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드라마 (2)2022.03.02.
신재범과 함께 드라마 제작사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서는 정신없이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난감했다. 약속을 잡은 제작 PD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드는데, 신재범이 나를 붙잡았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는 싱긋 웃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들어가서 한 남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감 갤러리’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국세진 PD님하고 뵙기로 했는데요.”
“아…… 그렇군요.”
남자가 일어서서 신재범과 나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녹차하고 주스 있는데, 뭘로 드시겠어요?”
신재범이 나에게 물었다.
“주스 괜찮으십니까?”
“네. 좋습니다.”
대답을 하는데 남자가 나를 보면서 갸우뚱거린다. 왜 저러지? 남자의 표정을 보지 못한 신재범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주스 두 잔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스가 세팅되고 나서, 전화로 연락을 취했던 국 세진 PD가 호들갑스럽게 나타났다.
“어머……!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태도는 생기발랄했지만 외피는 피곤에 절어 있었다. 다크 써클이 하도 깊어서 판다 같은 느낌이 든달까. 힘든 업계라고 익히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더 피부로 확 와닿았다. 이런 속마음과 다르게 겉으로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 인사했다.
“아닙니다. 방금 전에 왔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우스 제작 PD 국세진입니다.”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재범에게 먼저 명함을 내밀었고, 그는 당황했다.
“대표님이 먼저 받으시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요. 전 헤드 디렉터라.”
그제야 내가 대표라는 것을 알아차린 국 PD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죄송합니다. 저는 당연히 대표님이니까 연세가 더 있으실 줄 알고……. 원래 실무진이 연락을 주시는데…….”
처음에 분명히 대표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바쁘다 보니 오인했을 수 있다. 그녀의 말대로 원래 대표가 직접 연락을 주는 경우는 드물지 않는가. 그제야 왜 아까 남자 직원이 갸우뚱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로 봤을 때는 분명 신재범이 대표인데, 그가 공손한 태도로 나에게 음료 선택을 물으니 헷갈렸던 것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으로 무마했다.
“하하하. 그럴 수 있죠.”
신재범과 국 PD가 따라웃으면서 어색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녀는 넉살 좋게 적절한 칭찬을 구사했다.
“이렇게 젊고 잘생기신 갤러리 대표님이 계신 줄은 몰랐는데요? 진작에 알았으면 작가님한테 참고하시라고 하는 건데!”
내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자 신재범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저희가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보내주신 조선웅 작가 포트폴리오 봤는데요, 원래 백하진 작가님하고 같이 작업하셨더라구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포트폴리오는 보셨나요?”
“네 봤죠! 그런데 제가 미술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더라구요. 좋은 작품인 것 같긴 한데…….”
민망한 듯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럴 수도 있죠. 저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현대미술이 많이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사실 작품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조선웅 작가님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정체성’입니다.”
포트폴리오에 백하진과 작업한 작품은 하나도 넣지 않았다. 오직 조선웅의 작품으로만 채워 넣었다. 설명을 들은 국 PD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렇게 들으니까 좀 이해가 되네요. 그런데 이런 말씀 좀 그렇지만, ‘온 더 탑’을 쓰시는 이해리 작가님이 좀 더 유명한 작품을 등장시키고 싶다고 해서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시놉상 등장하는 작가는 유명한 작가가 아니던데요. 사랑을 통해서 한 단계 성장하면서 작가로서의 성공도 거머쥐는 내용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작가님이 자꾸 백하진 작가 작품을 하고 싶으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백하진이냐. 따지고 보면 그거 다 조선웅 아이디어로 만든 건데……! 욕이 나오려는 걸 참으면서 나는 여유롭게 말했다.
“백하진 작가 작품 좋죠. 하지만 전쟁에 관련된 주제의 작품은 캐릭터와 너무 동떨어진 것 같은데요.”
신재범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도왔다.
“백하진 작가는 유명해서 미술을 조금만 아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아볼 거예요. 오히려 캐릭터의 몰입을 방해할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이 작가님 설득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작가들은 까다롭다. 그럼 실질적인 이익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백하진 작가 작품이라면 대여할 순 있어도 협찬받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저희는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신경을 조금만 써 주신다면요.”
“받아도 저희가 설치작품을 놓을 데가 없는……데요.”
나와 신재범의 협공에 몰린 국 PD는 눈치를 봤다. 그녀를 보면서 나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 작품 EBC 편성 받으셨죠?”
“네. 5월에 방영합니다.”
“최근에 EBC가 사옥을 상암동으로 옮겼죠? 휑한 신사옥을 빛내줄 설치작품을 기부하면 좋지 않겠어요? 이 작가님이 힘써줬다는 걸 말하면 EBC에서 고마워할 텐데요.”
국 PD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세요?”
“거기에 맞게 신경만 써주신다면 그럴 수 있죠. 작가님이 대사만 잘 써주신다면요.”
“작가님이 싫어하실 것 같진 않은데요. 일단 논의하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제 선에서 결정할 수는 없는 거라서요.”
“그럼요.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제작사에서 나오자 물끄러미 나를 보는 신재범의 시선이 느껴졌다. 기부를 한다면 갤러리 입장에서는 큰 손해를 본다. 작가한테 그림을 기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갤러리에서 사서 기부해야 한다.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물었다.
“왜요? 너무 손해 보는 짓 같아요? 갤러리 돈 안 쓰고, 제 개인 돈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그러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요?”
“갤러리스트의 자질이 있으신 건 알고 있었지만, 일 처리를 너무 잘하시니 부러워서 그럽니다.”
