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해외 프로젝트 (1)2022.03.09.
공항에서 나는 신재범과 함께 제리 왕을 기다렸다. 초조한 자세로 서있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민효성 작가 포트폴리오 안 보내셨죠?”
“네. 포트폴리오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갤러리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는 이미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직접 보여주는 길을 택했다.
“확실히 직접 보면 감흥이 다르죠. 저도 그편이 경쟁력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재범의 얼굴은 걱정스러웠다.
“걱정되는 부분이 있으세요?”
“컬렉터 왕 회장은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지만, 갤러리스트 왕 회장은 까다로워서요.”
홍콩에서 일한 적이 있는 그는 제리 왕과도 친분이 있었다. 아직도 홍콩에서 일하고 있는 예전 동료들을 통해서 확인한 결과, 갤러리스트 제리 왕은 컬렉터 제리 왕과 달리 날카롭고 상업성을 따졌다.
“그렇죠. 갤러리스트 시작하면서 저소득층을 위한 문화 시설을 확충하셨다구요?”
“네. 컬렉터 때부터 하셨던 일이지만 최근 규모가 커졌습니다.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한 것이라는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목적이 어쨌든 좋은 일이니 지지한다는 평가가 혼재합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 조금 씁쓸하다. 갤러리스트의 이미지가 워낙 상업적이다 보니 그런 활동들마저 순수성을 의심받는 것이다.
“왕 회장님하고 신 디렉터님이 아는 사이라니까 다행이에요. 혼자 감당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스러웠거든요.”
“제가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되죠.”
그때 제리 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큰 캐리어 두 개를 카트에 싣고 나왔다.
“제리!”
손을 흔드는 나를 알아보고 그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이렇게 나와 주다니 정말 고마워요.”
“왕 회장님이 오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나는 반가움을 격한 악수로 표현했다. 비즈니스와 상관없이 그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그의 시선이 옆에 있는 신재범에게 닿았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네. 이렇게 뵙게 되네요.”
제리 왕과 신재범도 악수를 나누고,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신재범은 운전을 맡았고, 나는 제리 왕과 나란히 앉았다.
“바쁜데 무리해서 나온 거 아니에요?”
“없는 시간도 내야죠.”
“그만큼 바쁘지 않은 게 아니구요?”
장난스런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그렇네요. 실무는 다 저희 디렉터님들이 해주시거든요.”
“악덕 사장이네요. 신 디렉터, 원한다면 우리 갤러리로 와요!”
환하게 웃으며 신재범이 답했다.
“네.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신 디렉터님, 이거 서운한데요?”
“그럼 제가 안 가도록 더 잘해주세요.”
신재범의 말에 모두 웃음이 터져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부디 갤러리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나는 제리 왕을 보고 물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많이 고픕니다. 한 대표만 믿고, 기내식도 일부러 먹지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드시지 그러셨어요.”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타고 온 좌석은 이코노미도, 비즈니스도 아닌 퍼스트 클래스다. 퍼스트 클래스라면 기내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음식이 나온다. 그런데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니……. 음식을 소개하는 입장에서 부담이 확 됐다. 그렇지만 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었다.
“잘하셨습니다. 이왕 먹을 것 맛있는 걸로 먹어야죠.”
“한 대표가 그렇게 자신하니, 어디로 갈지 더 기대가 되는데요?”
“기대 마음껏 하셔도 좋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고 불안한 손을 감췄다. * 자주 가는 한정식 가게에 도착했다. 항상 제몫을 잘해주는 서빙 직원이 적절한 영어 인사로 분위기를 돋았다. 다음번에 올 때 봉투를 다시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직원이 나가고 나는 제리 왕에게 말했다.
“어서 드시죠.”
“잘 먹을게요.”
젓가락을 든 제리 왕이 갈비찜을 하나 들고 꼭꼭 씹었다. 나와 신재범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수저를 들지 않고 제리왕의 모습을 주시했다. 얼굴이 무표정하자 입이 바싹 마른다. 맛이 없는 건가? 그때 그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더니 환하게 말했다.
