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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유토피아 호텔 (4) (207/226)

207화 유토피아 호텔 (4)20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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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31294758.jpg“안녕하세요!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영광’이란 말에 필립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16560312947584.jpg“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데, 창피하군요.”

1656031294758.jpg“창피하긴요. 이렇게 작가님 얼굴을 뵙는 것만으로 여기 온 보람이 있네요. 실은 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다고 매니저님께 연락 드렸는데 거절당했거든요.”

16560312947584.jpg“아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1656031294758.jpg“거절이야 늘상 받는 건데요. 뭐. 그보다 왜 거절했는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아 궁금하긴 했습니다.”

저돌적으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일단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기로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16560312947584.jpg“한국에서 제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예요.”

1656031294758.jpg“왜 그런 생각을 하시죠? 갤러리스트들이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건 수요가 있다는 말인데요.”

16560312947584.jpg“그저 ‘필립’이란 작가를 한국에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부분도 없진 않았기에 나는 뜨끔했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16560312947584.jpg“저는 정말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요.”

1656031294758.jpg“물론 ‘필립’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제 여자친구만 해도 필립의 팬이거든요.”

16560312947584.jpg“기분 좋은 말이네요.”

그저 하는 말이라고 여기는 듯 의례적인 대답이 나를 묘하게 자극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다영의 메신저 프로필을 직접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떡하니 그의 작품이 있었다.

1656031294758.jpg“보이시죠?”

16560312947584.jpg“저……정말이네요.”

1656031294758.jpg“그럼 제가 거짓말이라도 할 줄 아셨어요?”

16560312947584.jpg“아니요. 그저 놀라워서요.”

1656031294758.jpg“제 여자친구는 필립 작가님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에요. 그러니까 저희 갤러리가 아니더라도 꼭 전시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장난스레 말했다.

16560312947584.jpg“정말 ‘감 갤러리’가 아니어도 보러 올 겁니까?”

1656031294758.jpg“당연하죠. 하지만 ‘감 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린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에 필립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16560312947584.jpg“전시회 기획안을 매니저에게 보내주시면 검토해 보죠.”

1656031294758.jpg“네. 알겠습니다.”

속으로는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겉으로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나는 걸음을 멈춰 섰다. 유명한 작가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아이돌 그룹 ER의 시훈이었다. 유명 아이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서 신기했다. 얼굴이 거의 소멸할 것처럼 작고, 몸은 바람에 날아갈 듯 왜소하다. 하지만 아이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잘생겼고, 잘생김을 넘어서 사람의 눈을 잡아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1656031294758.jpg“근데 여기 왜 왔지?”

미술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가? 아니면 그저 유명인사로 호텔에서 초청을 한 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16560312947584.jpg“저기요! 잠깐만요!”

고개를 돌리니 시훈이 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일 리는 없을 테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를 부른 건가?

1656031294758.jpg“저 말인가요?”

16560312947584.jpg“네……!”

대답을 한 그가 숨을 헉헉거리면서 내 앞에 섰다.

16560312947584.jpg“‘감 갤러리’의 한지감 대표님 맞으시죠?”

1656031294758.jpg“네. 맞아요.”

이렇게 숨을 헐떡이면서까지 나에게 올 이유가 뭐지? 호기심이 들어 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16560312947584.jpg“저…… 이 관장님, 어디 계시는지 아나요?”

1656031294758.jpg“현성 미술관 이수지 관장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16560312947584.jpg“네…….”

1656031294758.jpg“글쎄요. 오신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안에서 뵙진 못했어요.”

파티 담당자도 아니건만 이런 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걸까? 그가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6560312947584.jpg“그럼…… 전화 걸어서 오셨는지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

그의 태도가 꼭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는 미련 많은 남자 같았다. 설마…… 이수지가 시훈과 사귄다는 말이 정말이었던 걸까? 둘이 10살도 넘게 차이가 났기에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좀 충격이었지만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답했다.

1656031294758.jpg“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관장님은 저한테는 오랜 고객이세요. 같은 업계 동료이기도 하구요. 관장님이 싫어하실 만한 일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귀든 말든 그건 두 사람의 일이다. 상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거기에 내가 낀다면 곤란해지기에, 그런 일을 나는 하고 싶지 않았다.

16560312947584.jpg“알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울렸다고 오해를 할까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1656031294758.jpg“울지 마세요. 울면 이대로 갈 겁니다.”

