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드라마 (4)2022.03.07.
국 PD가 난감한 듯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경매사로 출연하는 건 어려우시지만 갤러리스트로 출연하시는 건 가능하다는 말씀이시죠?”
“네. 아. 그리고 민효성 작가는 드라마에 노출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서요.”
신재범이 차분하고 정확한 어투로 말하자 국 PD는 기가 죽어 눈치를 봤다.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경매사로서 제 이미지를 원하셨다는 건 알지만, 갤러리스트로 전향한 지금은 여러 가지로 민망한 입장이라서요.”
“이해……합니다. 저는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이 작가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서요.”
“경매사가 등장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탑 옥션의 서정선 경매사님께 말씀드려 볼 수도 있습니다.”
“……좋죠!”
서정선은 살아있는 레전드다. 그런 존재를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슬슬 반응이 오자 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말했다.
“만약에 서정선 경매사님이 하신다고 하면, 소규모의 프라이빗한 경매를 갤러리에서 하는 장면을 찍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남자주인공이 미술계가 시장논리로 움직이는 것에 염증을 느끼는 상황이라, 그런 장면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난감해하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진 채로 그녀는 홀린 듯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면을 상상하던 그녀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그런데 그러려면 규모가 있는 갤러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추천드렸으니 저희 갤러리를 이용할 수 있게 해 드리죠.”
“정말…… 가능하세요?”
“네. 대신 갤러리 여는 시간 외에 촬영하셔야 합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저, 그럼 연락 좀 드리고 와도 될까요? 허락 받으면 바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기회를 혹시나 놓칠까 봐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나는 너그러운 척 미소 지었다.
“그럼요.”
내 대답을 들은 국 PD가 일어나서 신나게 회의실을 나갔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신재범이 흐뭇하게 나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갤러리 홍보를 돈 안 들이고 할 기회를 얻으셨네요. 갤러리스트의 이미지도 지키셨구요.”
“네. 생각을 좀 바꿔 보기로 했거든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다영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다음 날 3시간 연속 회의를 하다 보니, 이런 장면을 지원해주면 갤러리까지 홍보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갤러리를 지원해주는 척했지만, 우리 갤러리를 홍보할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대표님은 어쩔 때 보면 참 무섭습니다.”
묘한 미소를 짓는 신재범을 보며 나는 웃었다.
“농담도 잘하세요.”
“농담 아닌데요.”
그때 문이 열리고 국 PD가 들어왔다.
“감독님, 작가님 다 오케이하셨어요. 멋진 장면이라고 다들 좋아하세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치열한 궁리의 결과였지만 나는 자연스레 나온 아이디어인 것처럼 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시놉을 보다가 우연히 떠올랐어요. 이 작가님이 글을 잘 쓰신 덕분이죠.”
“정말 장면이 잘 나올 것 같아요!”
흥분하는 국 PD를 보면서 나는 은근슬쩍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쿵쾅쿵쾅! 시끄러운 음악이 김승재의 기분을 상승시켰다. 밤을 보낸 같이 보낸 비서가 곁에 있는데도, 그는 처음 보는 여자와 몸을 밀착시키며 춤을 췄다. 보다 못한 비서는 입술을 잘근 깨문 채 클럽을 나가버렸다. 김승재는 비서가 나가는 것도 모르고 더 신나게 춤을 췄고, 처음에 흥미를 느끼던 여자도 뒷걸음질 쳤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박선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박선호의 아내, 고세라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김승재, 미친 사람처럼 왜 저래? 나중에 연지 어떻게 보라고…….”
김승재가 들이댔던 여자가 고세라의 친구였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었다. 클럽에 오면 대부분 사람들이 흥분하기 마련이지만, 김승재의 흥분도는 과도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박선호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김승재 부르지 말자고 했잖아. 자기 생일파티인데 분위기 다 망치고…….”
오늘은 박선호의 생일이어서 클럽 전체를 빌렸다. 예전에 박선호는 이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춤추는 걸 즐기는 고세라와 함께하다 보니 취향도 비슷해졌다. 그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해. 내가 돌려보낼게.”
“그냥 김승재 비서한테 말해서 데리고 나가라고 그래.”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김승재와 말을 섞는 것조차 싫었다. 근묵자흑이라고 하지 않던가. 김승재가 남편을 물들일까 걱정이었다.
“그래도 친구인데 어떻게 그래. 잠깐만 있어.”
사람들을 헤치고 박선호는 김승재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부담스러워하는데도 김승재는 계속 몸을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여기서 나갈까? 근처에 호텔 있던데.”
“아니요. 그럴 생각 없는데요.”
고세라와의 관계 때문에 참고 있던 여자가 폭발하자 김승재의 눈이 돌았다.
“이게……!”
올라간 그의 손을 박선호가 막았다.
“김승재. 뭐하는 거야!”
“얘 하는 것 좀 봐!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나!”
화가 난 여자가 이를 악물고 박선호에게 말했다.
“세라 때문에 참는 줄이나 알아요.”
“죄송합니다…….”
여자가 씩씩거리면서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눈이 뒤집힌 김승재가 뒤를 따라갔다.
“김승재! 김승재!”
박선호가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여자의 뒤를 쫓는 김승재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발정난 개가 들이대다 대차게 까였네. 하긴, 이수지에게도 반품됐잖아.”
고개를 돌리자 예전에는 친했지만 분노장애로 인해 대판 싸우고 원수가 된 K그룹 장남 이 상무가 보였다.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도 곁에서 김승재를 같이 비웃었다.
“하하하.”
“하하!”
“이 새끼들이!”
