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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유토피아 호텔 (2) (205/226)

205화 유토피아 호텔 (2)2022.03.23.

나는 능숙하게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처음에는 구경하는 사람들도 어느새 눈치게임을 하면서 패들을 들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모든 시선을 즐기면서 나는 경매봉을 두드리며 영어로 말했다.

16560312481107.jpg“21번 고객님께 육만 오천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지자 21번 패들은 들은 사람은 샴페인잔을 들어 기쁨을 표현했다. 그 사람은 전통 아랍 복장을 한 남성이었다. 자원이 풍족한 국가의 왕자 같은 느낌이다. 박수가 잦아들 때쯤 내 왼편에 있는 무대로 검은 천을 씌운 그림이 들어서자 관심이 쏠렸다.

16560312481107.jpg“이곳에 오신 분들 중에 이 작품을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내가 손짓하자 검은 천이 없어지면서 그림이 드러났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스크린에 떠오른 작품이 피카소의 ‘꿈’이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5만여 점의 작품을 그렸고, 비싼 작품 랭킹에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비싼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 월터를 그린 그림은 대부분 비싸고, 이 작품은 그녀를 그린 것이다. 피카소와 처음 만났을 때 마리는 미성년자였고, 그와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났다. 더 기가 막히는 건 피카소가 기혼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끊임없이 마리에게 구애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뒷목 잡는 스토리가 한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잘 알려진 여인들만 해도 7명이나 되고, 대부분 다른 여자가 생기면서 이전 여자와의 관계를 끝내는 형태를 띠었다. 이 그림을 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 그림을 애써 구매한 것은 유토피아 호텔의 야망 때문이었다. 피카소 이후 서양 미술사의 흐름이 바뀌었기에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면서도 상업적 가치도 높은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본격적인 아트 호텔은 없었다. 아트 호텔이라고 하고 그림 몇 점을 전시해 놓는 것이 전부일 때도 많았다. 유토피아 호텔은 자신들이 바로 그 흐름을 만드는 시작이 되는 상징이 될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사업성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나는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외쳤다.

16560312481107.jpg“피카소의 ‘꿈’입니다.”

내가 입을 열자 웅성대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16560312481107.jpg“이 작품 때문에 이곳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로트 33번 피카소의 ‘꿈’입니다. 피카소는 서양미술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201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5500만 달러에 팔렸다. 한국 돈으로 1000억이 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강남에 있는 큰 빌딩보다도 저 작은 그림이 비싼 것이다. 그렇게 비싼 그림을 왜 구입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도 그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림에 담긴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사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파고들면서 부추겼다.

16560312481107.jpg“피카소가 가진 의미처럼 아트 호텔이 그러한 역할을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경매에 응찰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의 목표는 2억 달러에 이 그림을 낙찰시키는 것이다. 무리한 금액이었지만 나는 이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안경으로 메시지를 볼 때는 그것이 내 기준이 되었지만, 안경이 없는 지금 내 목표는 내가 정한다. 비록 그것이 무모한 것일지라도!

16560312481107.jpg“일억 달러에서 시작, 오백만 달러씩 올라갑니다.”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패들이 올라왔고, 21번 고객이 가장 빨리 들었다.

16560312481107.jpg“21번 고객님 일억 달러! 일억 오백만. 일억 오백만. 49번 고객님 일억 천만!”

사람들은 홀린 듯이 패들을 들었고 나는 열정적으로 호가를 하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경매사가 흥분하면 경매의 중심을 잃게 된다. 그러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침착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16560312481107.jpg“일억 사천만, 52번 고객님 일억 사천오백만! 일억 오천만. 이제 천만 달러씩 올라갑니다.”

한 단계만 넘으면 이 작품의 최고가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패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당황해 멈칫하는데 김 책임이 나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 신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101번 패들을 든 사람이 보였다.

16560312481107.jpg“일억 육천만!”

호가를 외치고 다시 빠르게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지만 패들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끝인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도 차분하게 사람들을 보면서 물었다.

16560312481107.jpg“일억 칠천만 달러 없으십니까?”

패들을 드는 사람이 없다. 이제 그만 낙찰봉을 들어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낙찰 봉을 두드리려는데 49번 패들이 보였고, 나는 힘차게 내뱉었다.

16560312481107.jpg“49번 고객님 일억 칠천만 달러!”

그러자 101번 고객도 질 수 없다는 듯이 패들을 들었다.

