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유토피아 호텔 (1)2022.03.21.
조선웅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당연하죠.”
어제 국 PD에게 이윤호의 SNS 홍보를 제안했고, 그녀는 재빨리 이윤호의 소속사에 이런 제안을 알렸다. 예술가와 친하고, 예술을 즐기는 고급스런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소속사도 이윤호도 반응이 좋았다. 오늘 바로 그 사진을 찍는 날인데, 내성적인 조선웅은 이런 만남이 힘겨운 모양이다.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봤다.
“그래도 대표님이 있으셔서 다행이에요.”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모르겠습니다.”
처음 제안할 때는 나는 빠져있었지만, 제안을 들은 이윤호가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단 드라마 안에서 나와 이윤호가 함께 나오는 씬이 있기에, 나를 통해 조선웅 작가와 친분이 형성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세계적 경매사라는 특이한 이력도 화제성이 될 거란 계산도 깔려있었다. 내가 제안한 일이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아들였다.
“당연히 도움이 되죠. 근데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을까요?”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갤러리 근처의 펍이었고, 그중에 큰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펍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꽤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윤호를 보고 사람들이 혹시라도 몰릴까 조선웅은 걱정이 됐다.
“별일 없기를 바라야죠.”
나도 조선웅 같은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이곳을 하루 빌리면 그뿐이다. 그건 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때 선글라스를 낀 이윤호가 안으로 들어서면서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나는 친한 동생을 만나는 것처럼 손을 들었고, 그는 친한 형을 만나는 것처럼 반갑게 외쳤다.
“지감 형!”
그가 이쪽으로 오자 모든 시선이 따라왔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일어섰다.
“잘 지냈어?”
“그럼! 형은?”
“나도 잘 지냈지.”
당연한 얘기지만, 이렇게 친근하게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홍보를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았다. 벌써 여러 사람들이 이곳을 힐끗거리면서 핸드폰을 붙잡았다. 십중팔구 SNS에 이윤호를 봤다는 이야기를 올리는 중일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곳을 통째로 빌리지 않은 이유이자, 친한 척 연기하는 이유였다. 저런 SNS가 올라가면 이윤호와 나의 친분이 더 신뢰성이 생긴다. 여러 사람이 이 모습을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어색하게 서있는 조선웅을 보면서 말했다.
“조 작가님. 윤호예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활기찬 이윤호의 인사를 받자 조선웅의 어색함도 조금은 가셨다.
“제가 영광이죠. ‘푸르게 높게’ 재밌게 봤습니다.”
“제가 나온 드라마 보셨구나! 창피한데 기분이 좋아요.”
“연기 정말 잘하시던데요?”
조선웅이 예상보다 말을 더 잘해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자리에 앉아 나와 조선웅은 술을 마셨고, 이윤호는 사이다를 마셨다. 밖에 매니저가 대기하는 상황이었지만 음주운전 등 쓸데없는 구설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나는 미안한 얼굴로 사이다 잔을 봤다.
“작품에 집중해야 하는데 내가 괜히 불러낸 거 아니야?”
“에이. 몇 시간인데요. 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저야말로 분위기 깨서 미안하죠.”
이윤호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런 노고를 알아줬으면 하는 눈치라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작품 중인데 당연히 이해하지. 하여간 자기 관리 한번 철저하다.”
그때 가게 사장이 저벅저벅 다가와 감바스를 내려놨다. 시키지 않은 음식이기에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안 시켰는데요.”
“서비스입니다.”
험상궂은 인상의 사장이 굵직한 목소리로 답하며 말을 이어갔다.
“임대료 올리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건물도 내 소유이기 때문에 인사를 온 모양이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일인데 신경을 써준 것이 고마웠다.
“매번 밀리지 않아서 제가 감사하죠. 감바스 잘 먹겠습니다.”
“네! 저…… 그리고 실례가 아니라면…….”
인상과 달리 사장은 망설이면서 눈치를 봤다.
“말씀하세요.”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사장의 부탁을 들은 이윤호가 흔쾌히 끄덕였다.
“그럼요!”
이윤호와 찍은 사진이 사장의 SNS에 올라갔고, 애초의 계획처럼 친분의 신뢰성은 높아졌다. * 불안하게 거실을 서성이면서 나는 다영에게 물었다.