“정말 맛있네요. 이 음식 이름이 뭔가요?”
“갈비찜입니다.”
신재범이 대답했고,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그제야 나와 신재범은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른 제리 왕이 신나서 입을 열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다음에 한국에 온다면 또 오고 싶군요.”
“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정말 말씀드릴 겁니다.”
“네. 꼭 말씀해 주세요.”
사람은 역시 밥을 먹으면 좀 너그러워진다. 누군가의 눈에는 이게 굉장히 구식의 비즈니스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같이 밥을 먹은 후에 회의가 잘되는 것은 실제로 통용되는 방법 중에 하나다. 실제로 여기에 관한 많은 심리학 연구들이 있다. 유명한 심리학 박사는 그 이유에 대해 식사를 하면서 많은 동작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흡연을 하는 사람들끼리 더 대화가 잘되는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한다. 갤러리가 있는 건물 앞에서 차가 멈췄고, 나는 제리 왕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타일로 ‘感’을 형상화한 조선웅의 작품을 그는 한참 바라봤다.
“어떠세요?”
“이 작품의 작가는 조선웅이 아닌 한 대표 아닌가요? 세계적인 갤러리가 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으니 말이에요.”
“그런 제 바람을 녹여서 작가님이 작품을 잘 만들어 주셨죠. 힘들 때 로비에서 이 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힘이 납니다.”
이해한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 작가를 한번 보고 싶군요.”
“네. 일정이 맞으면 꼭 봤으면 좋겠어요.”
제리 왕은 작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민효성의 작품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제리는 큰 규모 때문에 눈이 커졌다.
“이렇게 큰 규모일 줄은 몰랐어요.”
“미래를 생각하면서 규모를 좀 크게 만들어 봤습니다.”
“깔끔하죠?”
신재범의 물음에 제리 왕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둘러봤다. 현재 갤러리에는 내가 소장한 작품들, 그리고 전속 작가인 조선웅과 민효성의 작품이 있었다. 내가 소장중인 외국 유명 작가의 그림을 보고 신기해했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제프쿤스의 작품들도 있네요?”
“뉴욕에 있을 때 구입했죠.”
“경매에 나오지 않는 것들 아닌가요?”
“갤러리스트와 친분이 있어서 구입했어요.”
뉴욕이나 런던 갤러리에서는 돈이 많아도 유명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갤러리스트가 소장자를 관리하기 때문이다. 작품 값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다 안다는 듯 제리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친분 때문이 아니라 세계적인 경매사이기 때문이죠.”
딱 좋은 타이밍에 신재범이 끼어들어 동의를 표했다.
“아무래도 대표님이 소장한 작품이면 가격이 낮아질 리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아니라곤 못하겠네요.”
제리 왕은 발걸음을 옮기면서 작품을 보았다. 민효성의 그림을 그냥 지나치려 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민효성 작가라고, 우리 갤러리 전속 작가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제야 제리는 민효성의 작품을 지그시 보았다. 이렇게 지나쳤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아트페어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꽃 그림인데도 제리 왕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한참 봐도 작품에 대한 느낌을 말하지 않자 신재범이 물었다.
“어떤가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잘 모르겠다는 말은 곧 별로라는 말이었다. 기대한 바가 컸기에 실망감이 들었다. 신재범이 무언가 더 설명하려는 것을, 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
“언젠가는 민 작가가 왕 회장님의 마음도 흔들었으면 좋겠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싱긋 웃은 그가 발걸음을 옮겼고, 신재범이 나에게 와서 속삭였다.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이따 사무실에서 한 번 더 이야기하려구요. 개인적 감상과 별개로 비즈니스 입장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죠.”
“그렇죠.”
제발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김승재는 뒷골목에 세워진 차로 다가가 조수석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흥신소 직원은 평소와 달리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김승재는 물었다.