16560312481107.jpg“101번 고객인 일억 팔천만 달러!”

조금만 더……! 조금만 더! 49번 고객이 다시 패들을 들었다.

16560312481107.jpg“일억 구천만!”

101번 고객이 고민하는 것이 느껴져 나는 필살기인 제스처를 썼다. 가만히 나를 보던 101번 고객이 거기에 홀려 패들을 들었다.

16560312481107.jpg“이억 달러!”

마음 같아서는 너무 좋아서 뛰고 싶었지만, 아직 경매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49번 고객이 패들을 올렸다.

16560312481107.jpg“49번 고객님 이억 천만 달러!”

질 수 없다는 듯 101번 고객도 응수했다.

16560312481107.jpg“101번 고객님 이억 이천만 달러!”

49번 고객이 고민하다 패들을 테이블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응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힘차게 낙찰봉을 두드렸다.

16560312481107.jpg“101번 고객님께 피카소의 ‘꿈’이 이억 이천만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큰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이어졌고, 점점 소리가 커져 연회장이 울려댔다. 내가 정한 목표를 넘어섰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았다. 안경이 있었다면 절대 ‘정한 목표’를 넘어서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안경이 보여준 최고가가 곧 ‘나의 목표’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오직 나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값진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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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매를 마치고 나는 김 책임, 장희정과 함께 비틀거리면서 대기실로 돌아왔다. 해냈다는 기쁨에 기분은 최고조였지만 너무 쏟아부어서인지 힘이 없었다.

16560312509708.jpg“오늘 진짜 수고 많았어. 한 대표!”

내 어깨를 두드리는 김 책임의 손에는 흥분감이 서려있었다.

16560312509708.jpg“내가 본 경매 중에 가장 재밌는 경매였어!”

16560312509708.jpg“저두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했다니까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장희정도 흥분을 토해냈다. 기쁘면서도 칭찬받는 상황이 살짝 민망하기도 했다.

16560312481107.jpg“뉴욕에서 했던 제 경매는 별로였어요? 이거 서운한데요.”

그 말에 당황한 김 책임이 멈칫했다.

16560312509708.jpg“……아니. 멋있었지.”

16560312481107.jpg“정말 별로였군요?”

16560312509708.jpg“아니야! 진짜 멋있었어. 근데 오늘이 더 멋있었던 거지.”

머뭇거리던 그가 은근슬쩍 말을 덧붙였다.

16560312509708.jpg“예전에도 멋있었지만 그때는 왠지 모르게 다 쏟아붓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거든. 그런데 오늘은 정말 완전히 쏟아부은 것 같았어.”

눈치를 보면서 장희정도 거들었다.

16560312509708.jpg“맞아요. 뉴욕에서 할 때는 멋진 쇼를 보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나중에도 두고두고 생각날 감동적인 영화를 본 느낌이에요.”

정곡을 찔려 나는 움찔했다. 사람들은 안경의 존재를 모를 뿐, 내가 한계를 정해놨다는 것을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안경에 매여서 나는 전부를 쏟아붓지 않고 안주했던 것이다.

16560312481107.jpg“인생 최고의 경매를 은퇴하고 나서 하니 아쉽네요. 오늘 정말 감사해요. 김 책임님 아니었으면 오늘 경매 제대로 못 했을 거예요.”

16560312509708.jpg“내가 하는 일인데 뭐.”

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분 좋아했다. 나는 장희정을 보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16560312481107.jpg“장 선배도 감사해요. 돈의 단위가 다르다 보니 헷갈렸을 텐데 너무 잘해주셨어요.”

16560312509708.jpg“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 거죠.”

16560312481107.jpg“그래도 혼동 오잖아요.”

프로그램이 되어 있다고 해도 단위가 달라지면 혼동이 오기 마련이다. 그런 부분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보다 경험이 없는 사람이 나을 수도 있었다. 백지 상태이기 때문에 적어도 헷갈릴 일은 없다. 하지만 장희정은 바싹 긴장한 상태에서 혼란스런 부분을 완전히 소화해냈다.

16560312481107.jpg“자선 경매라서 페이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언제 식사 대접 제대로 할게요.”

그때 이 과장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16560312509708.jpg“식사 대접은 제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언제 왔는지 그는 나를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장난스레 답했다.

16560312481107.jpg“제일 비싼 걸로 사달라고 해야겠어요.”