16560312947584.jpg“……죄송합니다. 울지 않을게요…….”

그는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나를 보면서 말했다.

16560312947584.jpg“저, 그럼 한 가지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1656031294758.jpg“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16560312947584.jpg“보고 싶다고,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게 좀 전해주세요.”

흐느끼느라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 자존심 강한 이수지가 싫어할 것 같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1656031294758.jpg“네. 알겠습니다.”

16560313057641.jpg“어머. 시훈이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우르르 몰려들어, 나는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 파티가 끝나고 유토피아 호텔인 곽승진 회장까지 만난 나는 초주검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1656031294758.jpg“다영아……”

16560313057652.jpg“오빠, 괜찮아요?”

1656031294758.jpg“안 괜찮아. 피곤해 죽을 것 같아.”

나는 비틀거리면서 소파에 누웠다.

16560313057652.jpg“옷이라도 갈아입고 누워요. 아버님이 해주신 옷인데 다 구겨지겠다.”

그 말에 나는 오늘 강정휘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고, 다영에게 이야기하며 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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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313057652.jpg“강정휘, 목에 깁스한 상태네요. 그런 말에 괜히 흔들리는 거 아니죠?”

1656031294758.jpg“솔직히 조금 흔들렸지.”

16560313057652.jpg“오빠!”

1656031294758.jpg“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딱 돌아왔어. 걱정하지 마.”

16560313057652.jpg“정말이에요?”

의심스러운 듯 다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1656031294758.jpg“그럼, 당연히 정말이지! 안경이 있었다면 오늘 ‘피카소’의 꿈이 내 목표가를 넘기는 일도 없었을걸?”

16560313057652.jpg“알면 됐구요.”

1656031294758.jpg“아 참. 피카소 ‘꿈’을 낙찰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바로 필립 린드 작가야!”

16560313057652.jpg“정말요?”

좋아하는 작가가 나오자 다영은 눈빛을 반짝였다.

1656031294758.jpg“응. 그럼. 정말이지!”

16560313057652.jpg“필립 작가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1656031294758.jpg“내 경매가 인상적이어서 가능했지.”

잘난 척 좀 하지 말라는 듯, 다영이 팔짱을 끼고 나를 보았다.

1656031294758.jpg“잘난 척이 아니고 진짜거든? 내 경매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필립 작가가 나한테 먼저 다가와서 인사한 거란 말이야!”

16560313057652.jpg“누가 뭐래요? 왜 그렇게 흥분을 해요?”

1656031294758.jpg“네 눈빛이 잘난 척하지 말라는 눈빛이잖아. 나 말 안 해.”

내가 토라져 등을 돌리자 다영은 애교스럽게 굴었다.

16560313057652.jpg“오빠가 어떻게 잘난 척을 하겠어요. 원체가 잘난 사람인데! 필립 작가 만났다니까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것뿐이에요.”

그 모습에 나는 금방 기분이 풀렸다.

1656031294758.jpg“쳇. 한번 속아준다.”

16560313057652.jpg“진짜인데에.”

나는 필립과 있었던 일을 말했고, 그가 전시회를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말도 전했다. 다영은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16560313057652.jpg“진짜 잘되었으면 좋겠다!”

1656031294758.jpg“전시회랑 상관없이, 다음에 한국 오면 우리 갤러리 들르기로 했어. 내가 너 이야기하면서 엄청난 팬이라고 하니까 다음에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16560313057652.jpg“정말요? 너무 좋다!”

다영은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해서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 초조해진 나는 신재범에게 물었다.

1656031294758.jpg“연락 아직 안 온 건가요?”

16560313113892.jpg“네. 아직 안 왔습니다.”

조심스레 박 디렉터가 물었다.

16560313113897.jpg“연락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왜 안 오는 걸까요?”

필립에게 제안서를 보낸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분명 일주일 내에 메일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연락이 오지 않아 초조한 것이다. 모두가 초조하게 신재범의 핸드폰을 주시할 때였다. 거짓말처럼 신재범의 핸드폰이 울렸고, 빛의 속도로 신재범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1656031294758.jpg“필립에게 온 메일인가요?”

16560313113892.jpg“……네!”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신재범은 말이 없었다. 거절인가 싶어서 이번에는 쉽게 묻기도 힘든데 박 디렉터가 나섰다.

1656031294758.jpg“하겠다고 하나요?”

