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드라마 촬영 (1) (202/226)

202화 드라마 촬영 (1)20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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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증나는데 그냥 쫓아보낼까? 아니다. 강정휘는 몇 번이고 찾아와서 집요하게 나를 괴롭힐 것이다. 6년 동안 안경을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의 인간 아니던가.

16560311492433.jpg“내가 아는 건 다 이야기해 주죠. 그 대신 조건이 있어요.”

16560311492439.jpg“무슨 조건?”

16560311492433.jpg“더 이상 어떤 이유로도 나를 찾아오지 마세요.”

16560311492439.jpg“어차피 안경이 아니라면 널 찾아올 이유도 없어.”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16560311492433.jpg“지킬 거예요, 말 거예요?”

16560311492439.jpg“지킨다고!”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보는 내가 다 신기하다. 저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16560311492433.jpg“그럼 말씀드리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미션이 주어져야 해요.”

16560311492439.jpg“미션은 어떻게 주어지는 건데?”

16560311492433.jpg“확실하진 않지만, 지식이 쌓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에요.”

16560311492439.jpg“그럼 그냥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거야?”

16560311492433.jpg“네.”

강정휘는 짜증나게 하려고 나는 일부러 환하게 미소지었다. 약이 오른 강정휘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16560311492439.jpg“몇 단계까지 있는데?”

16560311492433.jpg“5단계까지요. 2단계는 진위여부, 3단계는 최고가, 4단계는 연대와 작가, 5단계는 특이사항이에요.”

16560311492439.jpg“특이사항?”

돈 냄새를 맡은 강정휘의 눈이 번뜩였다.

16560311492433.jpg“네. 돈과 관련된 특이사항들이 나와요. 여기까지가 제가 아는 전부예요.”

16560311492439.jpg“만약에 미션을 통과하지 못하면?”

16560311492433.jpg“그거야 저도 모르죠.”

16560311492439.jpg“뭐?”

인상을 찌푸린 강정휘가 나무라듯 나를 봤다.

16560311492433.jpg“한 번도 미션을 성공 못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모르죠.”

16560311492439.jpg“그게 말이 돼?”

16560311492433.jpg“그러게요. 그게 엄청난 기록이었다는 걸 지금 알았네요. 정 궁금하시면 대표님이 직접 해보시면 되겠네요.”

헛웃음을 지은 강정휘가 나를 노려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기다리던 신재범에게서 온 소식이었다.

16560311492433.jpg“중요한 통화라서요. 불청객은 이만 나가 주시죠.”

16560311492439.jpg“안 나가면?”

16560311492433.jpg“경찰 부를 거예요. ‘감 갤러리’에서 강정휘가 쫓겨났다는 소문을 업계에 뿌리고 싶으신 건 아니시죠?”

이를 악문 강정휘가 씩씩거리면서 사무실을 나가면서 쾅 문을 닫았다.

16560311492433.jpg“박력이 넘치시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나는 신재범의 전화를 받았다.

16560311492433.jpg“네.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잘 하셨어요?”

16560311556761.jpg[그럼요. 민 작가님도 조 작가님도 걱정이 무색할 만큼 잘 하셨습니다. 아이들도 두 분을 좋아하더라구요. 프로그램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져서 연락 빨리 못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16560311492433.jpg“아니에요. 다행이네요.”

조선웅과 민효성이 잘했다니 다행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했다는 것이 흡족하다.

16560311556761.jpg[대표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으시겠어요?]

나쁜 소식이라는 말에 나는 긴장했다.

16560311492433.jpg“일단 좋은 소식부터 듣죠.”

16560311556761.jpg[왕 회장님이 조선웅 작가, 민효성 작가 개인전을 갤러리에서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16560311492433.jpg“정말이에요?”

16560311556761.jpg[네! 정말입니다. 두 분이 프로그램 열심히 하시는 것 보고 감동받으셨습니다.]

홍콩에서 두 사람의 개인전을 열 수 있다니 꿈만 같다. 하지만 난 곧 나쁜 소식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16560311492433.jpg“나쁜 소식은…… 뭐죠?”

16560311556761.jpg[나쁜 소식은…….]

신재범이 푹 내쉬는 한숨 때문에 입이 바싹 말랐다.

16560311556761.jpg[드라마 방영이 3월초로 앞당겨지면서 당장 다음 주부터 촬영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16560311492433.jpg“3월초요?”

16560311556761.jpg[네. 앞에 편성되었던 드라마가 펑크 나서 앞당겨졌다고 하네요. 그래서 저희 갤러리 씬 빨리 찍을 수 없냐고 연락 왔습니다.]

16560311492433.jpg“전 정말 안 좋은 일인 줄 알고 긴장했어요. 번거롭기는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나의 말에도 신재범은 시무룩하게 답했다.

16560311556761.jpg[방송 쪽이 원래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정과 다르게 흘러가다 보니 좀 불안해서요.]

16560311492433.jpg“그거야 그렇죠. 잘되길 바라야죠.”

