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남정숙의 몰락 (3)
(210/226)
210화 남정숙의 몰락 (3)
(210/226)
210화 남정숙의 몰락 (3)
2022.04.04.
“저희 갤러리에서요……?”
“네. 한 대표가 맡아준다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이제 막 시작하는 갤러리가 서른일곱 명의 직원을 품고 열 명이 넘는 작가를 품는다.
조금씩 규모를 늘려 갈 참이었기에 난감했다.
“저희 갤러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곳입니다. 현재 있는 직원들도 세 명밖에 되지 않구요.”
“하지만 사업을 확장시킬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쉬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애원했다.
“제발 생각이라도 해줘요, 한 대표. 부탁이에요.”
“……알겠습니다.”
*
남 회장의 부탁을 들은 다영이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절대 안 돼요.”
“뭘 또 절대 안 된다고까지 하냐?”
“오빠 설마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야. 남 회장님한테 도움 많이 받았잖아.”
태연한 내 반응에 다영은 분통을 터트렸다.
“이건 도움받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갤러리 전체가 영향받을 수 있는 일이라구요.”
“알아.”
“남정숙 갤러리, 정말 좋은 갤러리라는 거 알지만, 그걸 떠안는 건 다른 문제예요.”
“내가 떠안는 채무는 없어. 힘을 들이지 않고 좋은 직원들하고 작가들 얻는 건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버럭 다영이 소리를 질렀다.
“외피만 보면 그렇죠. 하지만 잘 생각해봐요. ‘감 갤러리’ 직원은 지금 달랑 세 명인데 남정숙 갤러리는 서른일곱 명이에요. 거기에다가 단체로 옮기면 남정숙 갤러리에서 하던 대로 ‘감 갤러리’에서도 하려고 들 거라구요. 남 회장님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사람은 쉽게 자신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또한 단체로 옮겨올 때는 버릇대로 하면서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소속이 바뀌면 마땅히 그곳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데도 말이다.
“또?”
“갑자기 사업을 확장하면 감당하기 어려워요.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구요. 음식점만 봐도 그래요. 가게 규모 작았을 때는 잘되던 것들이, 커지고 나서 음식 맛이 변하고 서비스도 변한다구요. 왜 그러겠어요?”
“사장의 눈이 미치지 않은 곳이 많아지니까.”
“맞아요. 갑자기 커져버리니까 감당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천천히 사업을 확장했으면 생기지 않을 일이죠.”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아는데, 이대로 등을 돌리는 건 마음이 불편해.”
“오빠. 공과 사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해요. 신 디렉터님에게도 물어보세요. 저랑 같은 이야기를 할 테니까.”
신재범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내가 정말 남정숙 갤러리를 맡을까 봐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이다.
*
다음 날.
신재범이 탑 옥션으로부터 온 소식을 전했다.
“신인 작가 후원 경매의 후보 30인은 토요일까지 정해진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안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접기가 힘들었다.
“후보 30인이 정해지면 커뮤니티에서 투표하는 방식이죠?”
“네. 후보가 정해지면 갤러리에게 작가 자료를 요청한다고 합니다. 그걸로 4일 동안 30인에 대해 홍보하고, 3일 동안 투표해서 일주일 안에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제가 있을 때보다 투표 시간이 짧아졌네요.”
미소 지으며 신재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것 외엔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대표님이 시스템을 잘 만드신 덕분이죠.”
“시스템만 잘 만든다고 되나요. 나오는 작가들이 관심을 받아야 가능한 거죠. 그래도 기분 좋네요.”
그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저, 백 팀장님이 왜 표정이 계속 안 좋으셨는지 알아보셨나요?”
“아니요. 직접 연락하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다영이를 통해서 알아보려 했는데, 통 말을 안 하신다고 하네요.”
“그렇군요.”
작품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영 이야기가 나오자 신재범에게 물어보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남정숙의 부탁에 대해서 설명했다.
“한마디로 남정숙 갤러리를 인수하는 거네요.”
“그렇죠.”
갤러리 건물이 없을 뿐, 작가와 직원들을 다 데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드 디렉터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이유를 듣고 싶어요.”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떼었다.
