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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드라마 (3) (197/226)

197화 드라마 (3)2022.03.05.

선뜻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 고민하는데, 국 PD가 구구절절 말했다.

1656030980487.jpg“받아들여 주시기만 하시면, 제가 작가님께 잘 말씀드려서 민효성 작가님 작품도 노출될 수 있게 할게요. 마음에 쏙 드는 대사는 물론이구요!”

끼워팔기를 하라는 건가? 조선웅과 민효성이 ‘감 갤러리’ 전속 작가라는 것을 미술계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 상황에서 드라마에 두 작가의 그림이 같이 등장한다면 코웃음을 치면서 비웃을 것이 분명하다. 당황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한데, 유한 표현을 찾지 못해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신재범이 국 PD를 보면서 말했다.

16560309804874.jpg“죄송하지만 솔직히 많이 당혹스럽습니다.”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 정확히 ‘당혹’이란 어휘를 구사해 놀랐다. 신재범의 굳은 표정을 보고 국 PD는 어쩔 줄 몰라 했다.

1656030980487.jpg“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16560309804874.jpg“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됐네요. 저희가 아무리 부탁드리는 입장이라지만, 대표님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대표님 지인이 소개해서 직접 대표님이 연락하신 겁니다.”

신재범의 말을 요약하면 ‘너한테 직접 대표가 연락했다고, 너와 대표님이 같은 급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가 어떻게 일을 진행할지 궁금해서,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국 PD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1656030980487.jpg“제가 결코 대표님은 쉽게 봐서 이런 건 아닙니다……. 작가님이 꼭 대표님을 카메오로 모시고 싶다고 해서…….”

16560309804874.jpg“그렇다면 오시겠다는 연락을 주셨을 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논의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말씀하신 부분이 저로서는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1656030980487.jpg“……죄송합니다.”

이곳도 엄연히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곳이었기에, 우위에 있는 입장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었다. 신재범이 말한 것은 그러한 예의였다.

16560309804874.jpg“어쨌든 제안해 주셨으니 회의를 통해 논의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창구를 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1656030980487.jpg“……네.”

16560309804874.jpg“가보시죠.”

냉정한 신재범의 반응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어서 나도 놀랐다. 죄인처럼 국 PD가 고개를 숙인 채 일어섰다. 돌아서려던 그녀가 나와 신재범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1656030980487.jpg“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평소 고객이나 비즈니스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을 신재범이 배웅했지만, 오늘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국 PD가 저런 반응을 보인 데에는 사실 직접 연락을 취한 내 탓이 컸다. 절차라는 건 일견 불필요한 허례 같지만, 알고 보면 그런 것이 만들어진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그 절차가 허물어진 순간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의 오판이다. 대표가 직접 나선다고 결과가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신재범의 눈치를 보게 됐다.

16560309834874.jpg“신 디렉터님…….”

고개를 돌린 신 디렉터는 어째서인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16560309804874.jpg“기선제압, 제대로 한 것 같죠?”

16560309834874.jpg“기선제압이요?”

16560309804874.jpg“네. 실은 지난번에 하려고 했는데 첫 미팅이기도 하고, 부탁하는 입장이라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그제야 나는 신재범이 오늘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아차렸다.

16560309834874.jpg“그런데 오늘 국 PD가 빌미를 제공했군요.”

16560309804874.jpg“그렇죠!”

내가 생각한 것보다 신재범은 더 노련하다. 픽 웃음이 나면서 긴장이 풀렸다.

16560309834874.jpg“전 또 신 디렉터님이 화난 줄 알고 긴장했잖아요.”

16560309804874.jpg“약간 화가 나기도 했어요. 아무리 우리가 신생이라지만 너무 막 대하잖아요.”

16560309834874.jpg“제 탓이죠. 의욕만 너무 앞섰어요.”

16560309804874.jpg“아니에요. 제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못 드렸어요.”

싱긋 웃으면서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16560309834874.jpg“다음부터는 말해주세요. 신 디렉터님 의견이라면 저랑 다른 방향이라 해도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16560309804874.jpg“네. 꼭 그러겠습니다.”

그러다 문득 민효성의 해외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졌다.

16560309834874.jpg“민효성 작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홍콩 갤러리는 있었나요?”

16560309804874.jpg“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신인 작가다 보니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16560309834874.jpg“그렇군요.”

패기 좋게 이야기했지만, 현실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어두워진 나의 얼굴을 보고 신재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16560309804874.jpg“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곧 나타날 겁니다.”

