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드라마 (1)2022.02.28.
“안경, 나한테 줘요.”
어이없는 요구에 김승재는 실소가 터졌다.
“미쳤어? 이걸 내가 어떻게 가졌는데, 달라면 그냥 줄 것 같아?”
“쓰지도 못하는데 가지면 뭐해요.”
“뭐라고?”
김승재의 눈이 이글거렸다.
“안경을 가졌는데도 여자하고 노닥거리는 것 보면, 아무것도 못 본 거 아니에요?”
“아니야!”
이를 악문 김승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데도 강정휘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늘 말없이 이곳에 온 것은 안경이란 능력으로 그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염탐할 필요도 없었다. 여색에나 빠져있는 것을 보면 분명 무용지물인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강정휘는 한지감이 안경을 썼을 때처럼 구태여 자신의 욕망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닐 텐데? 이런 식이면 그 대단한 물건으로 한 푼도 못 벌어들이는 거예요.”
위협적으로 강정휘에게 다가간 김승재가 멱살을 잡았다.
“뭘 안다고 나불대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한 대 칠 듯 멱살을 잡고 흔드는데도 강정휘는 겁먹지 않았다.
“맞는 거 따위 두렵지 않아. 나는 이대로 인생이 끝나는 게 더 짜증나거든. 그러니까 나는 그 안경 꼭 가져야겠어.”
돈이라는 욕망으로 점철된 강정휘의 눈이 소름 끼쳐 김승재는 멈칫했다. 그 틈을 타 강정휘는 김승재의 손을 떼어내고 말을 이어갔다.
“그냥 달라는 건 아니에요. 주기면 하면 앞으로 내가 안경으로 얻는 수익의 반을 드리죠. 그게 대단한 물건을 이렇게 방치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내가 할 수 있어.”
풋하고 강정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세월에요?”
“이 늙은 년이……!”
그 말에도 강정휘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늙었지만 나는 안경을 쓰면 미술품 가격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딴 미술품으로 돈푼이나 벌려고 내가 안경을 가져온 것 같아?”
“미술품으로 끝난다는 말은 안 했는데?”
강정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미술품은 시작이죠. 다음은 부동산, 그 다음은 기업. 차차 늘려나갈 거예요. 지식을 쌓는 건 내가 하죠.”
그 말에 김승재의 눈동자가 동요했다. 사실 그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벌이라는 신분에 맞게 기업 공부를 하면서 안경의 메시지를 볼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안 하던 공부를 갑자기 한다고 술술 될 리가 없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어도 도무지 내용이 들어오지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 만에, 공부는 천천히 하면 된다는 핑계거리를 만들어 비서와 달콤한 생활로 회피했다. 안경의 메시지는 보고 싶지만 공부는 하기 싫은 김승재의 마음을 강정휘는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욕망만 있고, 의지는 없었다.
“이사님은 그냥 내 투자자 신분으로 편하게 누리기만 하면 돼요.”
“……아니, 안 줘. 그런 달콤한 말로 날 설득할 수는 없을 거야.”
유혹적인 조건이었지만 강정휘가 신용할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김승재도 알았다.
“그렇게 단정 짓지 마시구요. 시간을 드릴 테니까 조금 더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정휘는 자리에서 일어서 집에서 나갔다. 쫓겨났던 여자가 집 앞에서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있는 것이 보였다. 한심한 그 모습에 강정휘는 혀를 끌끌 찼다. 욱한 여자가 소리쳤다.
“왜 사람을 보고 혀를 차요!”
“한심해서 그러지. 한 번뿐인 인생인데 좀 폼 나게 살지 그래.”
“뭐라구요?”
“재벌이랑 자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정신 차려. 김승재 흥미 떨어지기 전에 돈이나 많이 챙겨.”
씩씩거리는 여자를 뒤로하고 강정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 탔다. 대기하던 강정휘의 비서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잘될 거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거든.”
악마 같은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 신재범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작품이 다 팔린 건 정말 좋은 일인데, 전시 기간을 한 달로 공지해 둔 상황이라 난감하네요.”
그 말에 동의하듯 양민준 디렉터와 박혜영 디렉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셉션 때 이미 작품이 다 팔린 상태라, 고객이 작품을 원하면 배송해야 한다. 작품이 한두 점일 때는 그래도 무방하지만 전시 작품의 10%가 넘어가면 곤란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나요?”
내 질문에 신재범이 답했다.
“구매 고객께 양해를 구해서 전시 기간까지는 갤러리에 둘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럼 제가 고객께 직접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한두 점도 아닌데, 디렉터들과 나눠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확실히 효율성 면에서 보면 그게 좋았다.
“첫 전시이고, 좋은 목적에 함께 해주신 분들이니 제가 직접 인사드리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전속작가 마케팅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민효성 작가의 목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펜을 들고 내가 말하길 기다렸다.
“민효성 작가는 내년 4월에 있을 탑 옥션 신인 작가 후원 경매의 최종 10인으로 선정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게 느껴졌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에 최종 10인이 아닌, 후보자 30인에 드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박 디렉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를 기획하신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드리긴 뭐하지만, 2년 전보다 위상이 더 높아졌습니다……. 요새는 메이저 경매보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가 고객들 사이에서 화제성이 더 높아요.”