김승재가 이 상무에게 달려들면서 싸웠고, 순식간에 클럽은 난장판이 되었다. 다시 김승재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어두컴컴한 클럽 룸이었다. 부스스 눈을 뜬 그가 룸에서 나오자 텅 빈 클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많았던 사람들이 다 환상처럼 사라지고, 박선호만 덩그러니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선호야…….”
“…….”
박선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하다…….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이제 더 이상 보지 말자.”
“뭐?”
씩씩거리면서 김승재가 박선호 앞에 섰다.
“들었잖아. 이제 더 이상 보지 말자고.”
지나치려는 박선호를 김승재가 막고는 눈을 부릅떴다.
“기회 딱 한 번 준다. 나 삼원 그룹 김승재야. 그리고 좀 있으면 나는 엄청난 돈을…….”
“엄청난 돈이고 뭐고, 네가 지금 어떤 꼴인지나 생각해!”
버럭 박선호가 소리를 질렀고,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김승재는 멍해졌다.
“선호야…….”
“나는 그래도 네가 수지한테 진심이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상한 짓 해도 편들었던 건데. 이제는 수지가 이해 간다. 왜 너랑 이혼했는지!”
“이 자식이,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박선호의 얼굴을 김승재가 주먹으로 때렸다. 꽤 아팠을 텐데도 박선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무슨 행동을 해도 김승재에게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연 끝내는 값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더 이상 얼굴 보지 말자. 수지 곁에도 괜히 얼쩡거리지 마. 다른 사람 만나는 것 같더라. 걔도 좀 자유롭게 살아야지.”
“개소리하지 마.”
“개소리인 것 같으면 확인해 보든가.”
싸한 표정을 지으며 박선호는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고, 김승재는 자리에 서서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 사무실로 급하게 들어온 나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뉴욕에 있는 사이먼과 화상채팅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사이먼을 볼 수 있었다. 금발에 파란 눈을 한 그는 4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나는 반갑게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사이먼!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나이는 그가 5살 많았지만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한국은 어때?]
“좋아. 내가 살던 곳이잖아. 편하지.”
[최고의 도시 뉴욕을 마다하고 서울에서 만족을 느끼다니, 어쩐지 서운하네.]
“뉴욕은 어때?”
[더할 나위 없지.]
으쓱 어깨를 올리며 과한 제스처를 하는 것이 여전하다는 생각에 픽 웃음이 났다. 가벼운 근황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보내준 포트폴리오는 봤어?”
그는 뉴욕 메이저 갤러리로 꼽히는 일루전 갤러리의 헤드디렉터이다. 나는 뉴욕에 있을 때 일루전에 자주 갔고, 평소 나의 팬이었다는 그와 친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웠다.
[인상적인 작가야. 하지만 아직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않은 작가를 우리 갤러리에 전시하는 건 어려워.]
“그냥 해달라는 것이 아니잖아.”
[알겠지만 우린 신인 작가가 없어.]
“서울이라는 시장이 탐나지 않아? 일루전 갤러리 서울 지점을 생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시장 반응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텐데?”
일루전 갤러리는 서울 진출을 검토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사이먼은 놀랐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이 업계에 비밀이 어디 있겠어.”
나는 아까 사이먼이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 올려보였다. 그는 새침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해. 하지만 난 민효성 작가보다는 조선웅 작가에 관심이 가. 조 작가라면 이야기해 볼 수 있어.]
“그럼 조 작가 이야기해 보고, 민 작가를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검토해줄 수 있는지 말해봐.”
[하여간 집요하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사이먼이 뚱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갤러리스트가 집요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작가의 이름을 알리겠어.”
그 말에 사이먼이 픽 웃었다.
[그거야 그렇지. 일단 개인전하고, 우리 갤러리 아닌 다른 해외 갤러리에서 개인전이나 단체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긍정적으로 검토해볼게.]
“알았어. 조언해줘서 고마워.”
[갤러리 운영은 잘되고 있는 거야?]
“잘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 언제 한번 서울에 놀러와. 내가 최상의 코스로 대접할게.”
[알았어!]
그때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내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아니었다. 사이먼의 핸드폰이었다.
[나 지금 가봐야 해서 끊어야 할 것 같아.]
“응. 잘 지내.”
[너도.]
그렇게 화상채팅을 통한 회의는 끝났다.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허탈함이 밀려왔다.
“뉴욕 시장이 뚫기 어려울 건 알았지만, 정말 쉽지 않네.”
미술계에서 인맥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인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지표가 어느 정도 있어야 인맥도 소용이 있는 것이다. 현재 민효성은 아무런 객관적인 지표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개인전을 하지도 않았고, 수상 경험도 없으니까.”
생각보다 더 막막한 상황이다. 너무 무리한 목표를 세운 걸까, 답답한 기분이 들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고,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제리 왕에게서 온 전화였기 때문이다.
“제리!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갤러리 오픈 리셉션에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는 그를 갤러리 오픈에 초대했지만 여러 일정으로 바빴던 그는 오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갤러리 전시 기간과 겹쳐서 그런 건데 어쩌겠어요.”
그는 2년 전쯤 단순한 컬렉터가 아닌 갤러리스트의 길을 선택했다. 여태까지 모아왔던 그림들을 바탕으로 ‘제리 갤러리’를 열었고, 나도 갤러리 오픈 리셉션에 참석했다. 나는 갔는데 그는 오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이번에 일 때문에 서울에 들어가게 됐는데, 얼굴 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봬야죠. 언제 오세요?”
[다음 주에요.]
“좋습니다. 식사 같이하죠.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갤러리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통화를 마친 나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제리 갤러리’는 홍콩 메이저 갤러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급성장하는 곳 중 하나였다.
“잘하면 민효성 작가의 그림을 걸 수도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