16560309834874.jpg“그래야죠. 저도 알아볼게요.”

해외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민효성의 작품이 해외 갤러리에 걸릴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일만 시켜 놓고 대표랍시고 빠져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락할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신재범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6560309804874.jpg“성 회장님 뵈러 가야 하죠?”

16560309834874.jpg“네. 이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16560309804874.jpg“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드라마 관련한 건 내일 다 같이 회의하기로 하죠.”

16560309834874.jpg“네!”

뭐가 득이고, 뭐가 실일지 따져 봐야 한다. 쉽게 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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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다영에게 따듯한 차를 내어주며 미소 지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라서 더 반가운 마음이 크다. 같이 사는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했지만, 다영은 차만 마실 뿐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말을 꺼냈다.

16560309834874.jpg“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16560309892312.jpg“해봤죠.”

홀짝 차를 마신 다영이 딴청을 부렸다. 나는 긴장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16560309834874.jpg“답은?”

16560309892312.jpg“…….”

16560309834874.jpg“싫으면 싫다고 말해. 상처 안 받을 테니까.”

16560309892312.jpg“좋아요. 좋은데…….”

16560309834874.jpg“좋은데 뭐?”

숨을 고른 다영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16560309892312.jpg“다른 사람들에게는 일단 말 안 하면 안 될까요?”

일부러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한지감의 여친’이라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다영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16560309834874.jpg“내 여친 이미지가 고착되는 게 싫어서 그렇지?”

16560309892312.jpg“오빠랑 같이 사는 건 좋지만, 사람들 시선을 감당하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한지 다영은 내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런 다영에게 다가가 따듯하게 안아 주었다.

16560309834874.jpg“미안하긴. 괜찮아.”

16560309892312.jpg“정말 괜찮아요?”

16560309834874.jpg“그럼.”

울컥한 다영이 눈시울을 붉혔다.

16560309892312.jpg“나도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좀 더 잘났으면 이런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텐데…….”

16560309834874.jpg“그런 말 하지 마.”

나는 더 꼭 다영을 껴안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16560309834874.jpg“나는 안경 덕분에 성공을 빨리 이룬 것뿐이야.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16560309892312.jpg“잘하긴요……. 아직 책임 달지도 못했는데…….”

16560309834874.jpg“곧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능력이 없었으면 탑 옥션에서 버티지도 못해. 미술품 위탁받고, 고객들에게 좋은 작품 추천하고. 그게 어디 쉽냐고.”

그제야 다영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16560309892312.jpg“같은 업계라서 이런 건 좋네요.”

16560309834874.jpg“그지? 단점보다 장점이 크다니까.”

16560309892312.jpg“고마워요. 이해해줘서.”

참 아이러니하다. 같은 업계라서 비교대상이 되고, 같은 업계라서 이해도 한다. 다영은 나의 품에 폭 안겼다.

16560309834874.jpg“나도 고마워. 말해줘서.”

자존심 강한 다영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마주앉아 마음을 진정시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16560309834874.jpg“이번 주에 들어오는 거 어때?”

16560309892312.jpg“너무 빠르지 않아요? 짐 챙기려면 시간 좀 걸리는데…….”

16560309834874.jpg“짐 싸는 건 내가 도와주면 되지.”

16560309892312.jpg“내가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16560309834874.jpg“당연하지. 기왕 들어오기로 한 거, 일찍 왔으면 좋겠어.”

싱긋 웃은 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60309892312.jpg“알았어요. 중요한 것만 챙겨서 들어올게요.”

16560309834874.jpg“왜? 아예 이삿짐 싸서 들어와. 전세 곧 만기잖아. 돈 굳고 좋지 않아?”

16560309892312.jpg“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게요.”

도도한 다영의 태도를 보니 나만 신난 것 같아 억울했다.

16560309834874.jpg“어째 발 뺄 생각을 먼저 하는 것 같다?”

16560309892312.jpg“천천히 단계를 밟아가려는 것뿐이에요.”

속상하다는 듯 다영이 눈을 흘겼고, 나는 한걸음 물러섰다.

16560309834874.jpg“알았어. 그럼 간단하게만 챙겨서 일단 옮기자.”

16560309892312.jpg“그래요. 참 오빠, 갤러리 오픈할 때 이 관장 왔죠?”

16560309834874.jpg“그럼, 왔지.”

