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해외 프로젝트 (3) (201/226)

201화 해외 프로젝트 (3)2022.03.14.

제리 왕의 눈을 보면서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16560311159902.jpg“민 작가님을 설득해보겠습니다.”

16560311159907.jpg“싫다고 하면요?”

16560311159902.jpg“싫다고 하면 다른 작가님을 반드시 구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조선웅 작가님에게 양해를 구해보고, 그것도 안 되면 다른 갤러리에 SOS를 쳐야죠.”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좋은 취지이기에 작가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지그시 그가 나를 보는데 꼭 속까지 꿰뚫어보는 느낌이다.

16560311159907.jpg“해외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싶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겁니까?”

16560311159902.jpg“네. 맞습니다.”

지나친 솔직함이 부담스러운지 제리 왕의 얼굴이 굳었다. 참 이상한 것이, 사람들은 솔직하게 말하라 하면서도 막상 솔직하게 답하면 얼굴을 찌푸린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16560311159902.jpg“하지만 궁극적으로 제 목표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6560311159907.jpg“한 대표의 목표요?”

16560311159902.jpg“네. ‘하우저 앤드 워스’ 같은 갤러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여서요.”

16560311159907.jpg“아아. 한 대표가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16560311159902.jpg“아직 비밀입니다. 제가 이런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신 디렉터님밖에 모르세요.”

나는 1급 기밀이라도 이야기하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픽 웃음을 터트린 그가 말했다.

16560311159907.jpg“나는 한 대표가 세계적인 갤러리를 꿈꾸고 있다고만 생각했어요. 로비에 있는 작품만 봐도 그런 야망이 느껴졌거든요.”

16560311159902.jpg“그런 야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어떤 사람이라도 쉽게 올 수 있는 갤러리를 만드는 거예요. 미술이 일반 사람들에게 결코 쉽지 않잖아요.”

16560311159907.jpg“그렇죠. 그런데 고미술품까지 다루는 갤러리를 원하는 것 아니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16560311159902.jpg“고미술부터 근현대미술까지 다 만날 수 있는 갤러리인 동시에, 누구나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갤러리였으면 좋겠어요.”

16560311159907.jpg“목표가 정말 높은데요? 한 대표가 골동상이었으니까 고미술은 이해가 가는데, 누구나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갤러리에 대한 목표는 왜 생긴 거죠?”

갤러리의 고객들은 대부분 자산가들이었고, 그렇기에 나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금 비약해서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차분하게 입술을 떼었다.

16560311159902.jpg“서른 넘어서 처음 갤러리라는 곳에 가봤는데, 주눅이 들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 한참 걸렸어요.”

강정휘의 초대로 갤러리에 갔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보안직원이 날 붙잡고 뭐라고 했던 것도 아닌데 문턱을 넘기도 힘들었다. 제리 왕은 좀 놀란 얼굴이었다.

16560311159907.jpg“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다녀서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어요.”

16560311159902.jpg“그럴 수 있죠. 전 그때 기분이 너무 선명해서, 일반 사람들도 조금 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갤러리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시작하는 입장이니까 그런 가치를 이루어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그렇지만 이번 일은 궁극적으로 비슷한 가치이기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16560311159907.jpg“그렇네요.”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16560311159902.jpg“혹시 오해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민 작가님을 설득해 보겠다고 말씀드린 건 그분의 성격 때문이에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어려워하시는 경향이 있어서요. 아이들이라고 하면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16560311159907.jpg“이거, 내가 오해했군요.”

그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고, 나는 미소로 괜찮다는 답을 했다.

16560311159902.jpg“공짜는 아닙니다. 나중에 서울에 있는 저소득층 지원 시설과 연결시켜 드릴 테니, 그때 홍콩 작가님들 오실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16560311159907.jpg“당연히 그래야죠!”

시원스런 제리 왕의 대답에 나는 미소 지었다.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결과다. * 민효성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봤다.

16560311159907.jpg“홍콩 저소득층 지원 프로그램이요?”

16560311159902.jpg“네. 한 가지 주제를 잡아서 아이들이 작품을 만드는 걸 봐 주시면 돼요.”

16560311159907.jpg“저……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생계 때문에 학원 알바를 한 적이 있는데, 일주일 만에 잘렸어요……. 못 가르친다고…….”

16560311159902.jpg“가르치는 게 아니라 같이 놀아주시면 돼요.”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리 왕에게 잘 보여야 해서가 아니라, 민효성에게 하나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짧은 여행을 통해서도 얻어오는 것이 있다. 민효성은 가능성이 있지만 너무 자신의 틀이 강하다. 여태까지 해 본 적 없는 일을 하면서 그 틀을 깨는 것도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신재범도 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16560311159902.jpg“명절에 조카들 보는 거랑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16560311159907.jpg“그런 거라면 더 자신이 없어요. 저 그렇게 재밌는 사람이 아니에요……. 조카들이…… 맨날 노잼이라고 놀린다구요.”