드라마가 잘되어야 갤러리가 주목을 받으니, 신재범 입장에서는 하나의 변동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6560311556761.jpg[대표님과 서 경매사님 특별출연 일정도 당겨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이번 주 내로 촬영해야 한다는데 가능하실까요?]

16560311492433.jpg“저야 어떻게든 시간 내면 되는데 서 팀장님이 문제죠. 연락드려 볼게요.”

카메오 출현에 대해 서정선은 자신 없어 했지만, 내가 평소처럼만 하면 된다고 말해서 허락받았다.

16560311492433.jpg“당겨졌다고 하면 더 긴장하실 것 같은데.”

하지만 서정선은 의외로 단순한 면이 있어서 잘 설득하면 된다. 나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연락처를 눌렀다. * 오후 10시, 평소라면 집에 있을 시간이었지만 나는 갤러리에 있었다. 오늘 바로 드라마 특별촬영이 갤러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스텝들과 배우들, 보조 출연자들까지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갤러리에 있었다. 거기에다 카메라, 조명 등 촬영장비까지 세팅되니 오프닝 리셉션 때보다 붐볐다. 신재범을 중심으로 디렉터들은 혹시 작품에 손상을 주는 일이 생길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작품을 지켰다. 나는 남자주인공 이윤호와 리허설을 했다.

16560311613252.jpg“제가 ‘갤러리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하면,”

16560311492433.jpg“‘사람들 흥미를 잡아 끄는 데는 이만한 게 없어. 결국 미술도 시장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거든.’라고 제가 대사를 치면 되는 거죠?”

16560311613252.jpg“네. 맞아요. 잘하시네요!”

그때 이윤호의 매니저가 불러서 그는 자리를 비웠다. 그는 최근 아시아권에서 각광받고 있는 한류스타이다. 고등학생 때 데뷔한 이후 청춘물을 연달아 찍으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청춘물에 잘 어울리는 훈훈한 외모가 한몫했다. 이번 드라마로 그는 연기 변신을 꾀하는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니 긴장돼 어쩔 줄 모르는 서정선의 모습이 보였다.

16560311492433.jpg“팀장님,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16560311613266.jpg“몰라……. 떨린단 말이야!”

그때 드라마 감독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16560311613252.jpg“카메오 출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16560311492433.jpg“서정선 경매사님이 정말 어렵게 결정하셨어요.”

16560311613252.jpg“네.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너스레를 떠는 나와 달리 서정선은 입이 얼었는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감독은 오늘 찍을 장면을 서정선에게 설명했다.

16560311613252.jpg“지연 씨가 13번 패들 들고 저기 앞쪽에 앉아있을 거구요. 57번 패들은 혜리 씨가 들고 있을 겁니다.”

16560311613266.jpg“아……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서정선이 답했고, 감독은 설명을 이어갔다.

16560311613252.jpg“한 대표님은 경합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뒤편에서 윤호 씨랑 대사 치시면 되구요.”

16560311492433.jpg“네. 알겠습니다.”

16560311613252.jpg“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하고 감독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16560311613266.jpg“나…… 오늘 잘할 수 있을까?”

서정선이 나를 보면서 울상 지었다.

16560311492433.jpg“그럼요. 팀장님이 아니면 누가 하겠어요.”

16560311613266.jpg“아니…… 나 못할 것 같아.”

16560311492433.jpg“맨날 경매하시는 분이 무슨 소리예요.”

16560311613266.jpg“그건 경매고……! 연기가 아니잖아……!”

16560311492433.jpg“평소처럼만 하시면 돼요.”

달래는데도 서정선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16560311613266.jpg“괜히 사람을 잘할 수 있다고 꼬셔서는!”

16560311492433.jpg“정말 잘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죠.”

나는 양 디렉터에게 따뜻한 차를 부탁해서 서정선의 손에 들려주었다.

16560311492433.jpg“마시면 좀 진정이 될 거예요.”

따듯한 차를 호호 불어 마신 서정선은 이내 안색이 돌아왔다. 그때 조연출이 외쳤다.

16560311613252.jpg“곧 슛 들어가겠습니다!”

조연출의 한마디에 모두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자리로 갔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정선이 말했다.

16560311613266.jpg“가기 싫어…….”

16560311492433.jpg“잘하실 거예요.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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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원을 하고 나도 정해진 자리로 갔고, 곧 남자주인공인 이윤호도 옆으로 왔다. 대본에서 그가 조선웅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나온다. 실력은 있지만 운이 안 좋은 그는 늘 주목을 받지 못해 기회를 잡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상황이다. 이윤호가 살갑게 속삭였다.

16560311613252.jpg“대사는 다 외우셨어요?”

16560311492433.jpg“외우긴 했는데, 잘할진 모르겠네요. 민폐 끼치면 안 되는데…….”

16560311613252.jpg“잘하실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

16560311492433.jpg“네! 윤호 씨만 믿을게요.”

확실히 일한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 보니 앞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서정선이 마음에 쓰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드라마 감독이 외쳤다.

16560311613252.jpg“레디 액션!”

