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유토피아 호텔 (3) (206/226)

206화 유토피아 호텔 (3)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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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휴식을 마치고 연회장으로 와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16560312706897.jpg“오늘 경매,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한 대표님 경매 보러 뉴욕에 가려고 했는데, 그만두셨다고 해서 너무 속상했어요.”

16560312706897.jpg“저도요. 오늘도 한 대표님 경매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너무 즐거웠어요.”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16560312706908.jpg“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16560312706897.jpg“어제 방영한 ‘온더탑’ 봤어요. 대표님, 이윤호 옆에서도 전혀 꿀리지가 않으시던데요?”

16560312706908.jpg“아이구. 사람들이 들으면 웃겠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도 거들었다.

16560312706897.jpg“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원래 미남이신 건 알았지만, 화면빨 정말 잘 받으시던데요?”

16560312706908.jpg“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 좋네요.”

16560312706897.jpg“어제 나온 작품이 조선웅 작가 작품이라면서요?”

16560312706908.jpg“네. 맞습니다. 어제 드라마 초반에 나왔던 갤러리, 저희 갤러리입니다.”

16560312706897.jpg“그 프라이빗한 경매가 이루어지던 곳이요?”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면서 나는 미소 지었다.

16560312706908.jpg“네. 그 장면 찍느라 서정선 경매사님이 정말 고생하셨어요.”

16560312706897.jpg“갤러리가 진짜 넓게 보이더라구요.”

16560312706908.jpg“진짜 넓은 정도는 아니고 조금 넓습니다.”

나는 넉살 좋게 장난을 쳤고,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도 사람들은 깔깔거리면서 웃어주었다. 드라마의 영향력은 컸다. 오늘 만난 사람 모두가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조선웅의 작품이 정말 멋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드라마를 통해 고뇌에 찬 젊은 예술가의 이야기가 더해지니 더 그럴듯해 보이는 모양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윤호의 SNS를 봤다며, 유명한 연예인과 친하다는 것에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윤호의 SNS에 올라간 조선웅의 작품을 사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이들도 많았다. 한마디로 드라마와 연예인 친분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다.

16560312706897.jpg“갤러리에 가면 조선웅 작가님 작품도 직접 볼 수 있는 거죠?”

16560312706908.jpg“그럼요. 로비에서부터 조 작가님의 작품이 반겨줍니다. 나중에 놀러오시면 다과라도 대접하겠습니다.”

16560312706897.jpg“정말이죠?”

16560312706908.jpg“그럼요.”

자연스럽게 나는 명함을 돌릴 수 있었다. 100장 가까이 가져온 명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보였다. 많은 사람에게 ‘감 갤러리’의 존재를 알려 뿌듯한 한편, 더 가져오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16560312734337.jpg“그 명함, 나도 가지고 싶네.”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 나는 멈칫했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두른 강정휘가 누가 봐도 부담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곳에 강정휘가 굳이 온 이유는 나 때문일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의 신경을 건드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럴 것 같아서 안경 작동 원리를 알려주며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한 건데, 믿은 내가 바보다. 그래서 나는 더 태연하게 반응했다.

16560312706908.jpg“당연히 드려야죠.”

내 명함을 받은 강정휘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16560312734337.jpg“근데 이름이 너무 후지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산뜻하게 받아쳤다.

16560312706908.jpg“그런가요? 저도 대표님 따라 ‘한지감 갤러리’라고 할걸 그랬나 봐요.”

16560312734337.jpg“글쎄. 그게 의미가 있을까? 대표의 이름을 거는 게 의미있는 건 대표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일 때만 가능한 것 같은데 말이야. 나처럼.”

자기는 하나의 브랜드고, 나는 아니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구만?

16560312706908.jpg“그렇죠. 하지만 브랜드가 없는 저로서는 직원들을 믿어야 하는 입장이라서요. 저와 모든 직원들, 그리고 작가님들의 ‘감’이 합쳐서 좋은 갤러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자가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

16560312706897.jpg“어머 그렇구나! 저는 그냥 한 대표님 이름을 따서만 그런 이름이 된 줄 알았어요.”