16560309892312.jpg“어때 보였어요?”

다영의 눈에는 호기심 반, 의아함 반이 서려있었다.

16560309834874.jpg“한결 부드러워지신 것 같던데. 근데 그건 왜?”

16560309892312.jpg“좀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요…….”

16560309834874.jpg“무슨 이야기?”

16560309892312.jpg“정연주 책임님이 응급환자인 거 아시죠?”

나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16560309834874.jpg“정 선배, 어디 아프셔?”

16560309892312.jpg“아니요. 그 응급환자 말구요. 아이돌 ‘ER’의 팬클럽 ‘응급환자’요.”

아이돌 ‘ER’이라면 지금 한창 핫한 아이돌 그룹이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왜 부정 타게 응급실을 아이돌 이름으로 지었나 했다.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는 좋은 역할을 하는 곳이지만, 응급실에는 대부분 다쳐서 가지 않는가. 언젠가 왜 그룹명이 ‘ER’인지 들은 적이 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다 응급실에 갈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과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가진 그룹이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너무 낯간지러워서 몸서리를 쳤으나, 그 후로 응급실을 지날 때마다 그 아이돌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잘 지은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 이름이 ‘응급환자’인 줄은 몰랐다. 내 관심사에서 아이돌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 아이돌은 대부분 모르는데 그중에 아는 이름이 나와 반가웠다.

16560309834874.jpg“‘ER’ 알지! 팬클럽 이름이 ‘응급환자’인지는 처음 알았네. 정 선배님이 아이돌 좋아하시는지는 몰랐어. 근데 그게 이 관장하고 무슨 상관이야?”

16560309892312.jpg“거기에서 가장 유명한 멤버가 시훈이거든요. 그런데 팬카페에 시훈이 묘령의 여성과 함께 있는 사진이 올라왔대요. 멤버 사생활 침해라고 카페 관리자에 의해 곧 삭제되었지만요.”

16560309834874.jpg“지금 그 여자가 이 관장이라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다영이 말했다.

16560309892312.jpg“정 책임님이 보기에는 그런 것 같았대요. 얼굴이 정확히 보인 건 아니었지만, 스타일이나 실루엣이 이 관장이었다구요.”

나는 웃음이 터져 손까지 저었다. 이수지가 아이돌을 만나다니,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일단 만나는 것부터가 어렵지 않나? 접점 자체가 없을 텐데. 무엇보다 ER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다 어렸다.

16560309834874.jpg“에이 설마. 아이돌이면 이 관장하고 나이 차이도 한참 날 텐데!”

16560309892312.jpg“그렇죠? 저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혹시나 해서 물었어요. 참, 오늘 드라마 미팅한 건 어떻게 됐어요?”

나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었고, 놀란 다영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16560309892312.jpg“와아. 신 디렉터님, 세게 나가셨네요?”

16560309834874.jpg“그지? 나도 좀 놀랐어.”

16560309892312.jpg“그런데 그렇게 나갈 만했어요. 안 그랬으면 이것저것 다 해달라고 그랬을걸요?”

16560309834874.jpg“맞아. 신 디렉터님 대처가 적절했어.”

이래서 노련함이 중요하구나, 하고 다시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16560309892312.jpg“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16560309834874.jpg“하나는 확실해. 경매사로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진 않아.”

16560309892312.jpg“으음……. 그렇군요. 하긴, 경매사 이미지는 좀 그렇죠. 유토피아 호텔은 미술계 인사들이 오는 것이니 미술계 내부의 특별 이벤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드라마는 대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안 그래도 내가 경매사로 활동하다가 갤러리스트로 전향한 것에 대해 곱게 보지 않는 시선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드라마에 경매사로 출연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16560309834874.jpg“엄청 색안경 끼고 보겠지.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러워.”

16560309892312.jpg“그래도 좀 아까운 기회이긴 하네요. 양날의 검이긴 해도 ‘감 갤러리’를 알릴 수 있잖아요.”

갤러리 대표는 그 갤러리의 얼굴이다. 그 얼굴이 인지도가 생기면 갤러리의 인지도도 함께 올라간다.

16560309834874.jpg“그럼 이건 어때? 특별 출연을 하는 대신에 갤러리스트로서 출연을 하는 거야.”

16560309892312.jpg“그쪽에서 원하는 건 경매사로서의 모습일 텐데요.”

16560309834874.jpg“그거야 설득하기 나름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비로소 감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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