이제 비장의 카드를 꺼낼 타이밍이다.

16560311159902.jpg“그럼 조선웅 작가님하고 같이 가는 건 어때요?”

민효성이 갤러리에 들어오고 나서 조선웅을 소개시켜 줬고, 두 사람은 성향이 비슷해서인지 나이 차이가 있는데도 빨리 친해졌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16560311159907.jpg“선웅 형이랑요?”

16560311159902.jpg“네. 그럼 좀 덜 부담스럽지 않겠어요?”

16560311159907.jpg“확실히…… 그렇죠. 근데 형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저랑 가면 형이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가는 입장이니까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물음에는 신재범이 답했다.

16560311244621.jpg“대표님이 통화하셨는데, 흔쾌히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두 사람을 묶으면 괜찮을 것 같아 민효성을 만나기 전에 미리 조선웅과 통화를 했다.

16560311159907.jpg“정말요? 다행이다!”

좋아하는 것도 잠시 민효성은 의아하게 물었다.

16560311159907.jpg“그런데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어요?”

16560311159902.jpg“저는 개인적으로 작가님이 혼자 해보셨으면 해서요.”

16560311159907.jpg“아…… 그건 좀 무리예요.”

슬쩍 지나가듯이 신재범이 말했다.

16560311244621.jpg“이번에 해보시고 괜찮으시면 다음에는 혼자 해보시는 거 어때요?”

16560311159907.jpg“일단 해보고 생각해볼게요.”

나와 신재범은 민효성을 배웅하고 다시 갤러리로 돌아왔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마음이 가볍다.

16560311159902.jpg“민 작가가 수락해서 다행이에요.”

16560311244621.jpg“대표님의 노련함 덕분이죠.”

16560311159902.jpg“제 노련함이요?”

영문을 모르고 반문하는 나에게, 신재범이 그러지 말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16560311244621.jpg“대표님. 선수끼리 왜 이러십니까.”

16560311159902.jpg“제가 뭐 어쨌는데요?”

16560311244621.jpg“일부러 처음에 조선웅 작가와 둘이 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신 거 아닙니까. 그 제안을 처음에 하면 고민할 테지만, 두 번째에 하면 쉽게 받아들일 테니까요.”

사람 마음이 그렇다. 처음에 자신이 하기 힘든 제안을 받으면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전에 더 힘든 제안을 받았다는 전제가 붙으면 어떨까?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안도감, 상대방의 제안을 이미 거절했다는 미안함이 뒤섞여 좀 더 쉽게 긍정적인 답변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맹세코 계산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적어도 이번에는 그렇다.

16560311159902.jpg“저 계산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이번에는 진짜……!”

16560311244621.jpg“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신재범이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데, 전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억울하다! 억울한 나를 두고 신재범은 앞서 나갔고, 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16560311272313.jpg

16560311159902.jpg“저 정말 계산하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16560311244621.jpg“알겠다니까요.”

16560311159902.jpg“전혀 알겠다는 표정이 아니잖아요!”

16560311244621.jpg“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말투는 그가 지금 반대로 말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 공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김승재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강정휘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반은 무조건 김승재의 차지다. 그 사실에 기분이 좋은 김승재는 소파에 늘어졌고, 강정휘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 앞에 섰다.

16560311301244.jpg“이제 줘야지.”

1656031130125.jpg“거참 성질도 급하셔라.”

16560311301244.jpg“얼른, 내놔.”

1656031130125.jpg“누가 안 준대?”

16560311301244.jpg“그러니까 지금 당장 주라고.”

사나운 강정휘의 태도가 김승재의 신경을 건드렸다.

1656031130125.jpg“이딴 식으로 나오면 안 주는 수가 있어. 이제부터 네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65%는 무조건 내 거야. 잊었어?”

16560311301244.jpg“그럼 내 이름으로 어떤 경제활동도 하지 않을 거야. 차명계좌 만드는 거, 재벌들만 할 수 있는 거 아니거든.”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김승재는 움찔했다. 경솔함을 넘어선 멍청함에 강정휘는 기가 막혔다. 2년 전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건만, 이수지와 이혼 이후에 한지감에게 집착하다 보니 저렇게 망가졌다.

1656031130125.jpg“하면 될 거 아니야.”

그는 눈치를 보면서 소파에서 일어서 호흡을 가다듬고 귓불로 양손을 가져갔다. 한지감이 했던 것을 떠올리며 귓바퀴를 타고 천천히 올라왔다. 그랬더니 안경이 잡히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홀린 듯이 안경을 보던 강정휘는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김승재는 간발의 차로 안경을 빼앗기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로 강정휘가 으르렁거렸다.

16560311301244.jpg“뭐하는 거야?”

1656031130125.jpg“내가 주는 거야. 네가 가져가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세우는 그를 강정휘는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순순히 맞춰줬다.

