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최후의 선택 (1) (224/226)

224화 최후의 선택 (1) 2022.05.07.

16589409716859.jpg

16589409716866.jpg “저는 이 자리에서 그 안경을 경매에 붙이려고 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승재가 버럭 소리쳤다.

16589409716873.jpg “누구 마음대로 경매야! 안경 주인도 아닌 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16589409716866.jpg “네. 저는 안경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닌 건 마찬가지죠. 안타깝게도 안경은 제 점유아래 있습니다. 제가 허락하는 사람만이 가져갈 수 있죠.”

김승재가 다시 시끄럽게 굴려고 하자 강정휘가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6589409716873.jpg “입을 닥쳐야 할 새끼는 내가 아니라 저 자식이야!”

나는 냉정하게 대응했다.

16589409716866.jpg “경매가 아니라면 제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생각인데, 그러길 원하세요?”

16589409716873.jpg “…….”

내가 주고 싶은 사람이 자신일 리 없으니,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돈이 제일 많은 이 회장은 내가 세운 기준이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1658940971691.jpg “굉장히 합리적인 기준이군.”

16589409716916.jpg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이수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녀의 화력이 이 회장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장이 없었으면 저 말은 분명 이수지가 했을 것이다. 그 생각에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데, 성미 급한 이 회장이 물었다.

1658940971691.jpg “안경은 지금 어디에 있지?”

16589409716866.jpg “안전하게 은행 금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딸 아니랄까봐 성미가 급하기는 이수지도 마찬가지였다.

16589409716916.jpg “낙찰되고 돈을 지급한다고 해도, 한 대표가 안경을 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16589409716866.jpg “그 질문 나올 줄 알았습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하나같이 구두 약속을 못 믿으시는 분들이니까요. 테이블에 있는 서류를 확인해주세요.”

모두 서류를 먼저 집으려고 했지만 이 회장이 가장 빨랐다.

1658940971691.jpg “낙찰이 되고 돈이 지급되는 동시에 안경의 소유권이 이전된다는 공증이구만.”

오전 동안 이 일을 처리하느라고 정말 정신이 없었다.

16589409716866.jpg “네. 못 믿으실까 봐 변호사님도 모셨습니다. 곧 도착하실 거예요.”

이 회장의 손을 떠난 공증서는 이수지를 거쳐 강정휘에게 전해졌다. 다 읽은 강정휘가 김승재에게 주었지만 그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초조한 표정으로 강정휘가 물었다.

16589409732209.jpg “돈을 언제까지 입급해야 하는데?”

16589409716866.jpg “48시간 안으로 입금하셔야 합니다. 48시간이 지났는데도 입금이 안 되면 경매는 다시 열리게 될 겁니다.”

머리를 굴리는 강정휘의 표정에서 나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당장 돈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낙찰받아 경매를 지연시킬 생각이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일관성이 있는지 볼 때마다 놀란다.

16589409716866.jpg “경매 지연의 목적으로 자금이 없는데도 응찰하진 마세요. 다음 경매에는 여기 있는 분들 보다 더 많은 분들이 모이게 될 테니까요. 그럼 더 쟁쟁한 경쟁자들이 함께하겠죠?”

정곡을 찔린 강정휘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김승재가 충혈이 된 눈으로 소리쳤다.

16589409716873.jpg “주인도 아닌 네가 왜 안경의 대금을 가져! 이 사기꾼!”

안경의 대금은 모두 기부하는 것으로 공증서에 이미 명시되어 있다고 설명하려 했지만, 나설 필요가 없었다. 소음에 짜증이 난 이 회장이 대신 화를 냈기 때문이다.

1658940971691.jpg “공증서도 제대로 안 읽었어? 조용히 하지 못해?”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김승재가 겁을 먹었다.

16589409716873.jpg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이수지와 이 회장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지더니 참지 못한 이 회장이 소리 질렀다.

1658940971691.jpg “누가 장인어른이야!”

16589409716873.jpg “그……그게 아니라…….”

이 회장의 버럭질에 김승재는 겁을 먹고 입을 다물었다. 이수지는 김승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지 그를 외면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갤러리 일을 도와주는 최 변호사가 인사를 하면서 들어왔다. 나는 최 변호사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16589409716866.jpg “오늘 경매에 증인이 되어주실 변호사님입니다.”

1658940971691.jpg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인사를 하고 소파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소파에 앉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서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16589409716866.jpg “이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테이블에 마련된 패들을 들어주세요.”