여자 옆에 있는 남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16560312706897.jpg“좋은 뜻이 담겨있는 이름이네요.”

사람들이 좋은 뜻이라고 입을 모으자 강정휘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든 주목은 자신이 받고, 나는 비참하게 찌그러져 있는 것이 그녀가 원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인간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돈을 다시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니 그 돈을 탐나는 인간들이 그녀에게 몰려드는 것뿐이었다. 그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강정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에게 시비를 건다. 도대체 언제 철이 들런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정휘는 다시 빈정거렸다.

16560312734337.jpg“아직 전속 작가가 두 명뿐이지? 갤러리 규모를 키우려면 다른 전속 작가가 있어야 할 텐데.”

‘그걸 왜 네가 걱정하세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

16560312706908.jpg“그렇죠. 다른 전속 작가 필요하죠. 안 그래도 알아보는 중이에요.”

16560312734337.jpg“3개월째 알아만 보는 중이구나. 보는 눈이 어지간히 없나 보네.”

‘안경이 없으니까 결정을 못하는 거지?’라는 말이다. 열이 받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16560312706908.jpg“좀 신중해지려구요. 갤러리를 한두 해 하다가 그만둘 것은 아니니까요.”

16560312734337.jpg“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잖아. 걱정돼서 그렇지. 내가 좀 도와줘?”

16560312706908.jpg“요새 바쁘신데 저까지 힘들게 해드릴 수는 없죠. 그리고 어떤 결정이든 ‘감 갤러리’ 대표인 제가 하는 것이 맞으니까요.”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내가 흔들리지도 않으니 강정휘는 열이 받아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가 내가 입은 턱시도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16560312734337.jpg“옷이 너무 별루다. 이런 자리에 올 때는 신경 써야지. T.P.O 몰라?”

싸악 바뀌는 내 표정을 보면서 그녀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16560312706908.jpg“이 옷, 아버지가 손수 맞춰주신 옷입니다. 대표님한테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한테는 귀한 옷이에요.”

순간 부모를 욕한 것이 된 강정휘는 사람들에게서 질타의 시선을 받고,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16560312734337.jpg“나……나는…… 그게 아니라…….”

16560312706908.jpg“취향이 다른 탓이겠죠. 하지만 저는 이 옷이 그 어떤 명품 브랜드보다 좋습니다. 가장 좋은 옷은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이지 않습니까. 또 옷은 그 사람의 성품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죠.”

쓰윽 나는 강정휘의 옷을 훑으면서 말을 이었다.

16560312706908.jpg“전설적인 의상디자이너 코코 샤넬도 말했죠. ‘항상 덜어내고, 더하지 말라.’ 그게 제 패션 철학입니다.”

너와 달리 나는 과시하지 않고, 절제하는 삶을 사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알아먹은 강정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16560312734337.jpg“너…… 이…….”

상태가 심상치 않다. 이럴 때는 빨리 빠지는 것이 좋았기에 나는 누군가를 본 척 반응했다.

16560312706908.jpg“아. 저 인사 드릴 분이 있어서요. 대표님, 봬서 반가웠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도 짧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쌩하니 떠나버렸다. 멀리서 잔뜩 약이 오른 강정휘의 얼굴이 보였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들었다. 나를 무섭게 노려보던 강정휘가 돌아서 연회장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16560312706908.jpg“그러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승리의 기분이 사라지자 갑작스러운 허기가 느껴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배를 어느 정도 채우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필립 린드를 찾았다.

16560312706908.jpg“사람이 너무 많아서 보이지를 않네. 있다 해도 모를 확률이 크지.”

