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덫2020.12.12.
쿵! 짜라랑, 무언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뒤돌아보니 유리 케이스는 엎어지고 커다란 꽃 장식이 떨어져 있었다. 그 앞에 반쯤 넋을 놓은 정다영이 멍하게 서 있었다. 꽃 장식을 옮기다 유리 케이스를 세게 친 모양이었다. 상사로 보이는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다영 씨!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곧 오프닝 파티 시작되는 거 몰라! 그리고 이 연적…… 대표님이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신 거라고!”
찹쌀떡 같이 하얗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순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누가 미, 밀쳐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얼른 치워!”
“……네!”
정다영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상사는 도와주지도 않은 채 매서운 눈빛으로 압박했다. 뒤늦게 온 동료들로 인해 전시장은 어렵지 않게 정돈되었다. 잠시 후, 나를 사무실까지 안내해주었던 무서운 인상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따라오라는 듯 정다영에게 고갯짓했다. 정다영은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따라갔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둘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정다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연적 값, 다영 씨가 보상해야 할 거야. 대표님이 아시는 분에게 받아온 거라 상황이 아주 난처하게 됐어.”
그 말에 정다영의 온몸이 잘게 떨렸다.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못해도 천만 원은 넘을 거야.”
후두둑, 정다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네…… 갚겠습니다.”
그 모습이 꼭 동네 양아치한테 돈 뜯기는 초등학생 같았다. 안쓰러워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남에 일에 나선다는 것이 어쩐지 좀 꺼려졌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도와주기로 했다. 나 역시 정다영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날, 내가 전화를 건 시간은 폐점 5분 전이었다. 정다영이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달항아리를 35억에 파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벅저벅 나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남자가 엄청난 아우라를 뿜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일은 그쪽이 상관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아우라에 눌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젖 먹던 용기까지 짜내서 입을 열었다.
“저도 상관하고 싶은 건 아닌데, 아까 강정휘 대표님이 저한테 부탁하신 것도 있고 해서요. 연적 봐달라고 하셨거든요.”
‘강정휘 대표’라는 말에 남자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포스를 자랑하는 남자도 상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낱 직장인이었다.
“말씀하시죠.”
나는 구겨진 어깨를 폈다. 분명 구석에 있음에도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연적이요, 진품이 아닙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해도 되나 싶었지만 입이 상관없이 움직였다.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표님하고 친분이 두터우신 분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 들었습니다.”
남자가 다시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이번엔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진품이 아닙니다. 굳이 가격을 매기자면 5천 원이에요.”
연적 위의 숫자는 50만 원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나는 5천 원이라고 단언했다. 5천 원은 위조품일 경우 예의상 감정하는 금액이었다. 내 당당한 태도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이거, 좀 부담스러운데. 이쯤에서 나는 남자가 그만 물러나주길 바랬다. 일단 골동품 직원이라는 명함, 이는 내가 그보다는 전문가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곧 오프닝 리셉션도 시작한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불신의 눈빛으로 날 압박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합니까? 물건을 만져보신 적도 없지 않습니까.”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연적이나 도자기류는 감정할 때 시각은 물론이고 촉각, 후각에 많이 의존한다. 그마저도 내 수준에서는 구별해내기 어려웠다. 나는 생초짜니까.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지는 거 중요하죠. 하지만 오래 감정을 하다 보면 만지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빛깔이나 전체적 조형만 봐도 구분이 돼요.”
이제 일한 지 일주일을 갓 넘긴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아까 가품이라는 걸 알기 직전까지는 빛깔도 좋고 형태도 좋다고 생각했기에 양심에 몹시 찔렸다. 그렇지만 나는 틀리지 않았다. 안경이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당당했다. 남자는 눈이 가늘어졌다. 내 말을 믿지 않는 거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따로 감정을 받아보죠.”
이쪽에 쏟아진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남자는 이쯤하기로 맘먹은 거 같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도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다영이 고개를 숙인 채 얕은 숨을 뱉어냈다. 그게 사치라는 듯 남자가 매서운 눈빛으로 정다영을 봤다.
“정다영 씨는 따라와요.”
“네.”