“아직 시청률 안 나왔어?”
“안 나왔어요.”
어젯밤에 ‘온 더 탑’ 드라마가 첫방송되었다. 이윤호가 나오고 미술계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느껴 화제성은 좋았다. 문제는 시청률이다. 드라마 관계자도 아니건만 첫방 시청률이 어떻게 나왔을지 초조했다. 소파에 앉은 다영이 그만 좀 하라는 듯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그렇게 불안해요?”
“당연하지.”
“이윤호 SNS로 관심 좀 끌었잖아요.”
친목 사진 SNS는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펍에서 찍은 사진뿐만 아니라 갤러리 로비에 전시된 조선웅의 작품까지 SNS에 올라가면서, 조선웅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얼마 전 진행한 조선웅의 개인전 때만 해도 연락을 피했던 언론사 7곳에서 연락이 왔고, 조선웅 작가의 작품을 문의한 사람만 어제 하루에만 20명이 넘었다. 그중에서 9명은 작품을 구매하겠다고 했다. 이윤호 SNS의 위력이 이 정도이니, 드라마는 더 파급력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청률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을 넘어서 초조했다.
“이왕 관심 끈 거, 더 확 끌어올리고 싶어서 그렇지.”
“욕심 많은 것 봐.”
계속 새로고침을 하던 다영의 손이 멈췄다.
“어?”
“나왔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다영이 말했다.
“8%예요.”
“적어도 10%는 나올 줄 알았는데…….”
시무룩하게 소파에 앉는 나를 보면서 다영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요새 시청률 이렇게 나오기 얼마나 힘든데! 5%도 잘 나온 거라구요.”
“10%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니야?”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잘 나온 거구나.”
그제야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웃을 수 있었다. 일어선 다영이 나를 등 떠밀었다.
“시청률 잘 나왔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호텔 갈 준비나 해요.”
“알았어!”
턱시도를 갖춰 입고 나는 다영 앞에 섰다. 1년 전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가게 근처 양복점에서 손수 맞춰 주신 턱시도였다.
“어때? 괜찮아?”
“아니요. 안 괜찮은데요.”
“별로야?”
시무룩한 나의 반응에 다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별로긴요. 너무 멋져서 안 괜찮다구요. 나만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뭐야.”
낯간지러운 칭찬이었지만 기분이 좋아 헤실거렸다.
“오늘 잘하고 와요.”
“당연히 잘해야지. 큰 고객이신 유토피아 호텔 오픈 파티인데.”
“그렇죠.”
턱시도까지 차려입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 그곳에는 시드 왓슨, 필립 린드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도 참석한다. 그들과의 친분을 만들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니 갤러리스트로서 좋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필립 린드는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작가라, 뉴욕에 있을 때도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기대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호텔 오픈 기념 자선 경매를 내가 맡았기 때문이다.
“아. 떨려. 오늘 잘할 수 있을까?”
“천하의 한지감이 뭘 그런 걸로 떨고 그래요.”
“경매 쉰 지 꽤 됐잖아.”
“지금이 3월이니까 벌써 반년 정도 됐네요.”
반년 동안 쉬어서 그런지 긴장이 몇 배로 된다.
“맞아.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갈지 않으면 녹스는 법이거든.”
“잘할 거니까 걱정 마요. 그것 때문에 장희정 선배랑 김 책임님하고 며칠 동안 호흡도 맞췄잖아요.”
이벤트성 경매라지만 혼선을 막으려면 보조 경매사가 필요하다. 혼자서 그 역할까지 해내는 것은 무리여서 김 책임과 장희정에게 SOS를 쳤고, 다행히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맞아. 두 분 덕분에 그래도 안정이 되긴 해.”
낯선 장소에서 유일한 익숙함이 두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영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서 팀장님이 보조 경매사 해주시겠다고 했다면서요?”
“응. 너무 진심으로 해주겠다고 하셔서 기겁했지.”
도움을 주려는 마음은 너무 감사하지만, 서정선이 경매사이고 내가 보조 경매사이면 모를까 반대의 경우는 내 마음이 불편했다. 선생님이 바닥에서 주무시는데 제자가 침대에서 자는 그런 느낌이랄까.
“오빠 왜 그렇게 고지식하냐고, 엄청 투덜거리셨어요.”
