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발표 (1)
(214/226)
214화 발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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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화 발표 (1)
2022.04.13.
‘남정숙 갤러리’ 앞에 차가 멈추자 나는 긴장했다. 그런 나를 보고 신재범이 가볍게 말했다.
“대표님답지 않게 왜 긴장하고 그러세요?”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다 보니 좀 어렵네요.”
“저도 대표님보다 나이가 많지만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신 디렉터님은 예외적인 경우죠.”
성격도 잘 맞을 뿐더러 비슷한 목표를 가져서 가능하다고 본다.
“다른 직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대표님 덕분에 일자리를 지키지 않았습니까.”
“다른 분들도 부디 그렇게 생각해야 할 텐데요.”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는데 쥐죽은 듯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나는 애써 차분하게 갤러리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당황한 신재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네요. 오늘 분명 9시까지 모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을 드는 그를 나는 말렸다.
“이렇게 집단적인 행동을 할 정도면 나를 격하게 싫어하는 모양이네요. 오늘 하루 정도는 그냥 두죠.”
작은 반발심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 집단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도 적잖이 당황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당황스러운 것은 신재범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연락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놀라서인지 그는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케이크를 든 도희를 필두로 우르르 직원들이 나왔다.
도희의 옆에 선 김 과장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도희는 민망함을 뒤로하고 외쳤다.
“한지감 대표님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민망해하면서도 ‘환영한다’고 나름 능숙하게 연호하는 모습이, 연습을 꽤 한 것 같았다.
그제야 나를 위한 작은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분위기로 봤을 때 이런 이벤트를 잘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도 다들 마음을 써준 것 같아 고마웠다.
고개를 돌리니 신재범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전화를 하면 나오는 거였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하하.”
“이런 거였으면 미리 귀띔을 해주시지 그랬어요.”
김 디렉터가 끼어들었다.
“그럼 서프라이즈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싱긋 웃으면서 답했다.
“그렇네요. 그런데 오늘 너무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거든요. 모두 안 반기시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반겨주세요.”
“하하. 네. 알겠습니다.”
김 디렉터가 호통하게 웃는데 박도희가 낮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그러니까 제가 그냥 있자고 했잖아요.”
가만히 있으라는 듯 김 디렉터가 눈을 부릅뜨자 박도희는 입술을 삐죽였다.
분위기가 정리되자 신재범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모였으니 대표님께 한 말씀 해주셔야죠!”
나는 직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보면서 말했다.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어서, 또 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갤러리의 대표가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박수가 터져 나왔고, 잦아질 때쯤 말을 이어갔다.
“제가 대표가 되었다는 것 외에 큰 변화는 없습니다. 여태까지처럼 잘해주시면 됩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눈치를 보던 박도희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네. 박도희 디렉터님 말씀하세요.”
“저…… 갤러리 이름은 계속 유지되는 건가요?”
“네. 이름을 유지될 겁니다.”
직원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남정숙 회장님의 이름을 따서 지은 갤러리이기에, 대표에서 물러난 상태에서 이름이 유지되는 것에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갤러리가 아닌 ‘남정숙 갤러리’가 유지되기 바라서 인수했기에, 이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설명을 들은 직원들이 고개를 엉거주춤 끄덕였다.
*
직원들과 짧은 만남을 끝내고 차에 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 대표님!”
고개를 돌리니 박도희가 달려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네. 박도희 디렉터님, 무슨 일이십니까?”
친한 사이기에 존대를 하는 것이 낯간지러웠지만, 곁에 신재범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신재범이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박도희가 그를 힐끗거렸다.
눈치 빠른 신재범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먼저 차에 타 있겠습니다.”
신재범이 차에 타고나서야 나는 반말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신재범이 차에 탔는데도 박도희는 좀처럼 말하지 못했다.
아까 사람들이 있는데서 말하지 못한 것을 보면, 물어보기 껄끄러운 이야기인 모양이다.
“말해봐.”
“저……. 갤러리간의 이동은 자유롭지 않겠죠?”
무슨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너 ‘감 갤러리’로 오고 싶어?”
“네…….”
눈치를 보면서 박도희가 답했고,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잠깐 휘청하긴 했지만 남정숙 갤러리는 명실상부한 메이저 갤러리이다.
브랜드 네임이 ‘감 갤러리’보다 훨씬 높다는 뜻이다.
“왜 그러고 싶은데?”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싶어요. 그런데 메이저 갤러리에서는 그게 어려우니까…….”
몇 년 전과 달리 요즘 메이저 갤러리는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어려웠다.
드물게 신인 작가를 발굴한다고 해도 박도희처럼 4-5년차가 나서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시무룩하게 박도희가 말을 이어갔다.
“갤러리 들어올 때 좋은 작가 발굴하는 게 목표였어요. 처음에는 작가 관리만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새 작가 발굴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버텼는데, 이제 시장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요.”
“무슨 소리인지 알았어.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서, 고민해 볼게.”
“네. 감사합니다.”
나는 박도희의 인사를 받으면서 차에 올랐다.
차가 갤러리를 빠져나오자 신재범이 나를 보면서 물었다.
“갤러리 옮기고 싶어 하는 것 맞죠?”
“어떻게 아셨어요?”
