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진성 박물관 (3) (221/226)


221화 진성 박물관 (3)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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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안경이 흡수되면서 온몸에 전율이 흐를 타이밍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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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지……?”

당황한 그녀가 책상에 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췄다.

안경은 흡수되지 않고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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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하면 될 거야.”

불안감을 애써 뒤로 하고 그녀는 안경을 빼고 다시 썼지만 안경은 흡수되지 않았다.

다음 미션을 실패하면 안경은 그 전 단계로 내려간다.

미션을 하기 전 그녀는 1단계였고, 거기서 한 단계 내려가면 아무 정보도 보이지 않는 단계다.

여기까지는 강정휘가 예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녀가 몰랐던 것이 있으니, 미션 실패로 정보가 보이지 않는 단계로 돌아가면 안경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접 확인했음에도 강정휘는 부정하면서 안경을 몇 번이고 다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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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냥 잠깐 이러는 거야.”

하지만 몇 번을 써도 안경을 그대로 있고 흡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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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 없어. 이럴 수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쳐봐도 안경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끈이 완전히 끊어져버리는 순간이었다.

털썩, 강정휘는 주저앉았다.

*

강 회장의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가 달려나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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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마워요. 한 대표……! 한 대표라면 해결할 거라고 믿었어요.”

나는 겸재 화첩을 넘기지 않겠다고 정 관장에게 약속했지만, 도리어 정 관장이 앞으로의 박물관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겸재 화첩을 넘기겠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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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닌 정 관장님께 감사인사를 하시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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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완고한 정 관장을 설득시켜준 게 바로 한 대표잖아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죠. 날씨가 무더운데 큰일 하는 사람이 더위라도 걸리면 어떻게 해요.”

그는 껄껄 웃으면서 나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식탁에는 수라상보다 더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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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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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겠습니다.”

밥을 먹는데 기분이 좀 묘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는 강 회장이 얼굴을 붉혔고, 인연을 끊자고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이 신경을 자극해 입맛을 떨어트렸고, 나는 평소보다 빨리 수저를 놓았다.

그런 나를 보고 강 회장이 걱정스럽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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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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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입맛이 통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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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갤러리 인수했다죠?”

내 입으로 말하고 다닌 적이 없건만 미술계에서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내가 뉴욕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지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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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많은 작가들이 계약해지를 해서 새로운 작가를 찾기 위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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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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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고, 테이블에는 다과상이 차려졌다.

그가 나를 지그시 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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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비서실장이 찾아가 기분이 많이 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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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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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표님. 이 무슨 무례입니까.”

당황한 기색도 잠시, 강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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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비서실장. 한 대표는 여전히 솔직하군요. 그 점이 좋아요. 정권이란 날개를 단 이후, 이 늙은이에게 그런 솔직함을 보이는 사람은 더 없어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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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을 넘어서 무례하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례한 김에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강 회장을 똑바로 보면서 나는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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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비자금과 관련된 일에 저를 끌어들이지 말아주십시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제가 이곳에 올 일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이제 나는 국내 세 곳의 갤러리, 한 곳의 박물관, 그리고 해외 세 곳의 갤러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고용인으로서 강 회장이 시킨 일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불법적인 일에 연관이 되면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직원들에게까지도 그 불똥이 튄다.

또한 궁극적으로 예술을 비자금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동의할 수도 없었다.

비서실장이 나서려고 하자 강 회장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가만히 나를 보던 강 회장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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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그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 대표. 이번 일은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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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세 갤러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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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어요. 대표로서 책임질 일이 많아졌다는 것. 예전의 한 대표가 아니죠. 이번 일도 조용히 처리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문제가 생겨도 내가 떠안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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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회장님.”

현재 도강그룹은 대통령 최기석의 지원을 받으면서 현성그룹을 제치고 재계서열 1위를 탈환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정말 고마웠다.

*

뉴욕 가기 전날, 나는 직원들을 불러모아 회식을 했다.

거기에는 남정숙 갤러리, 감 갤러리, 가인 갤러리는 물론 세 갤러리 건물 관리를 맡는 관리 팀도 함께였다.

100명이 가까이 되는 인원이 레스토랑을 가득 채웠다.

귓가에 대고 신재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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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전체 빌리기를 잘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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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꽉 차네요!”

근처에서 듣고 있던 박 디렉터가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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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로 내시는 건데 부담되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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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박 디렉터가 좀 보태 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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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얼마 못 버는 거 아시면서어.”

그녀는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했고, 옆에 있던 양 디렉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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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 국내 매출만 오천억이었잖아요. 올해는 1조 찍겠죠? 대표님 완전 부자예요!”

내가 직원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김태하는 먼 곳에서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는 생글 웃으면서 양 디렉터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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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천억이 다 제 주머니로 온 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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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하고 홍콩 매출도 어마어마하잖아요! 거기에다 부동산하고 주식도 손만 대면 터지시고! 대표님, 저도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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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디까지나 좋은 자산 관리사 덕분이에요. 부동산하고 주식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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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세요!”

건장한 남자가 어깨까지 흔들면서 알려달라고 하니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다.