16560312509708.jpg“얼마든지요! 오늘 경매 너무 훌륭했습니다. 아니,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죠. 정말 완벽했습니다.”

16560312481107.jpg“너무 비행기 태워주시니까 부끄럽네요.”

16560312509708.jpg“비행기가 아니라 진심이에요. 쉬시다가 파티 즐기시면서 식사하시죠.”

‘식사’ 이야기에 김 책임과 장희정의 눈빛이 동시에 반짝였다. 경매하기 전에는 긴장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경매가 끝나면 허기가 몰려오곤 한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16560312481107.jpg“두 분은 먼저 가서 식사하세요.”

16560312509708.jpg“같이 안 가?”

16560312481107.jpg“전 조금만 쉬다가 갈게요.”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빼놓고 가는 것이 걸리는지, 김 책임과 장희정이 머뭇거렸다.

16560312481107.jpg“혼자서 편하게 쉬고 싶어서 그래요.”

16560312509708.jpg“알았어. 가자. 희정 씨.”

16560312509708.jpg“네.”

그렇게 김 책임과 장희정이 나갔고, 이 과장도 그 뒤를 따를 거라 여겼지만 그러지 않았다.

16560312509708.jpg“한 대표님, 이따 파티 끝나고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16560312481107.jpg“회장님이 보자고 하시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이 과장이 놀라서 물었다.

16560312509708.jpg“어떻게 아셨어요?”

16560312481107.jpg“그 정도 눈치도 없이 어떻게 비즈니스를 하겠어요.”

이 과장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지금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굳이 끝나고 시간을 내어 달라는 것은 높은 분이 보고 싶다는 것이다. 높은 분과의 만남을 거절할 갤러리스트는 없었다. 파티가 끝나면 매우 피곤할 테지만, 피곤을 이유로 이런 자리를 뒤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직원도 아닌 대표가 아닌가.

16560312481107.jpg“저야 좋죠.”

16560312509708.jpg“감사합니다. 그럼 쉬세요. 너무 쉬지는 마시구요. 대표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6560312481107.jpg“네. 금방 갈게요.”

이 과장이 나가고, 나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면서 눈을 붙였다. 10분쯤 지나고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보고 싶지 않은 존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로 말이다. * 코너를 돌면서 차가 흔들리자 강정휘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16560312619708.jpg“운전 똑바로 못해!”

16560312509708.jpg“죄……죄송합니다.”

운전 중인 비서가 고개를 조아렸다.

16560312619708.jpg“돈을 그렇게 받아가면서 운전 하나도 제대로 못해? 짤리고 싶어?”

원래도 신경질적인 사람인데 3개월 전부터 더 심해졌다. 3개월 만에 강정휘는 5단계 특이사항까지 돌파했다. 30년 넘게 갤러리 일을 하다 보니 쌓인 지식이 워낙 많기도 했고, 미션 같은 경우 갤러리 직원들을 닦달하면 어렵지 않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 돈이 되기 시작하자 강정휘는 점점 더 거만해지고 막무가내가 됐다. 지금도 그랬다. 애초에 강정휘가 빨리 가야 한다면서 짜증을 있는 대로 낸 것이 문제였다. 속도를 내다 보니 코너를 돌 때 부드럽게 돌지 못한 것인데, 늘 그렇듯 강정휘는 관심이 없었다. 비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또 조아리는 것뿐이다.

16560312509708.jpg“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16560312619708.jpg“하여간 쓸모가 없어.”

그 말이 비수처럼 비서의 마음에 박혔지만 강정휘는 자신의 입술 색깔이 훨씬 중요했다. 이미 충분히 칠해진 입술에 새빨간 립스틱을 자꾸 덧칠했다. 한지감에게 안경을 쓴 자신이 이렇게 대단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16560312619708.jpg“얼마나 배가 아플까.”

덧칠을 마친 그녀는 핸드폰으로 부동산 정보들을 봤다. 한지감은 미술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그녀는 훨씬 큰 그림을 그렸다. 부동산 5단계까지 가면 그 다음은 기업을 인수할 것이다. 안경의 능력이라면 전 세계에서 최고 부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한지감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이런 대단한 물건을 빼앗겨서 화가 나있을 것이다.

16560312619708.jpg“살살 약을 올리면서 재미 좀 봐야지.”

한지감의 일그러지는 얼굴이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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