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진성 박물관 (2)
(220/226)
220화 진성 박물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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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화 진성 박물관 (2)
2022.04.27.

겸재의 해악팔경과 송유팔경도는 국내 최대 사립 박물관인 진성 박물관의 소장품이다.
한마디로 파는 물건이 아니다.

“박물관 소장품을 어떻게 사라는 겁니까?”

“흥분하시지 마시고 이야기 먼저 들어보시죠. 진성 박물관 정필영 관장을 알고 계시죠?”

“당연하죠. 저 골동상이었습니다. 고미술 업계 사람 중에서 정필영 관장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피겨 스케이팅을 하면서 김연아를 모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럴 정도로 진성 박물관의 상징성은 높았다.
정필영 관장의 아버지인 정혁진은 일제 강점기 때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은 컬렉터로 유명하다.
정혁진의 호인 ‘진성’을 따서 박물관 이름이 지어졌다.

“최근 정 관장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상속을 준비한다는 말이 있어 저희 쪽에서 접촉했습니다.”

“상속세 문제가 잘 준비가 안 된 모양이죠?”

“네. 그렇습니다.”
국내 최대 사립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진성 박물관의 재산의 대부분은 유물들이었고, 관람비로 직원 월급을 주고 유물 유지 관리에 쓰면 남는 것이 없을 터였다.
운영에는 큰 지장이 없을 테지만, 상속세 문제라면 달라진다.
재산의 50%를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정필영 관장의 건강 악화를 어떻게 알고 접촉을 한 건지, 도강그룹의 정보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안 좋은 일을 기회로 노렸다는 데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직접 정 관장의 상속자인 아드님에게 접촉하면 되었을 텐데요.”

“접촉했습니다.”

“판매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요.”

“그것보다 더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죠.”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절망적’이라고 하는 건지 호기심이 일었다.
낮은 숨을 뱉어낸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상속세 문제가 해결이 어려운 상황에서 아들인 정지섭이 박물관 운영을 원하지 않아, 국가 기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하더군요.”

“기부요?”

“네.”

“정필영 관장님이 허락하셨나요?”
정필영 관장은 진성 박물관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기에 허락을 했을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반대하셨지만, 아들의 입장이 워낙 완고하다 보니 박물관의 명성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국가 기증이 낫다고 판단하신 거 같습니다.”
유물을 원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다른 개인에게 팔리면 언젠가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국가에 기증되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강 회장님의 마음이 조급해신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 쪽에서 계속 접촉해봤지만 묵묵부답이어서, 도움을 주십사 이렇게 온 겁니다.”
비서실장의 얼굴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 표정에서 나는 이 유물을 원하는 사람이 강 회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 회장은 겸재를 이 정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차기 대선 주자에게 보낼 선물인가요?”
비서실장이 움찔 놀라는 것을 보니 맞다.

“아미타불화에 이어, 이젠 겸재 화첩이네요.”
조소가 입가에 스치자 비서실장이 변명하듯 말했다.

“차기 정권에 협조하지 않으면 그룹 운영이 힘들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알죠. 현 정권의 후광을 입은 상태에서 제일 먼저 표적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다음 정권에서는요? 계속 반복하실 건가요?”

“안 좋게 보일 거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부의 협조가 없으면 기업하기 어렵습니다. 저희 같은 대기업은 더 그렇구요.”
나는 비서실장을 지그시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모르지 않습니다. 그저 고미술을 사랑하시는 강 회장님이 고미술품을 이용하시는 이 상황이 씁쓸해서 그럽니다.”

“…….”
착 가라앉은 내 표정을 보고 그는 입을 다물었고,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도강그룹에서 여러 차례 접촉했는데도 반응이 없는 거라면, 제가 접촉했다고 결과가 달라질 거라 보지 않습니다. 제가 정 관장님과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회장님은 대표님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회장님께서 신경 많이 써주신 것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한번 만나기라도 해주세요.”
진성 박물관을 생각하면 받아들이고 싶었고, 뇌물을 생각하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고민해보고 연락드리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이 훌쩍 가 있어서 놀랐다.
눈치 빠르게 비서실장이 말했다.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서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예전에는 내가 비서실장의 눈치를 봤다면 이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새삼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야기를 들은 다영이 충격 받아 멍해졌다.

“기증 이야기가 진짜였구나…….”

“소문이 돌았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영이 답했다.

“정 관장님 건강 안 좋다는 이야기 돌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안 믿었죠. 진성 박물관이잖아요.”

“그렇지……. 아들은 왜 박물관을 물려받지 않겠다는 거야?”

“박물관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잖아요. 듣기로는 활달한 성격이라 유물을 고루하게 여긴다는 것 같았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고루하긴 뭐가 고루하다는 거야! 유물은 글로 쓰이지 않은 역사라고!”

“아이구. 오빠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이없어 하는 나를 보며 다영이 새침하게 말했다.

“아버님께 다 들었거든요. 오빠가 골동상 물려받기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거야…….”