16560311301244.jpg“알았어.”

안경을 가지는데 그깟 장단 좀 맞춰주는 것이 대수랴. 그제야 김승재는 우월감에 가득 차서 안경을 강정휘에게 주었고, 그녀는 천천히 안경을 썼다. 안경이 흡수되면서 온몸에 전류가 흘렀고, 메시지가 떴다. [1단계 ‘구매가격’이 제공됩니다.] 그녀는 얼른 벽에 걸린 작품을 바라보았다. [ 100,000,000원 ] 뭔가 색다른 정보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강정휘는 실망했다.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내던 김승재가 물었다.

1656031130125.jpg“뭐가 보여?”

16560311301244.jpg“구매 가격이 보여. 저 그림 1억에 샀지?”

1656031130125.jpg“응. 그것 말고는?”

16560311301244.jpg“다른 건 안 보여.”

그게 사실이었지만 강정휘에게 신뢰가 없는 김승재는 믿을 수가 없었다. 흥분한 그는 강정휘의 멱살을 잡았다.

1656031130125.jpg“수작 부리지 말고, 보이는 거 똑바로 말해!”

16560311301244.jpg“정말 그것만 보인다고!”

1656031130125.jpg“똑바로 말하라고!”

분노가 폭발한 그는 강정휘를 땅에 내동댕이쳤다.

16560311301244.jpg“아……!”

갑작스러운 고통에 강정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데도 김승재는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면서 강정휘에게 다가갔다. 위험을 느낀 강정휘가 피하려 했지만, 김승재가 다리로 배를 짓눌러서 그럴 수가 없었다.

16560311301244.jpg“아……!”

1656031130125.jpg“다시 내놔! 내놓으라고! 죽고 싶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일 듯 김승재가 눈을 희번덕거렸지만 강정휘는 양손으로 옷을 꽉 쥐었다. 억지로 강정휘의 손을 떼어낸 김승재가 양손을 귓불로 가져가려 할 때였다.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김승재가 화들짝 놀랐다.

16560311159907.jpg“경찰입니다. 주민신고를 듣고 왔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김승재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1656031130125.jpg“제대로 말 안 하면 안경 다시 가져올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허둥지둥 현관으로 가는 김승재를 강정휘는 비웃었다.

16560311301244.jpg“나는 뭐 가만히 있니?”

비서에게 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는데 딱 맞아 떨어졌다. 이제 안경이 손에 들어왔으니, 안경을 어떻게 작동시킬 건지만 알아내면 돈을 쓸어담을 수 있다. * 나는 사무실을 서성이면서 초조하게 핸드폰을 힐끗거렸다.

16560311159902.jpg“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홍콩 저소득층을 위한 프로그램이 끝났을 시간이었다. 조선웅와 민효성이 잘했는지 반응은 어땠는지 함께 간 신재범이 연락을 주기로 했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16560311358433.jpg“양 디렉터입니다.”

16560311159902.jpg“네. 들어오세요.”

16560311358433.jpg“저…… 강정휘 대표님이 오셨는데요.”

업계에서 강정휘와 나의 불편한 관계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오라는 소식은 안 오고, 보기 싫은 강정휘만 왔다니 짜증이 치솟았다. 하지만 내심 안경을 둘러싸고 강정휘와 김승재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16560311159902.jpg“들어오라고 하세요.”

16560311358433.jpg“네.”

잠시 후.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강정휘가 기가 막히다는 듯 사무실을 훑어봤다.

16560311301244.jpg“알칸다라 소파에 최고급 원목 책상. 아주 돈으로 처발랐네?”

16560311159902.jpg“네.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요?”

16560311301244.jpg“…….”

안 될 이유가 없었기에 강정휘는 대답을 삼키고, 떫디떫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16560311159902.jpg“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16560311301244.jpg“안경, 내가 썼어.”

16560311159902.jpg“오호. 결국 대표님한테 갔네요?”

하긴, 김승재는 쓰고 있어도 메시지가 뜨지 않으니 별수가 없었을 것이다.

16560311159902.jpg“김승재가 그냥 줬을 리는 없고, 수익 셰어하기로 했어요?”

16560311301244.jpg“맞아. 그래서 안경을 썼는데 구매 가격밖에 안 보여서 말이야.”

이상한 물건을 팔기라도 한 듯 나를 노려봤다.

16560311159902.jpg“꼭 나한테 책임을 묻는 거 같네요?”

16560311301244.jpg“너는 그걸로 돈을 벌었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거 아니야.”

방법까지 구걸하는 상황이라니, 기가 막히다.

16560311159902.jpg“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16560311301244.jpg“며칠 동안 있어도 구매가격만 보이니까 여길 왔지! 다른 정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앞에서 저렇게 당당하다니 얼굴 한번 두껍다. 짜증나는데 그냥 쫓아보낼까?

1656031141969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