이수지가 3번, 이 회장이 6번, 강정휘가 17번, 김승재가 22번 패들을 각각 들었다. 내가 부탁한 대로 변호사는 그 번호를 적었다. 변호사가 번호를 다 적고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다시 진행했다.

16589409716866.jpg “시작가는 50억, 3억씩 올라갑니다.”

말이 끝나기도 이 회장이 패들을 들었다.

16589409716866.jpg “6번 고객님 50억!”

강정휘도 질 수 없다는 듯 패들을 올렸다.

16589409716866.jpg “17번 고객님 53억!”

이수지와 김승재도 뒤를 이었다. 4명이 경쟁적으로 응찰하면서 가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금방 100억이 되었다.

16589409716866.jpg “3번 고객님 100억! 이제 10억씩 올라갑니다!”

산뜻하게 말하는데도, 무거운 금액 때문인지 이 회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지 강정휘는 비장하게 패들을 들었다.

16589409716866.jpg “17번 고객님 110억!”

비장한 강정휘와 대조적으로 이 회장은 아무렇지 않게 패들을 들었다.

16589409716866.jpg “6번 고객님 120억!”

고민하던 김승재는 패들을 내려놓았다. 드디어 한 명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와 달리 이수지는 계속 응찰했다.

16589409716866.jpg “3번 고객님 130억!”

눈깜짝할 사이에 가격은 300억이 되었다.

16589409716866.jpg “6번 고객님 300억! 이제 30억씩 올라갑니다.”

30억이라는 말에 강정휘의 동공이 흔들렸고, 가벼운 패들을 10kg가 넘는 아령인 것처럼 떨면서 들었다. 자금의 최대치에 다다랐기 때문일 터였다.

16589409716866.jpg “17번 고객님 330억. 6번 고객님 350억!”

떠는 강정휘와 달리 이 회장의 표정에는 미세한 변화도 없었다. 자본의 차이가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수지도 자신의 패들을 올렸다. 이 회장만큼 편안하지 않았지만 이수지의 표정도 큰 변화는 없었다.

16589409716866.jpg “3번 고객님 380억!”

나의 시선은 곧바로 강정휘에게 갔다. 그녀는 팔을 덜덜 떨 뿐 패들을 올리지 못했다. 응찰을 포기한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이 회장과 이수지였다. 아버지와 딸이 벌이는 경합이라니 흥미롭다. 두 사람은 패들을 계속 올렸고, 가격은 치솟아서 어느새 1000억이 되었다. 뉴욕에 있을 때는 자주 마주했던 금액이지만 한국에서 경매할 때는 거의 본 적 없는 금액이라,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16589409716866.jpg “3번 고객님 1000억! 6번 고객님 1100억!”

아버지와 딸이지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이 순간 그들은 부모 자식이 아닌 경쟁자였다.

16589409716866.jpg “3번 고객님 1200억. 6번 고객님 1300억. 1400억. 1500억. 3번 고객님 1600억!”

조금 있으면 2000억이다! 내가 갖는 돈도 아닌데 가슴이 쿵쾅거렸다.

16589409716866.jpg “6번 고객님 1700억! 1800억! 1900억! 2000억!”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숨 쉬는 것도 잊어 거친 숨을 뱉고 호흡을 정리했다.

16589409716866.jpg “이제부터 200억씩 올라갑니다.”

이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패들을 들었다.

16589409716866.jpg “6번 고객님 2200억!”

나는 바로 이수지를 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고민했다. 이수지에게도 2400억은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16589409716866.jpg “2400억, 없으십니까?”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패들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응찰을 포기한 것이다. 나는 이 회장을 보면서 말했다.

16589409716866.jpg “6번 고객님께 2400억에 낙찰되었습니다.”

원래는 낙찰봉을 두드려야 했지만, 없어서 손뼉으로 마무리했다. 다른 사람들이 절망하는 반면 이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본의 화력이 가장 강했기에 사실 이미 예상된 결과이긴 했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이 회장이 말했다.

1658940971691.jpg “지금 바로 입금하면 되는 건가?”

16589409716866.jpg “네. 그렇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전화를 걸어 입금 처리를 지시했다.

16589409716866.jpg “입금 확인되면 은행 금고에서 가져가시면 됩니다. 변호사님이 안내해주실 겁니다.”

1658940971691.jpg “알겠네.”

패자들은 침울한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나는 가방을 챙겼다.

