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남정숙의 몰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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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화 남정숙의 몰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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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화 남정숙의 몰락 (2)
2022.04.02.


“김승재가 널 납치한 이후에 생긴 일인데도?”
나는 놀랐지만 애써 차분하게 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지. 납치와 김승재의 현 상태의 상관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솔직하게 안경의 존재를 털어놓을까.
이수지가 강정휘에게서 안경을 빼앗는다면, 그렇다면 김승재와 강정휘가 잘되는 꼴을 더 이상 보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이수지가 날카롭게 보았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결국 알아낼 거야. 김승재가 널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처럼. 여기가 그런 자리거든.”

“그럼 그냥 알아내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이수지가 미간을 확 찌푸렸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네. 내가 알아내게 되면 한 대표에게 난리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그럼 ‘이수지’라는 큰 고객을 잃게 될 거야.”
하지만 이런 것에 흔들릴 거였더라면 강 회장과의 인연도 지금까지 이어졌을 터였다.

“연관되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났습니다.”
그런 내 태도가 불쾌한 듯 그녀는 팔짱을 끼었다.

“계속 추궁하면 나랑 인연이라도 끊을 기세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누구보다 제가 원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이거 원, 눈치 보여서 말도 못 꺼내겠어.”
괘씸한 듯 얼굴을 구기면서도 그녀는 받아들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 누가 이해했다고 그래. 한 대표 협박에 못 이겨서 넘어가는 거지.”

“어쨌든 들어주셨지 않습니까.”
그런 내가 못마땅한 듯 이수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선웅 작가, 잘돼서 좋겠어.”

“뭐 나쁜 편은 아니죠.”

“나쁜 편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입이 찢어질 만한 상황일 텐데?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끝냈지. 이윤호 SNS로 홍보가 엄청 됐는데, 거기에 드라마 시청률도 무섭게 오르지! 드라마에 ‘감 갤러리’가 나와서 재미 많이 봤잖아. 아니야?”
맞다. 이윤호의 팬부터 드라마 팬들까지 합쳐져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매출은 수직상승했다.

“매출은 꽤 좋아졌죠.”

“순이익도 많을 텐데?”

“작가님 드리고, 우리 디렉터님들 드리면 저한테 오는 돈은 별로 없어요. 아시잖아요.”

“그거, 내가 돈이 없다고 하는 말이랑 같지 않아?”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건 너무 비약인데요?”

“그런가? 어쨌든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산 조선웅 작가 작품 전시하려고.”

“잘 생각하셨어요. 후회하시지 않을 거예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수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너무 좋아하는 티 내지 마. 백하진이 이 갈고 있는 거 알지?”

“알죠. 그렇게 절 씹고 다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리아 갤러리 정 회장은 결국 백하진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다른 메이저 갤러리에서도 그를 원하지 않았기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직접 갤러리를 차렸다.
만만한 대학 후배를 꼬셔서 대단한 기회를 주는 양 아이디어를 뽑아먹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렇게 빨대를 꽂아 작품은 어찌어찌 만든다고 해도, 갤러리가 맡았던 일을 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많은 작가들은 갤러리가 돈을 거저 가져간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갤러리스트란 직업은 없어졌을 터였다.
작가로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사람들도 갤러리 업무는 버거워한다.
그런데 맨날 룸살롱에나 갔던 사람이 갤러리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예전의 명성을 팔아먹고는 살지만 벌이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
그런데 자신이 차버렸던 일을 조선웅이 맡은 뒤에 대박이 터졌으니, 그 못된 심보에 배가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원래 드라마 작가가 백하진 작품을 원했다면서.”

“네. 그랬죠.”

“한 대표가 뺏어갔다고 많이 억울해한다던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뺏어요? 본인이 주제도 모르고 처음 제안 들어왔을 때 거절한 게 문제였죠.”

“백하진은 어디 그렇게 생각하겠어?”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이수지는 싱긋 웃었다.

“제가 씹히고 다니는 게 좋으신가 봐요.”

“원래 강 건너 불구경은 재밌는 법이니까.”
마음보가 곱지 않은 건 백하진이나 이수지나 매한가지다.
*
현성 미술관에서 나와 신재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탑 옥션에게 민효성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나요?”

[작품을 보는 내내 백 팀장님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구요?”

[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여쭤보는데도, 괜찮다고만 하고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라구요. 얼굴은 전혀 괜찮지가 않은데도요.]
백 팀장은 얼굴에 그대로 생각이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표정이 좋지 않았다면 정말 불편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다른 사람들 표정은 어땠나요?”

[다른 분들은 다 표정이 좋으셨습니다. 신선하다는 반응도 많았구요.]

“그렇군요.”
하지만 결정권자는 백 팀장이었기에,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후보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민효성 작가의 올해 목표가 신인작가 후원 경매인데…… 마음이 무겁습니다.]

“어쩔 수 없죠. 최선을 다했잖아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갤러리 마감 잘 부탁드립니다.”

[네. 대표님.]
전화를 끊은 나는 곧바로 백 팀장의 이름을 주소록에서 검색했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백 팀장님 성격에 불편해하실 게 뻔하니까……”
안 그래도 불편해하는데 거기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차라리 다영이에게 물어보자.”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남정숙 갤러리 김 디렉터에게 온 전화였다.

“디렉터님. 회장님은 괜찮으신가요?”