나와 대조적으로 양 디렉터 주변에 있는 여성들은 아이돌을 보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단 한 사람, 박 디렉터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는 양 디렉터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그만하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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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디렉터. 대표님한테 정도 좀 지켜요! 여기가 사석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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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자리면 사석이나 마찬가지죠.”

입술을 삐죽거리는 양 디렉터를 보면서 박 디렉터가 한마디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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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구!”

그만하라고 마무리 날카로운 눈빛을 날리자 양 디렉터는 깨깽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약간 경직되었고, 나는 웃음으로 풀어보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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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편하게 식사하시고 이야기 나누시라고 마련한 자리예요. 가고 싶으시면 가셔도 됩니다.”

다시 의기양양해진 양 디렉터가 고개를 들었고, 박 디렉터는 지켜보고 있다는 손동작을 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자리에 김태하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신재범이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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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건배사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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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식사하는 자리에서 건배사는 좀 그렇잖아요. 신 디렉터님도 편하게 즐기세요. 피곤하시면 집에 가셔도 되구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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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이야말로 일찍 들어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환경 바뀌면 잠드는 게 더 어려우실 텐데요.”

2년 동안 안경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졌고, 그 결과 수면장애를 얻었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신재범을 안심시키려 나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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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나는 100여 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즐겁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굳이 뉴욕 가기 전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힘을 받고 싶어서였다.

안경 없이 2년 가까이 지났지만 오직 나만의 힘으로 갤러리를 이렇게 성장시켰다는 자신감, 그리고 많은 직원들이 잘 갤러리에 다니고 있다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쭉 돌아보다 보니 다시 시선이 김태하가 있었던 자리에서 멈췄다.

그 자리는 아직도 비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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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갔나?”

가도 상관은 없지만, 인사를 하지 않고 간 것이 조금 서운했다.

그때 다영에게 전화가 와서 나는 레스토랑에서 나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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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다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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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늦게 들어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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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금방 들어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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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모처럼 회식인데 직원들하고 어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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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가 있으면 재미없지.”

풋 웃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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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긴 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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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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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와요.]

갑자기 존댓말이 엄청 거슬렸다.

몇 번이나 말 놓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안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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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다영아. 말 진짜 언제 놓을 거야? 우리가 알고 지낸 지 6년이 넘었는데, 말 놓을 때도 되지 않았어? 심지어 우리 사귄 지 4년 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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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게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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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감 느껴져서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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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잘 지내다가 왜 그래요. 내 맘이에요. 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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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전화가 뚝 끊겨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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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만 하고, 연장자 대우는 안 해.”

투덜거리면서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낮게 내리깐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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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나와. 값은 내가 치를게.”

목소리를 따라 걸어가니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건물 사이 좁은 통로에서 김태하가 통화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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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그가 통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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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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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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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하고 통화중이었습니다.”

또 존댓말이다.

다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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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지금 근무시간도 아니잖아.”

그제야 그는 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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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이 되서 그런다! 안에서는 대표님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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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말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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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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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다 고집이 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나는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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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으슥한 곳에서 형수님이랑 통화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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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곳에서 통화하다 보니 그렇지 뭐.”

아내와 통화라기엔 너무 명령조였던 것 같아 나는 의아했다.

평소 김태하는 아내에게 다정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김태하가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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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기서 뭐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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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다영이랑 통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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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내일 멀리 가잖아. 가면 제대로 자지도 못할 텐데 미리 좀 자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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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럴 거야.”

그는 빨리 가라는 듯 나를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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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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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네.”

나는 투덜대면서 그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의아함은 어느새 날아가버렸다.

김태하가 경악스러운 일을 저지르는 중이라는 것을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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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 라운지 들어선 신재범과 나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뉴욕 고층 건물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신재범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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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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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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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대표님은 여기 자주 오셨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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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을 때는 자주 왔죠.”

여기서 주로 비즈니스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났기에 어느 순간 감흥이 없어졌다.

하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보니 정말 가슴이 시원하다.

구경도 잠시 신재범은 다시 긴장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음료로 목을 축이며 긴장감을 털어버리려 애쓰며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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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우드 쪽에서 조건으로 내세운 게 없다는 점이 좀 불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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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습니다. 아예 확실히 뭔가를 요구하면 마음이 놓일 텐데 말입니다.”

센트럴 갤러리에서 열 명이 넘는 작가들이 계약 해지를 요구했고, 나는 위약금을 물지 않고 해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주요 작가들이 많이 나가, 다른 작가로 채워넣지 않으면 센트럴 갤러리는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작가들의 신뢰를 받는 크리스를 내 편으로 만들려는 것이 오늘 미팅의 목적이었다.

그는 미팅에는 순순히 응했지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때 형광색 크롭티를 입고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바로 크리스 우드였다.

나와 신재범이 일어나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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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갤러리 한지감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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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범입니다.”

그는 장난기가 흐르는 표정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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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우드입니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는 플라스틱 백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This is plastic bag’이란 글자가 새겨진 백이었다.

신재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영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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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작가님을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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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런 입에 발린 말 싫어해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요구 사항을 내내 말하지 않더니 이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잔다.

정말 제멋대로다.

왜 이런 그가 작가들의 신뢰를 받는 걸까?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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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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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을 만드는 데 투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가 옆에 놓았던 가방을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난데없이 가방을 만드는 데 투자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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