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남정숙의 몰락 (1)2022.03.30.
‘남정숙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함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어깨들이 줄지어 늘어서, 직원들이 갤러리에 들어가지 못 하도록 막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오빠…….”
간신히 감정을 누르며 박도희가 말을 했다.
“건물 소유가 수 캐피탈이라는 곳으로 넘어갔대요. 이제 어떻게 해요……?”
“…….”
서럽게 우는 박도희를 달래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박도희가 진정이 될 때쯤 헤드 디렉터인 김이상이 나에게 다가왔다.
“대표님.”
“네. 디렉터님.”
그는 내 눈을 보지 못하고 말했다.
“이런 모습 보여드리게 되서 죄송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회장님 아드님이 이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리셨습니다. 돈을 갚지 않아서 소유가 아예 넘어가 버린 거죠.”
‘수 캐피탈’이라. 회사명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대부업체 느낌이 났다.
“혹시 ‘수 캐피탈’이 대부업체인가요?”
“네. 회장님이 해결하시려고 애쓰셨는데 잘 안됐습니다. 오늘까지 갤러리를 비우라고 했는데……”
“비우지 않았더니 이렇게 된 거군요.”
“네. 그렇죠…….”
씁쓸한 미소가 김 디렉터의 얼굴에 스쳤다. 남정숙 갤러리는 메이저 갤러리 안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곳이다. 그런 곳의 헤드 디렉터로 일할 정도면 실력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자부심도 남다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그의 자부심에 치명상을 남겼을 것이다. 제3자인 나도 이 모든 것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데, 그는 오죽하겠는가. 한풀이를 하듯 그가 중얼거렸다.
“서른일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남정숙 갤러리는 이제 없어지겠죠. 메이저 갤러리가 이런 식으로 없어질 줄은…….”
“당장 갤러리를 닫아야 하는 상황입니까?”
“일단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건물이 없지 않습니까. 작가들도 계약 해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남정숙 갤러리는 한국에 갤러리가 생기던 초기부터 있었기에, 한국의 미술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그런 곳이 사라지도록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남 회장과 이야기해 본다면 뭔가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병원이요?”
“의식은 금방 회복하셨지만, 당분간 자극을 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제가 회장님을 봬도 괜찮을 때 디렉터님이 연락 주시겠어요?”
“네. 그러겠습니다.”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데, 나도 당황한 상태라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막막했다.
“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김 디렉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 디렉터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어떤 기대도 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만은 분명했다. * 내 눈치를 보면서 신재범이 물었다.
“아직 연락 없습니까?”
“네…… 없어요.”
남정숙 갤러리가 뒤집어지고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연락을 했겠지만, 남정숙의 마음이 크게 상했을 것 같아 함부로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조심스레 신재범에게 물었다.
“먼저 연락해 봐야 하는 걸까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그래서 저도 참고 있는데, 너무 걱정이 돼서요……”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 디렉터가 문을 열었다.
“대표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이요?”
올 손님이 없었기에 나는 의아했다.
“ER 시훈 님이요.”
초롱초롱한 양 디렉터의 눈은 도대체 시훈을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묻고 있었다. 부담스러워서 나는 딴청을 부리는 한편,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최근에 정신없이 바빠서 시훈에게 받은 부탁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님 와 있어서 오늘은 보기 어렵다고 전해줄래요? 다시 연락 주겠다는 말도 꼭해주고.”
“손님 없으시잖아요.”
양 디렉터도 ‘응급환자’인지, 시훈을 반기지 않는 내 모습에 덜컥 화가 난 모양이다. 듣기로는 ‘응급환자’는 여자 팬뿐만 아니라 남자 팬들도 많다고 들었다. 당황하는 나와 달리 신재범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양 디렉터. 지금 업무 관련 중요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안 보여요? 내가 지금 직접 나가서 말해요?”
“아……아니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무서운 신재범의 반응에 양 디렉터는 깨갱하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신재범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신 디렉터님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제가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너무 편하게 굴어서겠죠. 나중에 따끔하게 한마디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 탑 옥션에서 온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후보 30인을 정하기 전에 신청한 갤러리들을 다니면서 작품을 직접 보고 선별하는 절차였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슬슬 나가 봐야겠네요.”
“백 팀장님이 너무 딱딱하신 것 같습니다.”
“원래 성격이 좀 예민한 편이시라서요. 그것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일처리가 공정하고 깔끔하시니까 안 좋게 보진 말아 주세요.”
1년 전 백 책임이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신인 작가 후원 경매 팀이 새롭게 생겼다. 그전에는 근현대미술팀에서 맡아 진행하던 것을 새로운 팀이 맡게 된 것이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의 볼륨이 커진 상태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직접 민효성의 그림을 보기 위해 백 팀장이 오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백 팀장이 자신과 나의 오랜 친분 때문에 불편하다고,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운해서 그렇죠. 솔직히 미술계에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 아닙니까? 그 갤러리들한테 다 이런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제가 그 경매를 초기에 기획했으니까요. 서운해도 어쩔 수 없죠. 신인 작가 후원 경매 끝나고 맥주나 얻어 마시면서 회포 풀어야죠.”