“만약 대표님이 아직 갤러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저는 인수를 하라고 조언드렸을 겁니다. 갑자기 큰 갤러리를 맡는다는 것이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그만큼 기반이 잘 갖춰져 있는 갤러리는 매력이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감 갤러리’는 이미 시작했죠.”
“네. 최근에는 드라마 때문에 ‘감 갤러리’가 업계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졌습니다. 다른 정체성을 가진 갤러리가 한집 살림을 한다면 갈등의 골이 깊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규모를 키운다는 것에서는 다영과 의견을 달리했지만, 두 갤러리의 이질성에 대해서 조언한 것은 같았다.
“저도 그 점이 가장 걸리긴 합니다.”
“인수로 마음이 기우신 겁니까.”
“머리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계속 마음이 가요.”
“남 회장님께 받은 도움 때문인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손꼽히는 메이저 갤러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저도 그 부분에서 동의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정인 갤러리도 2000년대 초반에는 메이저 갤러리였지만 없어졌습니다.”
“그렇죠.”
차이가 있다면 ‘정인 갤러리’는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였지만 ‘남정숙 갤러리’는 지극히 개인적 이유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다른 방법이 없을지 머리를 굴리는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런 방법은 어때요? 남정숙 갤러리 건물을 사들이고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시키는 거죠. 각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서로가 원하는 곳에 있는 거예요.”
“괜찮은 생각입니다.”
내 말은 들은 신재범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갤러리 건물을 사들이실 계획입니까?”
“네.”
남정숙 갤러리는 처음 갤러리를 시작할 때부터 그 건물을 사용했다.
정체성을 지켜 주기 위해서는 건물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금전적 손해가 크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럴 때 쓰려고 돈을 버는 건데요. 뭐.”
“그럼 현재 남정숙 갤러리를 소유하고 있는 분을 만나야겠군요.”
“그렇죠.”
*
수 캐피탈 건물로 들어선 강정휘는 내심 놀랐다.
뒷골목의 어깨들이 운영하는 사채업자 사무실 느낌일 줄 알았으나 멀쩡한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고, 내부 인테리어도 대기업처럼 말끔했다.
사장이 미술을 좋아하는지 건물 로비에는 대형 미술품이 설치되어 있었고, 복도 곳곳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사장실로 들어섰다.
검은 정장에 단정한 머리를 한 남자가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강정휘 대표님,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수일 대표님. 저야말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정휘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치레를 했다.
골동품에도 관심이 있는지 방에는 달항아리와 반닫이도 있었다.
벽에는 이기환 작가의 그림이 두 점이나 걸려있었다.
사채업자 주제에 겉은 번지르르하다고 강정휘는 속으로 비웃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정수일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남정숙 갤러리’가 있는 건물을 구매하고 싶으시다구요?”
“네. 남 회장님하고 인연이 각별하기도 해서요.”
“그렇군요.”
그래서 얼마를 줄 거냐고 바로 물어볼 거란 예상과 달리, 정수일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바심이 난 쪽은 강정휘였다.
제한시간이 일주일밖에 없는 상황에서 누구한테 건물이 넘어갔는지 확인하고 약속을 잡느라 벌써 이틀을 날렸기 때문이다.
“얼마를 받고 싶으신지 말씀해주시면 최대한 맞춰 보겠습니다.”
“200억 어떠십니까?”
현재 시세보다 2배보다 높은 금액에 강정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시세보다 2배는 높은 금액이라는 거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그 정도 쳐주실 수 있는 분께 팔고 싶어서요.”
정말로 느긋한 건지, 아니면 우위에 서려고 그런 척하는 건지 쉽게 간파가 되지 않았다.
최근 3개월 동안 돈을 많이 벌었지만 100억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기에 200억은 부담스러웠다.
“저는 100억을 조금 넘기는 정도를 생각했는데요?”
“이거 격차가 너무 크네요. 팔기 어렵겠어요.”
푹 소파에 기대는 정수일을 보고 강정휘는 페이크라고 확신했다.