정다영은 도살장 가는 소처럼 남자를 따라가면서도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새 정다영의 눈이 라면 세 봉지를 먹고 잔 사람처럼 퉁퉁 불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김 비서의 이야기를 들은 강정휘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러니까, 만지지도 않고 진품이 아니다 확신을 했다 이거지?”
“네. 그렇습니다. 오래 감정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고 했습니다.”
풉 하고 강정휘가 웃었다.
“일주일 동안 일한 풋내기가 할 말은 아닐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 연적 말이야. 위조 경력만 30년이 넘는 사람이 만든 거야. 듣기로는 박물관에도 그 사람이 만든 게 전시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하하하!”
도자기는 높은 온도로 만들어져 탄소 연대측정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빛깔, 촉감, 냄새 등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TL이라는 기계로 연대측정을 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 경우 도자기 샘플이 필요해 구멍을 내야 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선호하지 않았다. 웃음을 멈춘 강정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 분야에 닳고 닳은 사람들도 못 찾아내는 걸 겨우 일주일 경력의 꼬맹이가 알아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이걸로 확실해졌네, 한지감한테 안경이 있다는 거.”
만족스런 표정으로 강정휘가 말을 이어갔다.
“정다영, 티 나지 않게 밀었지?”
“네. 정다영도 제가 밀었다는 건 모를 겁니다. 워낙 전시장이 복잡하기도 했구요.”
“그래, CCTV 보여 달라는 이야기는 안 하고?”
“정다영이 요청하긴 했는데, 보안부장하고 입 맞춰서 잘 넘겼습니다.”
“잘했어. 35억 쓴 보람이 있네.”
“근데 정말 감정 안 하셔도 됩니까? 아무리 그래도 큰돈인데…….”
“저 꼬맹이한테 그 안경이 있잖아. 가짜를 권하진 않았을 거야. 뭐 가짜여도 샀을 거지만. 그 덕분에 저 꼬맹이가 여기까지 왔잖아.”
25억에도 살 수 있는데 굳이 10억 더 주면서까지 구입한 건 한지감과의 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히죽 강정휘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안경 그게 아주 요물이야. 안경은 알고 있었어. 내가 한지감과 연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 물건을 살 거란 걸 말이야. 그게 설사 위조품이라도.”
“철저하게 이익을 얻게 하는 물건이군요.”
“맞아. 난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어. 이상하고 잡다한 게 안 들어가 있잖아.”
김 비서가 강정휘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어서였다.
“궁금한 부분이 있습니다.”
“뭔데?”
“그 안경 말입니다. 이 방에서 나가는 그 순간부터 제가 한지감을 계속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안경 같은 걸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했겠지. 그 안경은 겉으로 보이는 게 아니야.”
강정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오프닝 리셉션이 시작되었다. 이수민 작가가 등장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작가도 그림도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남자의 온몸에서 뱀이 나오는 그림, 바다가 사람의 손에 살포시 담겨져 있는 그림, 모든 사람이 거꾸로 걷고 있는 그림 등이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림 자체가 의미를 캐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림 무식자인 내가 초현실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단 하나, 시계가 널려 있는 그림으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뿐이었다. 아는 사람들한테는 뭐가 다르게 보이나? 그때 뒤쪽에서 남자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정휘 맛 갔다더니, 진짜 갔나 보네.”
“그러게 말이다. 이수민 같은 생초짜를…….”
슬쩍 보니 세미 정장을 입은 깔끔한 남자 두 명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여유로운 태도에서 미술 업계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초짜를 들일 수야 있지. 좋은 작가 발굴하는 게 갤러리의 명성을 올려주기도 하니까. 근데 영 수준이……. 쯧쯧쯧.”
“그러니까……. 게다가 이 이상한 소품들은 뭐냐?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줘야지. 되레 훼방을 놓고 있잖아.”
“그림으로 승부가 안 나니까 소품까지 들여온 거 아니야. 나 참.”
“재벌들 뒤 닦아주고 다니더니 이제 갤러리는 부업이 됐나 보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 눈에만 이상하게 보이는 게 아니었구나. 그 점이 안도가 되면서도 충격이었다. 업계에서 꽤나 유명하지만 존경을 받는 존재는 아닌 모양이었다. 뭔가 높은 사람을 알게 된 거 같아 들떴었는데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남자는 딱히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강정휘는 저렇게 휘청이는데 황덕현 대표는 계속 치고 올라가.”