“압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민효성 작가가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박 디렉터가 도와달라는 듯 신재범을 봤다.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경쟁률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선정 시기까지 남은 기간이 3개월인데, 고객들의 인지도는 둘째치고 대중적인 인지도 자체가 없습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달릴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나를 보면서 모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1월에 있을 개인전 말고 어떤 걸 생각하시는 건가요? 혹시 국내 공모전을……?”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학연 지연에 좌우되는 국내 공모전에 우리 갤러리 전속 작가를 들러리로 참여시키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심사위원으로 초정되는 대학 교수의 제자들이나 그 지역 출신이 대부분 수상한다. 한마디로 이미 내정자는 정해져 있는 상황이다.
“민효성 작가를 위한 해외 프로젝트를 만들 겁니다.”
“해외 프로젝트라고 하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요?”
“동아시아의 인지도 있는 갤러리에서 민효성 작가가 전시를 하도록 만들 예정입니다.”
개인전을 연 신인 작가보다는 해외 프로젝트에 참여한 신인 작가가 훨씬 인상적이다.
“그럼 일단 도록을 만들어서 해외 갤러리, 미술관 돌려야겠네요.”
“맞습니다.”
역시 신재범하고는 일의 합이 잘 맞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인 작가를 반기지 않을 겁니다.”
“반길 만한 이점을 주면요?”
“어떤 이점이요?”
“민효성 작가에 대해 긍정적 답변을 주는 곳에 한해, 우리 갤러리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겁니다.”
‘감 갤러리’를 하루 대관하는 값은 200만 원이다. 이 주만 전시를 해도 2천 8백만 원, 그러니까 삼천 가까이 되는 가격이다.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에서 자신의 전시회를 연다는 건 해외 갤러리 입장에서도 끌릴 만한 조건이었다. 한마디로 승산이 있는 게임이다. 그 말을 들은 신재범의 눈이 반짝였다.
“그거면 관심을 보이는 곳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예 승산 없는 싸움은 아니라고 봅니다. 신 디렉터님은 홍콩을 맡고, 양 디렉터님은 일본, 박 디렉터님은 대만을 맡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예.”
여러 갤러리도 필요하지 않다. 시작으로 삼을 수 있는 딱 한 갤러리가 있으면 된다. 회의 주제는 조선웅의 전시로 넘어갔다.
“조선웅 작가 전시는 내년 2월을 예상하죠?”
“네. 그렇습니다. 작가님이 작품 작업하는 데 그 정도 시간이 걸리실 것 같다고 하셔서요.”
설치 미술이 워낙 까다로운 분야다 보니, 작품을 완성시키는 데 만만치 않은 시간이 든다.
“마케팅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박 디렉터가 눈치를 보고 머뭇거려 나는 말을 더 했다.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대표님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어떤 식으로요?”
“평론가분을 섭외해서 사회적 지위 높은 컬렉터 분들 몇 명 모으면, 아무래도 인지도 상승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 건지 어렵지 않게 나는 알아들었다. 평론가를 포섭해 대단한 작가인 것처럼 컬렉터, 재력가에게 말해서 사게 하는 것이다. 그럼 풋내기 작가도 금방 대단한 작가가 된다.
“거기에 주간지 기사까지 있으면 엄청난 인지도를 갖겠죠. 작품 가격도 엄청 오를 거구요.”
“그죠!”
의견을 제시한 박 디렉터뿐만 아니라 양 디렉터도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동의했다. 하지만 신재범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헤드 디렉터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그게 빠른 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왜 옳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결국 경제 논리에 의해 판을 짜는 것이지 않습니까. 갤러리스트란 작품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철학적 가치를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를 보고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니 없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건 사기와 다름없다,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쓸데없이 고지식한 이야기란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방법으로 두고 싶습니다.”
“고지식한 이야기란 것에 동의합니다.”
내 말에 신재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요. 쓸데없다는 이야기엔 동의하지 않거든요. 저도 그 고지식한 사람 중에 하나라.”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돈이 목적인 예술에 예민한 분하고 일해서 그런지 고지식해서요.”
그 예민한 분이 김도균이라는 것을 알고 신재범은 웃었다. 반면 양 디렉터와 박 디렉터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박 디렉터가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을 이야기를 해서…….”
“아니요.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한 사람은 나였는데요.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죠.”
예술이라는 말 뒤에 숨어도 돈을 쫓는 것이 현재 미술계의 민낯이었다. 다만 아무도 말하지 않을 뿐.
“신 디렉터님은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계세요?”
“저도 주간지 홍보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약할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좀 더 매체에 강력하게 노출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말인데, 드라마에 노출되는 방법은 어떨까요?”
“드라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네. 주인공이 설치 미술 작가인 드라마에요. 시놉을 봤는데 화제성이 있겠더군요.”
“배경으로만 나온다면 임팩트가 없을 것 같은데요.”
“괜찮다는 대사 한 줄이라도 나와야 임팩트가 있죠. 작품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에요.”
신재범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럼 한번 뚫어봐야죠. 제작사 알려주시면 제가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미팅은 이미 잡아놨어요. 지인이 그 드라마 미술팀에서 일하고 있어서 말이에요.”
“아는 분이요?”
“네. 탑 옥션 인턴 동기예요.”
인턴에서 떨어지고 김현아는 갤러리에 다녔지만 영업에 부담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이후 그녀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영화 미술팀에서 일했고, 그렇게 영상매체 미술팀에 속하게 되었다.
“그럼 진작에 말씀해주시죠!”
시원스런 신재범의 반응에 박 디렉터도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드라마에 나오고, 거기에 주간지까지 더해지면 정말 대박이겠는데요.”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