상사를 기분 좋게 하려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웃음이 났다.
“하하하. 신 디렉터님, 생각보다 립 서비스를 잘하시네요.”
“정말 진심입니다. 갤러리 처음 시작하는 분들은 의욕만 앞서고, 투자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속작가가 유명하지 않으면 갤러리는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작가를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마케팅이 필요한데, 그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본 모습을 좀 따라해 본 거예요. 대중적 인지도가 많이 도움이 되잖아요. 드라마에 ‘그림 괜찮다.’는 대사 한 번 나오면 구매 고객이 줄을 서기도 하구요. 그걸 위한 거죠.”
“잘하셨습니다.”
차에 타서 신재범이 무언가 생각난 듯 나를 보며 물었다.
“대표님. 지난번 회의에서 민효성 작가 목표는 말씀하셨는데, 조선웅 작가 목표는 말씀 안 하셨죠.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동의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저한테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조선웅 작가는 내후년에 있을 베니스 비엔날레에 입상시킬 예정입니다.”
신재범은 그대로 굳어졌다.
“4년 후가 아니라 내……후년이요?”
“네. 2년 뒤요.”
비엔날레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 전람회로, 미술가들의 올림픽으로 불린다. 그중에서도 베니스 비엔날레는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수상은 둘째 치고 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초청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올해라고 해도 한 달도 안 남은 마당에, 주어진 시간은 1년 남짓이다. 그런데 내가 패기 넘치게 2년 후를 부르며 초청도 아닌 수상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던진 것이다. 그러니 신재범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쉬운 일 아니라는 것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걸 목표로 움직일 겁니다. 신 디렉터님이 제게 힘이 되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뭐라고 하고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신재범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한숨을 삼킨 신재범이 차를 출발시켰다. * 이틀 후. 국 PD가 티라미수와 꽃다발을 들고 갤러리를 찾았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뭘 이렇게 사오셨어요.”
국 PD를 처음 보는 것인데도, 양 디렉터는 몇 번 본 사람처럼 친근하게 굴며 티라미수를 받아들었다. 저 친화력, 마음에 든다. 직원 잘 뽑았다는 흐뭇함을 느끼는데, 국 PD는 웃으면서도 내 눈치를 봤다.
“갤러리 여신 것 축하도 드리고, 지난번의 실수도 만회할 겸 사왔습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이런 선물을 사왔을 것 같지 않은데. 거기에다 지난번과 달리 세미 정장에 풀 메이크업, 너무 격식을 차린 것도 마음에 걸린다. 보통 이런 경우는 뭔가 부탁할 게 있을 때인데. 그럼에도 나는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실수라 할 게 있나요.”
끄덕이면서 신재범도 긍정을 표했다.
“없었죠. 이쪽으로 오세요.”
“네.”
나와 신재범, 그리고 국 PD가 회의실로 들어섰다. 국 PD는 신기한 듯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회의실도 깔끔하고 고급스럽네요.”
“신 디렉터님 취향이세요. 저는 갤러리가 처음이라서 거의 신 디렉터님에게 맡겼거든요.”
“아 그렇군요! 취향이 참 고급스러우세요.”
국 PD의 칭찬에 신재범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양 디렉터가 끙끙거리면서 국 PD가 사온 티라미스와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 박 디렉터가 자리를 비워 양 디렉터 혼자 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눈치 빠른 신재범이 양 디렉터를 도와 빠르게 세팅을 끝마쳤다. 넉살 좋게 양 디렉터는 미소로 말했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네에.”
양 디렉터를 보는 국 PD의 얼굴에 미소가 흐뭇하게 번졌다. 잘생긴 남자가 성격까지 좋으니 설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몇 년 전의 나도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지. 암, 그렇고말고. 양 디렉터가 나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국 PD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신재범이 나섰다.
“찾으시기 어렵지 않았어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국 PD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역에서 나오니까 금방이던데요? 이렇게 규모가 큰 갤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오픈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으니까요.”
여유로운 척 커피를 마시면서 대답하는 와중에도, 나는 굳이 국 PD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궁금했다. 오늘 미팅은 어제 국 PD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성사된 것이다. 드라마 작가가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전화상으로 알려주면 됐을 터였다. 그런데 왜 굳이 오겠다고 한 건지 의아했는데, 오늘 보니 부탁할 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운을 떼지 않았다. 국 PD은 계속해서 칭찬을 늘어놨다.
“그날 가시고 조선웅 작가님 포트폴리오 다시 봤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건물 로비에 있는 작품도 조선웅 작가님 작품이죠?”
“네. 맞아요. 갤러리 개관을 축하면서 직접 만들어주신 겁니다.”
신재범이 끄덕거리면서 답하고 말을 이어갔다.
“바쁘실 텐데 오신다고 해서 놀랐어요.”
정말 놀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칭찬은 됐으니 여기에 온 목적이나 말하라는 것이다.
“아……. 실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이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은지, 국 PD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한 대표님이 미술계에서 꽤 유명하시더라구요. 뉴욕에서 유명한 경매사셨다고 들었어요.”
아아. 원하는 것이 이것이었구나. 눈치를 보면서 국 PD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 작가님이 그 사실을 아시고, 한 대표님이 꼭 저희 드라마에 출연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끝을 흐리며 나를 간절한 눈으로 본다. 유토피아 호텔에서 자선경매를 맡기로 했지만, TV에까지 얼굴이 팔리고 싶진 않았다. 갤러리스트로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지금, 경매사의 모습으로 TV에 출연하는 것이 동종 업계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웅 작가를 생각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