[그나마 많이 진정이 되셨습니다. 회장님이 대표님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회장님의 집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
돋보기안경을 쓰고 강정휘는 부동산 관련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레버리지, 갭투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부동산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일주일 전에 부동산 1단계 가격을 보기 시작했건만 아직도 미션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보이는 거야!”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김승재가 들어왔고, 당황한 비서가 뒤이어 들어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데도……”
강정휘는 매섭게 비서를 노려보면서도 김승재를 의식해서 참았다.

“됐어. 나가봐.”
머리를 조아린 비서가 나가고, 김승재는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았다.
그런 태도에 강정휘는 화가 치밀었지만 간신히 억누르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가 꼭 일이 있어야 보는 사이는 아니잖아.”
느물거리는 모습이 꼭 돈 뜯어가는 사기꾼 같다.

“아직 부동산 미션 안 받았어. 미션 보이면 연락 준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너 나를 믿어?”

“이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문제야. 어차피 내가 버는 돈의 65%는 네가 가져가잖아.”

“네가 벌고도 다른 사람이 벌어간 척 빼돌릴 수도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불심검문하는 거지.”
강정휘를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것도 있지만, 사실상 그는 할 일이 없었다.
돈을 벌면서 삼원그룹 내에 그를 미술 투자자라며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이수지와 시훈이 헤어진 마당에 그쪽에 신경을 쓸 일도 없었고, 최근 여자를 갈아치우는 것도 재미가 없어서 잠시 휴식하는 중이다.
이렇게 강정휘에게 갑자기 오면 감시도 하는 한편, 무언가 자신이 권력을 가진 사람 같아서 내심 좋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경호원 고용해서 못 들어오게 할 수도 있어.”

“그거 재밌겠네.”

“어쨌거나 안경은 나한테 있다는 걸 잊지 마.”
그저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김승재는 흠칫했다.
겁을 먹은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허풍을 떨었다.

“아이구 무서워라. 너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겠네. 다음부터는 연락하고 올게.”
한껏 빈정거리고는 김승재가 대표실을 나갔고, 강정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가뜩이나 미션이 보이지 않아 짜증이 나있는데 김승재가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그런 강정휘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인지, 안경이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미션 : 남정숙 갤러리 건물을 일주일 안에 매입하시면 2단계 정보가 제공됩니다.]

“남정숙 갤러리 건물을 사라고? 대체 왜?”
남정숙 갤러리 건물의 소유가 넘어가면서 폐업한다는 건 업계에 소문이 파다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유가 어디로 넘어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일단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겠네.”
미션에 대한 조그마한 압박감도 그녀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그녀의 지식과 직원들의 노동력이 합쳐져, 어렵지 않게 미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미션은 쉬이 통과할 것이고 3-4개월이면 5단계까지 볼 수 있을 터였다.
머지않은 그날을 꿈꾸며 그녀의 눈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
남정숙의 집은 작고 볼품없었다.
내가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집이 꽉 차는 느낌이 들 만큼 작았고, 벽 군데군데에는 곰팡이가 피었다.
모던하고 고급스러운 갤러리의 모습과는 전혀 닮아 있지 않아, 나는 순간 굳어버렸다.

“누추한 곳에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날아든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위태로운 모습의 남정숙이 서 있었다.

“아닙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녀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은 식탁 하나만 덩그러니 있고, 소파와 TV도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놓을 만한 공간 자체도 없었다.
미술계에서 내로라하는 남정숙 회장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건물은 이제 손쓸 수 없게 된 건가요?”

“네. 이미 소유 자체가 넘어갔어요.”
도대체 얼마나 빚을 졌길래 그런 건물이 넘어갈 정도가 된 걸까.
시세로 보면 남정숙 갤러리의 건물은 100억 정도의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미 건물이 넘어간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을 터였다.

“제 건물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새로 시작하세요.”

“아니요. 이제 ‘갤러리스트 남정숙’은 끝났어요. 나는 그걸 버리고 엄마를 선택했으니까요.”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아들에게 내가 필요했을 때, 나는 갤러리에 정신이 팔려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요. 그게 너무 미안해서, 거절해야 할 이야기도 받아들였죠……. 그러다 이렇게 됐구요.”

“회장님…… 정말 이대로 그만두실 겁니까?”
그녀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갤러리스트로서 자격이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실수는 돌이킬 수 있을 때 하는 말이죠. 내가 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에요. 선택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죠. 내 스스로가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자조어린 미소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자책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도 그런 자책감을 느낄 것 같아 더는 설득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난 괜찮아요. 갤러리가 없어진 것도, 건물이 넘어간 것도…… 내가 지고 가야 할 일이죠. 하지만 직원들은, 작가들은 죄가 없어요.”
일생동안 일궈놓은 모든 것이 무너졌는데도 어떻게 직원들과 작가들을 걱정할 수 있을까?
혹자는 애초에 이런 일을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고 말하겠지만, 사람은 자기중심적이라 자신이 잘못한 것보다 잃은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정숙은 그러지 않았다.

“제 인맥을 총동원해서 직원들과 작가들이 좋은 갤러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남정숙은 내가 갤러리스트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신의 그룹에 나를 넣어주었고, 여러 가지로 끌어주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남 회장이 ‘알겠다’는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마치 어려운 부탁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감 갤러리에서 우리 직원들과 작가들을 책임져줄 수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