“아버님이 가게 일 배우라고 하면 일주일 동안 말도 안 했다면서요. 나는 오빠가 그 정도로 가게를 물려받기 싫어했는지는 몰랐어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나도 그랬다.
창피했던 과거를 들켜서 내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땐 철이 없어서…….”

“그 아들도 그런가 보죠. 그리고 정말 박물관 일이 적성에 안 맞을 수도 있구요. 그런데 억지로 시킬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래도…… 진성 박물관이 없어지는 건 너무 충격이야.”
사립 박물관 중 가장 엄격한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학문적 연구들도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게 되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도 그건 그래요. 고미술팀에 일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거든요. 진성 박물관은 유물들이 지켜질 수 있도록 많은 공을 세운 데잖아요.”

“그렇지. 아들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운영하면 좋은데…….”

“그것도 쉽지 않으니까 기증이라는 강수를 둔 거겠죠. 그나저나 제안은 받아들일 거예요?”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과에 상관없이 한번 시도를 해봐야겠어. 겸재 화첩을 구하는 건 둘째치고, 진성 박물관이 사라지는 건 막고 싶어.”

“그래요. 업계 1인으로 응원할게요!”

*
다음 날.
나는 과일바구니를 들고 정 관장의 병실을 찾았다.
60대였지만 70대로 보일 정도로 그는 초췌했다.

“안녕하세요. ‘감 갤러리’의 한지감입니다.”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진성 박물관 정필영 관장입니다.”
정 관장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진성 박물관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내 갑작스런 제안에 그는 미간을 좁혔다.

“네?”

“듣기로는 국가에 기증을 생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수하겠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박물관은 갤러리가 아닙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고, 유물들을 후대에 전하는 곳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인수하고 싶습니다.”

“인수해서 소장품들을 빼돌릴 계획, 아닙니까? 도강그룹 강 회장이 겸재 화첩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압니까?”
노여운 목소리가 병실에 가득히 울렸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관장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겸재 화첩은 강 회장님께 넘기지 않겠습니다. 저도 고미술품이 이용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할 생각인가 본데…….”
그의 말을 자르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강 회장님의 제안 때문에 진성 박물관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닙니다. 강 회장님은 제가 여기 온 줄도 모르고 계십니다. 고민해 보겠다고만 했을 뿐, 제안에 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제야 정 관장의 노여움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정말입니까?”

“제가 거짓말을 해서 얻는 것이 뭐겠습니까. 확인해보셔도 괜찮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그는 물었다.

“왜 갑자기 진성 박물관을 인수하겠다는 거죠?”

“간단합니다. 진성 박물관이 없어지는 걸 원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국가에 기증하면 어떻게든…….”

“이런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기증을 한다고 유물이 잘 관리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국립 박물관 내에는 이미 많은 유물들이 있고, 이를 관리할 인원은 제한되어 있다.
때문에 중요한 가치가 지닌 유물이 아니라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진성 박물관에는 보물급 유물들이 20점 이상이지만 전체 유물의 일부다.
나는 그를 똑바로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처럼 유물들이 유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 관장의 눈동자가 세차게 동요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겸재 화첩을 강 회장에게 넘기지 않을 겁니까?”

“관장님이 반대하신다면 넘기지 않겠습니다.”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인수하시죠. 하지만 겸재 화첩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겠습니다.”

“네. 어려운 결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인사를 마치자 그가 사람을 불렀다.

“나 일으켜줘.”
도움을 받아 일어선 그가 나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요. 진성 박물관의 맥을 이어주시는 분인데 당연히 이래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
초조하게 서성이는 강정휘를 보면서 비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신경질적으로 강정휘가 소리쳤다.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죄……죄송합니다.”
비서가 사과를 하는데도 강정휘는 표독스럽게 말했다.

“헛소리 할 거면 당장 나가! 네 얼굴 때문에 구역질 날 것 같아!”

“…….”
상처를 받은 비서가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마저 강정휘에게는 못마땅했다.

“일을 못 하면 예쁘기라도 하든가. 아니며 눈치라도 있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들이 주변에 있어 너무 피곤하다 여겼지만, 어디까지나 화풀이였다.
곧 미션이 끝나는 시간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진 상황이었다.

“끝나면 다시 하면 그뿐이야. 금방 5단계까지 갈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는 불안함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시간이 지났고 메시지가 떴다.
[미션에 실패했습니다. 초기화됩니다.]
1초 만에 메시지는 사라지고 안경의 형태가 나타났다.
강정휘는 조심스럽게 안경을 뺐다.

“초기화되었다고 이렇게 빠질 건 뭐야.”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손에 쥔 안경을 꼼꼼하게 봤다.
김승재에게 받았을 때는 쓰는 데 급급해 그 모양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생겼네. 이 유물이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겠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면서 마음이 안정되었다.
안경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다.
천천히 스텝을 밟아서 미션을 성공시키면 그뿐이다.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강정휘는 안경을 썼다.
이제 안경이 흡수되면서 온몸에 전율이 흐를 타이밍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러지 않았다.

“왜 이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