한 박자 늦게 신재범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60313113892.jpg“대표님! 필립 작가가 하겠다고 합니다!”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한 듯이 디렉터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체면을 생각해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1656031294758.jpg“신 디렉터님이 책임지고 진행해 주세요.”

16560313113892.jpg“네!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 한국에 필립을 선보이는 건데 제대로 해야죠!”

16560313113897.jpg“필립 작가님 작품을 한국에서 보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박 디렉터가 꿈을 꾸는 손을 모았다. 흥분한 것은 양 디렉터도 마찬가지였다.

16560313142403.jpg“진짜 꿈을 이뤘네요!”

흥분이 과열되자 나는 미소로 그들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1656031294758.jpg“필립 작가도 좋지만 갤러리 찾아주시는 고객들부터 잘 맞이해야죠. 최근에 드라마 시청률이 높게 나오고, 이윤호 씨의 SNS 홍보 덕에 많은 분들이 우리 갤러리를 찾아주시고 있습니다.”

드라마 시청률은 무겁게 치고 올라가서 4화만에 13%를 넘겼다. 신드롬에 가까운 반응이 이어지면서 업계에서는 20%를 넘길 거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더불어 드라마에 결정적인 지원을 했던 ‘감 갤러리’와 조선웅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고, 지난달보다 매출이 10배 이상 올랐다. 신 재범이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16560313113892.jpg“박 디렉터, 양 디렉터. 고객 맞을 준비하세요.”

16560313113897.jpg“네!”

16560313142403.jpg“넵!”

보통 신재범은 두 사람과 함께 나가 고객을 맞을 준비를 했기에 나는 의아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회의실에는 신 디렉터와 나만 남았다. 그가 조심스레 나를 보면서 물었다.

16560313113892.jpg“대표님. 최근에 남 회장님 보신 적 있으세요?”

1656031294758.jpg“아니요. 그러고 보니까 유토피아 호텔 오프닝 파티에서도 못 뵈었네요. 최근에 정신이 없어 연락도 못 드렸구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고민하던 신재범이 입을 열었다.

16560313113892.jpg“남정숙 갤러리가 어렵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입니다.”

1656031294758.jpg“갤러리가 어렵다구요?”

16560313113892.jpg“네……. 정확한 소문인지 아닌지는 저도 확인이 어려워 여쭤보는 겁니다.”

1656031294758.jpg“굵직한 전속 작가가 10명이 넘는 곳인데, 일시적으로 어려울 순 있겠지만 큰 타격은 없지 않을까요?”

남정숙 갤러리의 전속 작가들은 옥션에서 거래되는 것은 물론 그 가격이 잘 떨어지지도 않는 작가다. 그러니 자금이 어려울 리가 없지 않겠는가.

1656031294758.jpg“건물도 남 회장님 명의구요.”

보통 갤러리가 모여 있는 곳들의 땅값은 그 가격이 어마무시하다. 그래서 이름 있는 갤러리도 월세 내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남정숙 갤러리는 남 회장 소유의 갤러리였다. 그런데 신재범의 표정이 묘했다. 마치 할 말이 있는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1656031294758.jpg“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16560313113892.jpg“아니요. 맞습니다. 그런데 원래 그 주변이 다 남 회장님 건물이었던 거 아세요?”

1656031294758.jpg“그랬어요?”

16560313113892.jpg“네. 그랬습니다. 이제는 갤러리 건물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남정숙 갤러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세가 줄지 않은 곳이기에 의아했다.

1656031294758.jpg“왜 그런 거죠?”

16560313113892.jpg“남 회장님의 아드님이 그렇게 만들었죠. 물을 아무리 열심히 퍼날라도 밑 빠진 독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남 회장님의 아드님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1656031294758.jpg“……그렇군요. 전혀 몰랐네요.”

16560313113892.jpg“제가 쓸데없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신재범이 나에게 인사를 하고 나갔고, 나는 핸드폰을 들어 남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계속 이어지는데도 남 회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갤러리에 직접 전화를 걸까? 괜히 오버하는 걸까 봐 나는 박도희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1656031294758.jpg“이럴 때 지인 찬스 쓰는 거지.”

다행히 박도희는 전화를 받았다.

1656031294758.jpg“도희야. 잘 지내?”

16560313210983.jpg[……오빠. 저희 갤러리 어떻게 해요?]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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