남정숙 갤러리 건물이 알짜배기 땅이라고 하지만 최근 경기가 어려워 그곳을 사려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어린 게 어른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내가 누군데 너 따위 사채업자에게 당할까!’
코웃음을 치며 그녀는 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시세 이상 되는 돈을 낼 정도로 제가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허세를 부리는 정수일을 비웃으면서 강정휘는 그곳에서 나와 자신의 차에 올랐다.
비서가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어요?”
“내가 누군데 잘 되지 않겠어?”
“……네, 그렇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시키는 거나 똑바로 해. 괜히 끼어들어서 부정타게 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비서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강정휘는 곧 정수일에게 연락이 올 것을 확신했다.
“나 아니면 거기 사려는 사람도 없을걸.”
결국 정수일은 며칠 내로 연락을 줄 것이다.
*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모델 같은 외모를 지닌 직원이 나를 맞았다.
“한지감 대표님이시죠?”
“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을 따라 나는 건물 가장 위층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대기업 중역 회의실을 연상시킬 만큼 크고, 고급스런 느낌이 났다.
대부업 회사에서 이런 회의실이 왜 필요한지 의아해하는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지감 대표님.”
고개를 돌리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한지감입니다.”
나는 악수를 청했고,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정수일입니다.”
정수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그러고 보니 얼굴도 묘하게 익숙하다.
내 표정을 읽은 듯 그가 말했다.
“우리 본 적 있죠?”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최석훈 교수 때문이라고 하면 기억하실까요?”
기억난다.
최 교수 동생의 채무 때문에 골동품을 가져가려고 했던 사채업자!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억……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죠. 그때 뒷골목 사채업자에 불과했던 내가 이렇게 회사를 가지고 있고, 한 대표님은 이제 옥션 직원이 아닌 갤러리 대표 아닙니까.”
“그렇네요.”
회의실에 데미안 허스트의 그림이 5점이나 걸려있다.
데미안 허스트를 엄청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는 여유롭게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으시죠.”
“네.”
나도 모르게 그를 쓰윽 훑어봤다.
예전에 불량함과 천박함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돈이 좋다더니 사람을 저렇게 달라지게 하는구나, 신기했다.
편의점 알바생이던 당시의 나를 기억하던 사람은 지금의 나를 보고 이런 느낌을 받을까?
내심 궁금하다.
“많이 달라지셨네요.”
“한 대표님 덕분이에요.”
“저 때문에요?”
순진한 얼굴로 반문했지만, 사실 말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인간은 당황하기는커녕 아주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때 이후로 골동품이 뭔지 좀 궁금해졌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금방 한지감이란 사람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유명하시잖아요.”
잊어버렸던 상대가 나를 알고 있다니, 기분이 영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었다.
“그러셨군요.”
“옥션에 직원으로 있으면서도 유명세가 줄지 않더군요. 뉴욕에 경매사로 가면서 더 유명해졌죠. 그러면서 저도 미술계에 덩달아 관심을 가졌죠. 주변에서는 그런 저를 비웃었습니다. 뒷골목 사채업자가 무슨 미술이냐구요. 그래서 거기에 맞는 모습을 갖추기로 했죠.”
“쉽지 않았을 텐데, 결심이 대단하십니다.”
물끄러미 나를 보면서 그는 웃었다.
“다 한 대표님 덕분입니다. 갤러리에도 가고 싶었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그러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연이 닿게 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해서 돌고 돌죠.”
그가 어떻게 지금의 고상한 모양새를 갖췄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남정숙 갤러리’의 건물을 사고 싶어서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감 갤러리 확장을 위한 건가요?”
“아니요. 남정숙 갤러리는 그대로 갤러리로 남겨둘 예정입니다.”
그는 살짝 어깨를 올렸다.
“상당히 의외의 결정이군요. 그걸 위해 100억을 지불하겠다는 겁니까?”
“네. 그러니 저한테 파시죠.”
“글쎄요. 거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좀 곤란하네요. 하지만 한 대표님이 말씀하시니 특별히 고려를 해 보죠.”
뭔가 돈 말고 다른 원하는 것이 있는 눈치다.
“따로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남정숙 갤러리가 유지된다면, 거기 내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