16589409716866.jpg “이제 저한테는 더 이상 안경이 없습니다. 안경에 대한 건 저한테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전화를 걸거나 찾아와도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는 오늘 하루 빌렸으니, 원하시면 더 있다 가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나는 룸에서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안경을 보낸 것 같아 시원한 마음이 들었다. 주차장에서 차에 오르려는데 이수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16589409716916.jpg “뭐가 그렇게 싱글벙글이야? 저렇게 대단한 물건을 넘겨놓고?”

언제 왔는지 이수지가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16589409716866.jpg “너무 대단한 물건이라서 제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었거든요.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말이에요.”

16589409716916.jpg “하아……. 돈이 없다는 절망감, 오늘 처음 느꼈어.”

어이가 없어서. 정말 돈 없는 사람이 들으면 화낼 말이었다.

16589409716866.jpg “관장님은 돈 많으시잖아요.”

기가 막히다는 듯 이수지가 웃었다.

16589409716916.jpg “돈은 아버지가 더 많아. 그런데도 갖길 원하잖아. 돈이라는 게 그래. 가져도 가져도 부족해.”

16589409716866.jpg “애초에 안경을 원한 건 아니었잖아요. 김승재한테 당한 만큼 돌려주려던 거 아니에요?”

16589409716916.jpg “맞아. 그랬지. 시작은 분명 그랬는데, 돈을 벌 수 있는 물건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갖고 싶더라. 언니랑 오빠 제치고 현성의 수장이 되고 싶거든.”

이수지는 스스로를 자조했다.

16589409716916.jpg “환상 같은 꿈이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50년은 거뜬하실걸.”

나는 가만히 그녀를 보다 입을 열었다.

16589409716866.jpg “유경험자로 말씀드리는 건데요. 안경이 대단한 물건인 것만큼 감당해야 하는 것도 많을 거예요. 그리고 안경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돼요. 시간의 문제죠.”

16589409716916.jpg “안경의 도움을 받았으면서 자신감이 넘치네?”

16589409716866.jpg “갤러리는 온전히 저의 힘으로 일군 거라서요.”

이수지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나를 훑어보았다.

16589409799765.jpg

16589409716916.jpg “잘난 척은!”

16589409716866.jpg “잘났잖아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차에 올랐다.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와, 아직 낮이라 한산한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창을 가득 채워 꼭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었다. * 안경은 이 회장의 손에 들어갔고,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인 갤러리의 보고서를 훑어봤다. 3개월 연속으로 매출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16589409716866.jpg “관람객 유입 자체가 안 되는 건가?”

뭐가 문제인지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나는 인터폰으로 윤 비서에게 말했다.

16589409716866.jpg “도 디렉터 좀 불러주세요.”

1658940971691.jpg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사무실을 찾은 사람은 박도희가 아닌 신재범이었다.

16589409716866.jpg “왜 헤드 디렉터님이 오셨어요?”

16589409818062.jpg “도 매니저가 지금 자리를 비웠습니다.”

16589409716866.jpg “무슨 일 있어요?”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답했다.

16589409818062.jpg “임미래 작가가 쓰러졌다고 합니다…….”

16589409716866.jpg “어쩌다가…….”

16589409818062.jpg “방금 전에 도 매니저가 전화를 줬는데, 영양실조라고 하네요. 생활고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16589409716866.jpg “……그렇군요.”

10%의 예술가들은 많은 돈을 벌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미디어 아티스트 같은 경우는 더 돈을 벌기가 어려웠다. 작품을 만드는 비용 자체가 다른 작품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일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어두워진 내 표정을 보고 신재범이 말했다.

16589409818062.jpg “대표님, 자책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16589409716866.jpg “아는데 마음이 안 좋네요. 임 작가가 맡을 수 있는 괜찮은 작업이 있는지 알아봐주시겠어요?”

16589409818062.jpg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도 디렉터를 부르신 겁니까?”

그제야 나는 가인 갤러리 매출을 떠올렸다.

16589409716866.jpg “아! 가인 갤러리 매출이 계속 떨어져서요. 유입 자체가 줄어든 건가요?”

16589409818062.jpg “아무래도 일반사람들이 갤러리에 들어오긴 어려우니 말입니다. 10% 이상이 감 갤러리로 넘어와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경향이 있죠.”

16589409716866.jpg “저는 미술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인 갤러리를 통해서 미술을 접했으면 좋겠어요.”

신재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16589409818062.jpg “저도 그렇습니다. 미술에 대해서 너무 고상한 느낌을 가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즐기는 대상이라는 놀이의 측면을 강조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16589409716866.jpg “놀이…… 맞아요. 놀이!”

나는 책상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