분만.”
“아까도 그렇게 말했거든요.”
“나 오늘 늦게 가도 돼. 신 디렉터님이 늦게 나와도 괜찮다고 했단 말이야.”
직원이면 모를까, 나는 사장이지 않는가. 늦잠 좀 잘 수도 있지. 그러자 다영이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손도 작은 게 더럽게 맵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난다.
“아……! 왜 때리고 그래.”
“맞을 짓을 하니까 그렇죠. 어제 처음 고객들에게 갤러리를 선보였어요. 이제 시작이라구요!”
“나도 알아!”
“그런데 대표라는 사람이 늦잠이나 자면 돼요?”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일어나서 씻어요.”
“……알았어.”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샤워하러 들어갔다. 씻고 나왔는데도 피곤해서 눈이 잘 떠지지가 않는다. 그런 나를 위해 다영이 커피를 내려주었다.
“땡큐!”
“얼른 마시고 같이 나가요.”
“아직 시간 있잖아아.”
“그건 그렇네요.”
애교스런 나의 태도에 다영이 싱긋 미소 지었고, 나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리셉션은 어땠어요?”
“좋았지. 300명 넘는 사람들이 왔어.”
“그 정도 인원은 갤러리에 수용 못하지 않아요?”
“오고 간 고객들 다 더하면 그렇다고.”
“아아.”
“고객들이 많이 와주셔서 다행이야. 강 회장님은 없었지만.”
최기석이 건물을 받겠다는 연락이 비서실장을 통해서 왔을 때, 그게 인연의 끝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혹시 강 회장이 오지 않을까 하는 얕은 기대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다영이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잊어버려요.”
“그래야지.”
강 회장의 이야기가 나와서 아까까지 고소하게 느껴졌던 커피가 썼다.
“참. 나 어제 최성렬 관장님 뵀어.”
“국립 현대미술관 최성렬 관장님이요?”
“응!”
다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학생 때 특강 들었을 때 몇 번 뵀어요. 인품이 너무 좋으시지 않아요?”
“맞아. 정말 좋으시더라.”
“전속 작가들은 잘 띄웠어요?”
“내가 아니라 진 회장님이 띄웠어.”
“진 회장님, 조 작가님도 민 작가님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지 않았어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의문을 표하던 다영은, 내 설명을 듣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랬구나.”
“진짜 웃기지.”
“그렇네요. 다른 분도 아니고 진 회장님이 그러실 줄이야. 어제 그림은 좀 팔았어요?”
“그럼. 전시에 나온 건 다 팔았어.”
“와. 대단한데요.”
“자선행사니까 그런 거지.”
“그래도 다 팔기가 어디 쉬운가요.”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영이 식탁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참. 현아 씨가 오픈 리셉션에 못 가서 미안하대요.”
“괜찮아. 일 때문에 못 온 건데 뭐.”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현아 씨, 드라마 미술팀에서 일한다고 했지?”
“맞아요.”
먹힐지는 모르지만 한번 연락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는 물었다.
“그런데 언제 왔어?”
“한 시간 전에 왔죠. 자고 있을 것 같아서.”
눈을 가늘게 뜬 다영은 나를 간파하는 느낌이라 나는 순간 움찔했다.
“아니…… 어제 너무 늦게 자서…….”
“알죠. 사람 마음이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고 싶다는 거.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고삐를 놓을 때가 아니에요. 오빠는 갤러리 얼굴이에요. 지금 갤러리를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감 갤러리’가 어떤 곳인지 보여줘야 할 때라구요.”
차분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모습이 프로답다.
“누구 여자친구인지 똑부러지네.”
“알면 됐어요.”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다. 이 안정감을 계속 가져가고 싶다.
“다영아. 우리 이제 같이 살자.”
“저 아직 책임도 못 달았어요.”
“나도 외조 잘할게. 집안일도 칼같이 정해서 내가 하고.”
다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조금 더 시간을 주면 안 될까요? 오빠랑 결혼을 하고 싶지만, ‘한지감 여자친구’로 사는 것도 나한테는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 ‘한지감 아내’가 되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럼 결혼은 나중에 하더라도 같이 사는 건 어때?”
“동거를 하자구요?”
“응. 우리가 어린 나이도 아니잖아.”
“알았어요. 생각해볼게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다영을 보면서 나의 마음은 부풀었다. 결혼이라는 형태가 아니어도 다영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 초인종을 몇 번이나 눌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강정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안 나와?”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연달아 눌렀지만 그럼에도 문이 열리지 않아 돌아서려 할 때였다. 문이 열리고 샤워가운을 걸친 글래머러스한 여자가 나타났다.
“누구세요?”
“강정휘라고 전하면 알 거야.”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는 강정휘를 쓰윽 훑어보더니 알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잠시 후. 정장으로 갈아입은 여자가 다시 나타나 강정휘를 거실로 안내했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김승재가 강정휘를 봤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을까?”
“일이 있으니까 왔겠죠.”
여자는 김승재의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고, 김승재는 끈적한 눈빛으로 봤다. 그간 붙어 있던 남자 비서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무력으로 김승재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김 회장은 침대에서 김승재를 만족시킬 여자를 골라 비서로 들여보냈다. 흥미가 오래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몇 개월 동안은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닳고 닳은 강정휘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파악했다. 여자를 보면서 강정휘는 말했다.
“잠깐 자리 비켜줘.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거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여자가 김승재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사님. 저 정말 가요?”
자신을 막 대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망나니짓하고 다니지 말라고 물린 사탕이 자신의 위치이건만, 여자는 곧 이곳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여자의 멍청함이 김승재는 마음에 들었다. 이런 스타일이 놀 만큼 놀다가 버려도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어떤 로맨티스트보다 달콤했다.
“아니야. 나에 관련한 모든 이야기는 다 네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야.”
“그렇죠?”
의기양양해진 여자가 보란 듯 강정휘를 봤고,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안경에 관한 이야기인데 정말 들어도 괜찮겠어요?”
그 한마디에 김승재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가 있어.”
“네?”
갑자기 싸해진 김승재의 태도에 여자는 적응하지 못했다.
“나가 있으라고!”
버럭 소리 지르는 김승재를 보면서 여자는 도망치듯 집에서 나갔다. 강정휘는 웃음을 참으며 소파에 편하게 기댔다.
“안경을 쓰셨다구요.”
“한지감 그 새끼가 떠들었나 보지?”
“네. 한지감에게 들었어요.”
“그런데 나를 직접 찾아오셨다?”
“그럼 안 될 거라도 있나요?”
뻔뻔한 강정휘의 태도에 김승재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강정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안경, 나한테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