일어서서 재킷을 걸치는 나를 보면서 신재범이 물었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시는 겁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마침 들를 때가 생겼어요.”
“혹시 ER 시훈 일인가요?”
물어보는 신재범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궁금하지 않은 척하시더니, 헤드 디렉터님도 궁금하신 모양이네요?”
“요새 한창 주가를 올리는 아이돌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입을 여는 순간 저를 죽이고 싶어 할 사람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호기심이 잔뜩 어려 있는 그의 눈은 짓궂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정말 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거듭된 나의 청에 물러나면서도 그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 이수지의 수행원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나다가 관장님 생각이 나서요.”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마카롱을 들어보였다. 이수지와 시훈의 이야기를 흘리면 날 죽일 사람이 내 앞에 서있었다. 그녀는 날 의아하게 보면서도 이수지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렸고, 잠시 후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별의 후유증인지 이수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승재가 속을 썩일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표정 관리가 가능한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게 전혀 되지 않았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수지가 물었다.
“어쩐 일이야?”
“지나다가 마카롱 보고 관장님 생각이 나서 들렀죠.”
수행원을 의식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이제 마카롱 안 좋아하는데……”
차를 세팅하는 수행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마카롱과 관련된 시훈과의 에피소드가 있는 모양이다.
“이야기들 나누세요.”
수행원이 나가고 나서도 이수지는 마카롱을 멍하게 바라볼 뿐 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말을 꺼내려 하는데도 이수지의 눈치를 보느라 쉽지가 않았다. 나는 애써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유토피아 오프닝 리셉션에서 저 완전 날렸던 거 아시죠?”
“이야기 많이 들었어. 한편의 영화 같은 경매였다고 떠들썩하던데?”
이수지는 예의상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이라면 본인 상태가 안 좋으면 엄청 짜증 냈을 상황이기에, 나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부풀려진 이야기죠.”
“자랑하러 왔으면 자랑을 해. 괜히 겸손한 척하지 말고.”
“자랑하러 온 건 아닙니다.”
“그러면?”
“본의 아니게 전서구 역할을 맡게 돼서요.”
어이가 없다는 듯 이수지가 차를 마셨다.
“한 대표가 비둘기도 아니고……”
그러다 짚이는 것이 있는지, 이수지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시훈을 떠올린 것이다.
“네. 맞아요. 시훈 씨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시훈’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이수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잘…… 지내?”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직업 때문에 잘 지내는 척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힘든 것 같습니다. 관장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바로 울더라구요. 보고 싶다고,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흐윽…….”
이수지가 간신히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어쩌다가 전서구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일까. 이수지의 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이 상황이 정말 곤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거짓 소문을 방치해서 그녀를 본의 아니게 괴롭혔던 마음의 빚을 갚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볼 때 이수지는 시훈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헤어지게 된 걸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헤어진 이유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격하게 나를 흔들었다. 결과는 호기심의 승리였다.
“왜 헤어지신 겁니까?”
시훈이 아이돌이어서인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이돌 팬덤은 강력한 만큼 요구하는 것 또한 많다고 들었다. 울음이 잦아들 때쯤 이수지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
“김승재가 찾아왔어……. 헤어지지 않으면 언론에 알리겠다고 하더라.”
김승재 때문이었구나. 그가 이수지에게 집착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열한 짓을 할지는 몰랐다. 하긴, 원래 그런 인간이긴 하지. 일반인이라도 아이돌과의 연애는 부담스럽다. 그런데 이수지는 재벌 3세다. 재벌 3세와 아이돌의 만남, 거기에다 두 사람은 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고 이수지는 이혼경력이 있다. 누가 봐도 순수한 만남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수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한 대표가 봐도 헤어지는 게 맞겠지?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거란 건 알고 있었어.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고…… 그 아이는 너무 어리잖아. 안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을 했는데, 그랬는데 마음은 그게 안 되더라.”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이대로 끝낼 거니까. 앞으로는 시훈이 이야기 전하지 마. 듣지 않을 거야.”
마음을 다잡듯이 이수지는 소파를 꽉 쥐었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전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할 것 없어. 이제 아무 일도 없는 거니까. 내가 당했으니까 김승재 그 자식도 당하게 해줄 거야.”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최근에 강정휘하고 손을 잡고 승승장구하고 있다지?”
안경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나는 흠칫했지만 티내지 않고 답했다.
“네. 강정휘가 내는 수익을 상당부분 김승재가 가지고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삼원그룹 내에서 김승재를 다르게 보는 시선도 있다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렇죠.”
이수지가 물끄러미 나를 보면서 물었다.
“뭐 아는 거 없어?”
“집 나갔던 감이 다시 돌아온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는 나를, 이수지는 꿰뚫어보듯 지그시 봤다.
“김승재가 널 납치한 이후에 생긴 일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