필립 린드는 은둔형 작가로,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미술계에서 인맥이 중요한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유명 작가라 할지라도 파티에 종종 얼굴을 내민다. 거기서 만난 인맥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인맥이 아니더라도 트러블 메이커처럼 보여서 노이즈 마케팅에 활용하는 작가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 하지만 필립 린드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파티를 가도 그는 오지 않았고, 오직 작품에만 집중했으며 공식 석상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작가로 유명했다. 다른 작가들이 노이즈 마케팅으로 자신의 명성을 쌓을 동안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라는 호기심을 키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철저히 모든 비즈니스는 그의 매니저를 통해서 진행되었고, 그 어떤 기사에도 그의 사진이 실린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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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그가 이번 유토피아 호텔 오픈 리셉션 파티에 참석한다고 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공식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오는 것이어서 그는 포토라인에 서지 않았다고 했다. 이 과장이 나에게만 살짝 귀띔해준 정보였다. 그는 한 번도 한국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없었고, 그 첫 시작을 끊고 싶어 그의 매니저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신재범의 말로는 여태까지 나 말고도 그런 시도들이 많았으나 한 번도 긍정적인 답변이 온 적 없다고 했다.

16560312706908.jpg“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필립 린드를 보여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갤러리스트라면 누구나 탐낼 기회였다. 그처럼 보이는 사람을 알아보려고 뚫어져라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얼굴도 모르는데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16560312706908.jpg“이 과장님한테 물어봐야겠네.”

그때 누가 어깨를 톡톡 건드려 고개를 돌렸다.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남자 외국인, 그는 피카소의 꿈을 낙찰받은 101번 고객이었다.

16560312706908.jpg“안녕하세요. 101번 패들 들고 계셨던 고객, 맞죠?”

16560312706897.jpg“기억해요?”

16560312706908.jpg“그럼요. 다른 그림도 아니고 피카소의 ‘꿈’을 낙찰받은 분이시잖아요. 자리가 잘 안 보여서, 보조 경매사님이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못 보고 넘어갈 뻔했어요. 죄송합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16560312706897.jpg“제가 워낙 구석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이해합니다.”

16560312706908.jpg“낙찰 받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16560312706897.jpg“좋긴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이라 이거 기분이 묘하네요.”

16560312706908.jpg“타의 반이요?”

의아한 나를 보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60312706897.jpg“일억 팔천만 달러 이후로는 응찰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경매사의 손짓에 그만 넘어갔죠.”

나의 필살기 제스처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그 제스처는 언제나 잘 먹혔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어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16560312706908.jpg“이것 좀 민망하네요.”

16560312706897.jpg“뿌듯하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십 년 만에 응찰을 하는데, 정말 사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16560312706908.jpg“피카소 작품을 사고 싶으셔서 온 것 아닙니까?”

16560312706897.jpg“아니요. 처음에는 보기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의 말을 들으니 사고 싶었고, 그래서 무리해서 사게 되었네요.”

그는 스스로도 이 상황이 신기하고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16560312706908.jpg“제가 경매를 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피카소의 작품을 낙찰받으신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가격이 오를 작품이에요.”

16560312706897.jpg“좋은 투자였다는 말이군요.”

그는 작품을 투자의 시각으로 보는 태도에 실망한 것 같았다.

16560312706908.jpg“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작품을 소장하는 건 단순히 보는 것과 다른 묘미가 있어요.”

16560312706897.jpg“묘미요?”

16560312706908.jpg“작가와 함께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죠. 작가의 영감이 작품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지는 그런 느낌이요.”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사람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구나. 문득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궁금해지는데, 거친 손이 보였다. 군데군데 피부가 일어나 있고, 굳은살도 있는 것이 작가들에게서 많이 봤던 모습이다.

16560312706908.jpg“혹시 작품을 만드시나요?”

내 물음에 그는 흠칫 놀랐다.

16560312706897.jpg“어……어떻게 알았습니까?”

16560312706908.jpg“화가의 손이라서요. 제가 갤러리스트로 전향을 해서 최근 작가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손들이 많더라구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활동명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가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져 나는 물러서기로 했다.

16560312706908.jpg“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갤러리스트의 호기심이라고 여기고 넘어가 주세요.”

나의 말에도 그는 고민을 멈추지 않더니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16560312706897.jpg“저는 필립 린드입니다.”

뭐……? 필립 린드라고? 그럼 내가 여태까지 필립 린드랑 이야기한 거잖아! 이건 기회다. 하늘이 주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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