강정휘와 달리 황덕현이란 사람에게는 ‘대표’란 호칭을 붙였다. 존경받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게. 지난 해 매출 1500억 찍었다며? 옥션회사 만든다고 했을 때 강정휘가 비웃었었는데.”
옥션? 경매……. 아, 미술품 경매회사인가. 그러고 보니 TV에서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경매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몇 년 전에 유명한 국민 예능에 나와서 꽤 화제가 되었었지, 아마.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저 멀리로 걸음을 옮겼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더 듣기 어려워졌으니, 나는 은근슬쩍 전시회장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인사도 했고, 일이 생겨 먼저 갔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거 같진 않았다. 정문으로 나가는데 누군가가 나를 잡아 당겼다. 고개를 돌리니 세련된 정장을 입은 40대 후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감정사로 일하시나 봐요?”
이건 뭐지? 아까 지나치게 시선을 끌었나 보다.
“감정사는 아니고, 골동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탑 옥션 대표 황덕현입니다.”
황덕현. 아까 업계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 남자였다. 이 남자가 왜 나를 붙잡지? 근데 탑 옥션 대표라고 한다. 옥션의 ‘ㅇ’ 자도 모르는 나였지만 탑 옥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미술품 경매 회사. 뭐 그게 내가 아는 전부이긴 하지만.
“네. 무슨 일이시죠?”
“아까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아…….”
뭐 그렇게까지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황덕현, 이 사람뿐만 아니라 전시회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내 이야길 엿들었으니 말이다.
“감정하시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어서요.”
인상적일 것까지야……. 내 실력으로 한 감정이 아니기에 좀 찔렸다. 감상을 말하려고 날 부르진 않았을 텐데, 진짜 목적이 뭘까?
“감사합니다.”
“골동상에서 일하신 지 오래되셨나요?”
정곡을 찔렸다. 일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말을 좀 흐리기로 했다.
“정식으로 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골동품을 봐왔거든요. 제가 일하는 가게가 아버지 가게라서요.”
삶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골동품과 함께했다고 하려다가, 그건 너무 사기인 거 같아서 입을 닫았다. 내가 말한 것 중에 거짓말은 없었다. 일주일 동안 일했으니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맞았고, 어렸을 때부터 골동품을 봐온 것도 맞다. 좋아하지 않아 멀리했다지만 그래도 반강제적으로 봐야 했으니까. 황덕현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렇군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아무리 골동품 감정을 많이 했다고 해도, 그렇게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위조품이란 확신을 하긴 어려웠을 텐데요.”
다시 한번 양심이 찔렸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인상적이셨다니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갖고 있는 물건도 감정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가능할까요?”
“네, 가능하죠.”
나는 제법 근사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오늘 혹시라도 골동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날까 급하게 며칠 전에 만들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하나도 못 돌렸지만……. 황덕현은 받은 뒤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 교환을 처음 해봐서인지 기분이 묘해졌다. 황덕현의 이름 옆에는 떡하니 ‘대표’란 호칭이 있었다. 처음 명함을 교환한 사람이 대표라니, 일주일 전까지는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언제 감정 받는 게 좋으신가요?”
“이번 주 목요일이 괜찮을 거 같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사장님께 여쭤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아무리 혼자 오는 거라도 사장님 허락이 필요하겠죠.”
혼자? 아버지와 함께가 아니라? 내 눈이 동그래졌다.
“저희 사장님께 감정 받으시려는 게 아니신가요?”
“아니요. 저는 지감 씨한테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보다는 사장님께서 더 전문적인…….”
“더 전문적인 시각보다 젊은 사람의 시각은 어떤지 알고 싶어서요. 어려우신가요?”
황덕현이 빤히 내 눈을 봤다. 찰나의 순간 동안 나는 어렵다는 근거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만들지 못했다. 결국 내 대답은…….
“어려울 리가요.”
“그럼 그때 뵙도록 하죠.”
“네.”
억지로 올린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