“딱 느낌이 그런 것 같아서요.”
“박도희 디렉터는 신인 작가 발굴에 관심이 있더라구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재범이 말했다.
“시장 상황이 변해서 여의치 않은 모양이군요.”
“네. 맞아요. 신 디렉터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침 손이 부족해 더 사람을 뽑아야 하기도 하구요.”
“그렇죠. 그럼 김 디렉터하고 상의해서 박 디렉터가 올 수 있도록 처리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선영주 작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까지 계약 의사를 밝혀달라고 하는데요.”
“계약 진행해주세요.”
“’감 갤러리로’ 계약을 진행하실 예정인가요?”
“선영주 작가는 사실 ‘남정숙 갤러리’와 더 어울리는 작가죠. 미팅 이후에 생각해보죠.”
“네. 계약까지 가는 데 쉽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애써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선영주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직한 느낌과는 달리 돈을 많이 밝힌다.
계약금으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 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작품과의 괴리감이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문득 박도희가 갤러리 이름을 지속할 건지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남 회장님이 없는 남정숙 갤러리는 앙꼬 빠진 찐빵 같은 느낌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들죠. 업계에서도 의아하게 여길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남 회장님이 갤러리로 돌아오지 않길 원하시니 말입니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는 다른 방법이 없을지 머리를 굴렸다.
“신 디렉터님. 남 회장님 집으로 가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
나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화분을 남 회장에게 내밀었다.
꽃을 보고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예쁘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불쑥 찾아왔다고 싫어하실까 봐 준비한 뇌물입니다.”
“뇌물치고는 내 취향을 너무 정확하게 파악하는 정성스러움이 있네요?”
나와 남 회장은 함께 웃고 식탁에 앉았다.
차를 내어주면서 그녀가 물었다.
“직원들은 잘 만났어요?”
“네.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줘서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남 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김 디렉터가 또 나섰나 보네요. 그런 분위기 다들 잘 못 만드는데, 김 디렉터는 화에 못 이겨서 하거든요. 민망했던 건 아니죠?”
“살짝 민망했지만 좋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안도의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스쳤다.
“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잘 지내요. 내 걱정은 할 것 없어요.”
“오늘 한 직원분이 그렇게 물으시더라구요. 갤러리 이름을 계속 ‘남정숙 갤러리’로 할 거냐구요.”
사뭇 진지해진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갤러리 이름은 바꾸는 것이 낫겠어요.”
“그건 싫습니다. 저는 ‘남정숙 갤러리’의 역사가 계속되길 바라서 인수했습니다.”
“저는 실패했어요. 실패의 그림자를 직원들이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그녀를 나는 지그시 바라봤다.
“그럼 실패로 남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갤러리로 돌아갈 수 없어요.”
“대표가 되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문으로 있어주셨으면 합니다. 남정숙 회장님이 없는 남정숙 갤러리는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직원들도 회장님이 그런 역할을 해주시면 훨씬 든든해할 겁니다. 제 입장에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거구요.”
“그래도 안 돼요.”
말과 달리 남정숙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순간이다.
“저한테 갤러리를 부탁하셔서 인수했습니다. 이제 회장님이 제 부탁을 들어주실 차례입니다.”
복잡한 눈빛으로 한참 나를 보던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알았어요.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한 대표에게는 못 당하겠네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는데…….”
“누구한테도 좋을 것 없는 결심은 왜 하세요. 앞으로 저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럴게요.”
환하게 웃는 나를 보면서 남 회장도 따라 웃었다.
*
박 디렉터는 계속 새로고침을 누르면서 탑 옥션 공지를 확인했다.
“왜 공지가 안 올라오는 거야……!”
양 디렉터는 그 근처를 서성이면서 핸드폰을 힐긋 댔다.
그 모습이 거슬렸는지 박 디렉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꺼 힐긋거리지 말고 본인 걸로 봐.”
“떨려서 못 보겠단 말이에요……!”
왜 저러냐는 듯 박 디렉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재범과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감이 끝났지만 누구도 퇴근에 관심이 없었다.
오늘 신인작가 후원 경매 최종 10인에 대해 발표하는 날이었다.
내가 있을 때는 최종 10인이 속한 갤러리에 먼저 따로 연락을 주었는데, 요즘은 홈페이지 공지로 대신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대기상태로 있는 것이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신재범에게 물었다.
“원래 6시에 발표 맞죠?”
“네. 8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왜 안 올라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
나뿐만 아니라 후보 30인에 오른 작가와 갤러리스트들은 다 이런 상태일 것이다.
푹 한숨을 쉬고 내가 말했다.
“민효성 작가도 저러고 있겠죠?”
“아마 더 심할걸요.”
컴퓨터에 붙어앉아 미친 듯이 새로고침을 누를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말로는 후보에 든 것만으로 충분하다 했지만, 그의 눈빛은 최종 10인에 들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영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서 묻고 싶었지만, 안다고 해도 말해주지 않을 뿐더러 보안상 모른다고 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시 시계를 보니 8시가 되었다.
더 이상 발표를 기다리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발표 안 날 것 같습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퇴근하기로 하죠.”
“네.”
“예.”
대답을 하면서도 박 디렉터의 손은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무언가를 본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 발표 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