“나한테도 그러셨어. 그래도 안 돼. 서 팀장님이 보조 경매사를 하시면 내가 얼어붙을 것 같단 말이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다영이 문득 궁금한 게 떠오른 듯 나를 봤다.
“오빠, 경매사 하기로 결정하고 서 팀장님 봤을 때 후광 봤다고 했죠?”
“응. 서 팀장님뿐만 아니라 황덕현 대표님, 도균이 형 봤을 때도 그랬어.”
“그럼 남정숙 회장님에게서도 후광을 봤겠네요?”
나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아니. 못 봤어. 이상하다, 왜 안 보였지?”
갤러리를 시작하고 나서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은 남정숙이었다. 갤러리 그룹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중요한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덕분에 오픈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감 갤러리’는 빠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 보인 게 아니라 못 본 거 아니에요? 그때 갤러리 처음 시작해서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런가?”
정신없어서 보지 못했던 것일까? 생각에 잠기는데 다영이 나를 흔들었다.
“오빠. 시간 다 됐어요. 어서 가요.”
“진짜 나 혼자만 가?”
이미 다영이 안 가겠다고 단단히 못을 박은 상태였지만 혹시나 싶어 떠봤다.
“쓰읍! 또 그런다!”
“네가 좋아하는 필립 린드 작가도 오니까 그렇지. 한 번만 봤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고선…….”
얼마나 좋아하면 메신저 프로필도 필립 린드의 작품이다. 내가 초청 받은 행사가 아니었다면 다영은 좋다구나 하고 갔을 터였다. 다영이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말했다.
“당당하게 오빠 곁에 설 준비가 됐을 때, 그때 갈 거예요. 단지 오늘이 아닐 뿐이지!”
“쳇. 그런 기회가 언제 흔하게 와? 나 뉴욕 있을 때도 필립 린드는 못 봤단 말이야. 워낙 은둔형 작가라.”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친해져서 제가 준비되면 볼 수 있도록 해줘요!”
“알았어. 다녀올게.”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다영이 소리쳤다.
“잘할 수 있게 기도할게요!”
“응! 잘하고 올게.”
무사히 경매가 끝나길 바랄 뿐이다. * 호텔에 내리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울에서 보던 호텔들과는 기본적으로 스케일이 달랐다. 끝도 없이 보이는 넓은 부지에 듬성듬성 건물들이 보였다. 호텔이라기보다는 리조트 스케일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 데미안 허스트 등 유명한 작품들이 열 걸음마다 눈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는 듯 외국 궁전에나 있을 법한 고풍스런 샹들리에가 보였고, 벽면은 전부 흑백톤의 대리석이다.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있을까?
“와. 엄청 넓고 화려하네요. 꼭 라스베이거스 호텔 같아요.”
그런 나를 보고 이 과장이 픽 웃었다.
“규모 면에서는 그렇죠. 그런데 중국 고객님들 오시면 라스베거이스나 마카오 호텔에 비해 너무 수수하다고 컴플레인하세요.”
“거기에 비하면 모던한 편이죠.”
취향에 따라 이렇게 반응이 다르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 눈에는 이곳이 수수해 보였구나. 그 격차에 대해 알면서도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된다. * 파티 사회자가 영어로 나를 소개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경매사, 한지감 경매사님을 모십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나는 눈인사를 하면서 경매대로 들어섰다. 이미 앉아있는 김 책임과 장희정을 보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경매대에 서자 연회장을 가득 채운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랜만이라 아찔했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먼저 나는 영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유토피아 호텔 오프닝 파티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저는 경매사 한지감입니다.”
한국 호텔 오프닝 파티에서 왜 영어로 감사인사를 하는지 의아할 것이다. 유명 작가뿐만 아니라 해외 갤러리스트, 이름만 대면 아는 호텔 그룹의 총수 등 해외 인사가 대거 참여해서였다. 영어를 못할 경우 동시 통역사가 부스에서 말하는 통역을 들을 수 있도록 통역기를 준비했지만 그걸 쓴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 영어를 모국어처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작년에 경매사 일을 그만두고 갤러리스트로 변신을 꾀했습니다. 그래서 자선 경매 제안이 들어왔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하지만 좋은 목적에 동감하고 이렇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여러분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