“사진은 메신저로 보내라니까, 귀찮게 사람을 왜 불러내?”
“입금을 안 해주시니까 이러는 것 아닙니까.”
직원의 눈에는 울분이 차 있었다. 돈을 곧 입금하겠다는 말을 믿고 한지감을 납치하는 데 가담했다. 하지만 김승재는 고작 천만 원짜리 시계만 주었을 뿐, 나머지 사천만 원을 입금하지 않았다. 그런 흥신소 직원의 모습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자신에게 저런 태도를 보인다며 김승재는 화가 났다. 그래도 약을 먹고 나와서인지 눈이 뒤집어지진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1억짜리야. 중고로 팔아도 5천은 받아. 이제 됐지?”
안경에서 뭐라도 보려고 난리칠 때, 지금은 그만둔 예전의 남자 비서가 삼원 백화점에서 가져온 시계였다.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직원은 시계를 받아들었다.
“정말 그 정도 값을 하는 거 맞습니까?”
“내가 너랑 지금 장난하는 거 같냐?”
김승재의 눈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희번덕였다.
“아……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사진 빨리 내놔.”
직원은 얼른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김승재는 사진을 꺼내보았다. 사진 속 이수지는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이 자식 뭐야?”
“ER에 시훈이라고 합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무슨 ER!”
김승재는 ER의 의미를 응급실 의사로 이해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직원은 겁을 먹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급실이 아니라…… 아이돌입니다.”
“아이돌?”
믿을 수가 없었다. 이수지는 아이돌에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이수지가 왜 아이돌을 만나!”
씩씩거리던 그가 갑자기 껄껄거리면서 웃었고, 이중인격 같은 그 온도차에 직원은 덜덜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수지 나한테 보여주려고 쇼하는 거야. 그렇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너무 무서워 말이 헛나왔다. 김승재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왜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제가 붙기 전에 ER 팬클럽 커뮤니티에서…… 이수지와 비슷한 실루엣을 가진 여자와 시훈이 함께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고 하더라구요…….”
바로 멱살이 잡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김승재는 차에서 내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때 김승재가 미친 듯이 차를 때렸다.
“아악! 아아악!”
김승재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수지에게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생겼다니……. 자신은 많은 여자들과 밤을 보내도, 이수지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막연히 남자가 생기면 한지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니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돌과 만나다니, 더더욱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동차는 사고가 난 것처럼 여기저기 움푹 파였다. 그의 손도 피멍으로 물들 때쯤 그는 차를 때리는 행위를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강정휘의 제안을 떠올렸다. 이대로라면 안경으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러니, 정말 짜증나지만 강정휘의 말대로 안경을 넘기고 수익을 취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 갤러리를 다 둘러본 제리 왕에게 나는 사무실에서 차를 대접했다.
“갤러리가 어떠셨는지 궁금하군요.”
“즐거웠습니다. 리셉션에 오지 못한 것이 정말 안타깝더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나는 홀짝 차를 마시고 말을 꺼냈다.
“아까 보신 민효성 작가 말입니다. 1월달에 개인전을 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해외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하고 싶어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해외에서요?”
신인작가가 해외에서 전시, 그것도 개인전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제리 왕의 눈이 커졌다.
“네. 만약 받아들이는 갤러리가 있다면, 해외 갤러리 소속 작가의 작품 전시를 할 예정입니다.”
“흐음……. 그렇군요.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무래도 해외에서 인정받은 작가라는 것이 주는 임팩트가 있을 테니까요.”
나는 긴장했지만 여유로운 척하며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저희와 그런 프로젝트를 하는 첫 해외 갤러리가 ‘제리 갤러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묵묵히 듣던 그가 나를 정면으로 보면서 물었다.
“홍콩에서 급성장하는 갤러리라는 것 외에, 내 갤러리를 원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제리 갤러리’의 어떤 가치에 공감하냐는 물음이다.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민효성의 해외 프로젝트는 그대로 날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