그 목소리에 서정선은 바로 대사를 내뱉으면서 손을 뻗었다.

16560311613266.jpg“오십억, 13번 고객님 오십오…….”

서글서글했던 드라마 감독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16560311613252.jpg“NG!”

움찔 놀란 서정선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놀란 건 서정선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었던 나도, 사람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변할 수 있는지 놀랐다. 방금 전만 해도 세상 서글서글해 보였는데 말이다. 나의 표정을 알아차린 이윤호가 누가 들을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0311613252.jpg“슛만 들어가면 저렇게 날카로워지세요. 하하…….”

16560311492433.jpg“하하……. 그렇군요.”

감독이 뭐라고 조연출에게 하자 그가 서정선에게 달려가 말했다.

16560311613252.jpg“잘하셨는데, 조금만 더 긴장감 있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16560311613266.jpg“……긴장감 있게요?”

16560311613252.jpg“네.”

난감한 표정을 지은 서정선이 나를 보았다. 그녀가 뭐 때문에 어려워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실제로 경매가 진행될 때는 서서히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를 고조시키라니, 연기자가 아닌 경매사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가만히 있다가는 나중에 서정선에게 엄청난 원망을 들을 것 같아 조연출에게 다가갔다.

16560311492433.jpg“저 이게 경매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요. 보통 천천히 분위기를 고조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요.”

16560311613252.jpg“근데 대본이 이렇게 나왔다 보니까…….”

16560311492433.jpg“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실제로 경매를 하듯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진행하는 거예요. 영상 찍기 전에 2, 3작품만 진행해도 경매사님이 훨씬 감을 잘 잡으실 것 같은데.”

조연출이 그게 가능하겠냐는 듯 서정선을 봤다.

16560311613266.jpg“네. 그렇게만 해도 훨씬 긴장감 있게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요.”

16560311613252.jpg“네. 알겠습니다. 말씀드려 볼게요.”

조연출이 달려가 감독에게 상황을 전달했고, 그가 끄덕이자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16560311613252.jpg“그럼 첫 번째 작품은 알아서 하시고, 두 번째 작품에서 들어가시면 됩니다.”

16560311613266.jpg“네.”

그는 경매대 앞에 세팅된 현장석에 앉아있는 배우들과 보조출연자에게도 이런 상황을 설명했다.

16560311613252.jpg“첫 번째 작품은 경매사님이 알아서 하실 거구요. 두 번째 작품부터 진짜 촬영입니다. 제가 신호를 드릴 테니까 그때부터 대본대로 해주시면 돼요.”

16560311492433.jpg“네!”

16560311613266.jpg“넵!”

나는 얕은 한숨을 쉬며 서정선을 보았다.

16560311492433.jpg“평소에 했던 것처럼만 하시면 돼요.”

16560311613266.jpg“알았어……!”

긴장한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연출이 다시 외쳤다.

16560311613252.jpg“곧 슛 들어가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나는 파이팅을 동작으로 해 보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서정선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있어 나는 불안했다. 드라마 감독이 갤러리를 쩌렁쩌렁하게 외치면서 말했다.

16560311613252.jpg“레디 액션!”

16560311613266.jpg“탑 옥션 12월 메이저 경매에 와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저는 탑 옥션 수석 경매사 서정선입니다. 첫 작품을 보겠습니다. 로트 1번 이기환의 ‘산’입니다. 농담 표현이 뛰어난 수작으로 1983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스크린에 정말 산이 띄워져 있는 것처럼 서정선은 똑 부러지게 멘트했다.

16560311613266.jpg“시작가는 십칠억, 오천만 원씩 올라갑니다.”

아무도 패들을 들지 않았지만 서정선은 보이는 것처럼 손짓을 하면서 호가를 했다.

16560311613266.jpg“십칠억, 십칠억 오천, 46번 고객님 십팔억!”

금방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대단한 회복력이다.

16560311613266.jpg“71번 고객님께 십구억에 낙찰되었습니다.”

땅땅, 경매봉을 치면서 말했다. 정말 경매를 하듯 긴장감이 생겨나면서 드라마 감독을 비롯한 모두가 빨려들어갈듯 서정선을 봤다. 오랜 경매 경험으로 서정선은 자신이 촬영장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고, 저절로 어깨가 펴졌다. 이제 새로운 작품을 대면서 대본으로 들어가면 된다.

16560311613266.jpg“로트 2번 작품은 이세계의 ‘공(空)’입니다. 오십억부터 시작해 이억씩 올라갑니다.”

조연출이 배우와 보조출연자에게 신호를 주었고 패들이 올라왔다. 정말 경매를 하는 것처럼 서정선은 외쳤다.

16560311613266.jpg“오십억, 13번 고객님 오십이억. 57번 고객님 오십사억!”

훌륭하게 자신의 몫을 소화하는 서정선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물개박수를 쳤다. 이제 나와 이윤호의 차례였다. 경매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윤호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쳤다.

16560311613252.jpg“갤러리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이제 나만 대사를 잘하면 되는데 갑자기 긴장이 확 된다……. 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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